과장의 예술, 그 안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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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의 예술, 그 안의 심리학
  • 2020.08.03 16:00
정지된 캔버스에 발레하는 모습을 구현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제한된 물리적 차원에서 실재를 구현하기 위해 오늘도 예술가들은 특정 정보를 증폭, 과장하여 그 예술을 완성시킨다. 그 안에 숨어있는 심리학의 이야기를 해 본다.

안물안궁, 그래도 말해야 한다.

범죄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 인질의 의식을 흐리게 해 비밀을 캐내려고 악당이 약물을 주사한다. 그런데 대개 이 악당은 약물을 주사하기 전 약물의 효능에 대해 인질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준다. 사실은 관객에게 해주는 것이다.

이 비현실적인 설명 장면은 웬만한 관객에게는 불필요한 대목이다. 설명 없이 인질에게 주사를 놓아도 영화문법에 익숙한 대부분의 관객은 무슨 상황인지 알아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게다. 그러니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관객의 이해를 이런 식으로 도와줄 필요를 느낀다. 중국무협 영화의 1:1 결투 장면에서 자신의 무술 초식 이름을 외치며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 사례다. 아마도 이런 류의 설명 장면을 빼면 전체적으로 영화의 밀도와 사실감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해하기는 그만큼 어려워 관객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반대로 설명 장면을 전체적으로 충분히 넣으면 이해는 쉽지만, 영화가 느슨하고 사실감도 떨어진다. 감독은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미드 ‘CSI'는 나에게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는 드라마다.

정점이동

이와 비슷한 고민을 많은 미술가들도 오래전부터 해왔다. 이 고민에 대한 솔루션을 지각심리학자 라마찬드란Vilayanur S. Ramachandran은 '정점이동Peak Shift'이라고 했다. 라마찬드란에 따르면 미술 작품을 볼 때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대상의 핵심적이고 구조적인 특징이다. 예컨대 춤추는 무희를 그린 그림이나 조각을 보고 있다고 하자. 우리는 묘사된 대상이 어떤 동작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를 대상의 해부학적 특징을 순간적으로 분석해 춤추는 것인지 아닌지를 파악한다. 그런데 이 일이 그림에서는 매우 어렵다.

예컨대 가벼운 어깨짓이나 손짓으로 흥을 내는 우리의 춤을 그림으로 표현한다고 하자. 발레와 같이 동작이 크고 변화가 심하다면 모를까 그 미세한 몸짓을 과연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미술가는 영화감독과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영화감독이 상황에 대한 정보를 더 집어넣어 스토리 이해도를 높이듯이, 미술가는 특정 자세에 대한 정보, 가령 올라간 어깨짓이나 손목의 꺾임 등을 실제보다 더 과장해 동작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다. (물론 이때에도 과장을 어느 선까지 할 것인지는 고민거리일 것이다.) 이 과장을 라마찬드란은 ‘정점이동’이라고 했다.

캐리커쳐에서 인상주의까지 넓게 퍼져있는 정점이동

과장법이라고 단순하게 볼 수도 있지만, 의미가 다소 애매할 수 있어 그보다는 정보의 증폭이라는 다소 어려운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는 정점이동의 사례에 인물의 두드러진 특징을 과장한 캐리커쳐와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려 한 인상주의 미술까지도 포함시켰다. 우리가 누군가를 보고 순간적으로 광대뼈가 매우 불거졌다는 식의 인상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이런 특징을 별로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판단이 갈리는 것은 특정한 사람에게는 두드러지게 지각된 특징이란 것이 실제로 그리 대단한 차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 미술은 바로 이런 순간적으로 혹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었던 특징을 증폭한 셈이니 ‘정점이동’의 사례가 된다.

춤도 정점이동의 산물

발레리나를 많이 그린 드가Edgar De Gas의 그림들을 보면 성공적인 정점이동을 보기도 하고 좀 더 정점이동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예컨대 좌측의 그림을 보면 발레리나의 우아한 동작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어려운 각도에서 정확하게 표현했는데 내디딘 발을 보면 실제와 달리 크기나 굽힌 각도 등이 조금 과장되어 있다. 얼굴은 반대로 조금 축소된 듯하다. 반면 우측의 발레리나는 자세를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정점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춤을 그린 그림 이야기했지만 춤 자체도 정점이동의 사례가 된다.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는 중력이 약한 곳에서 미끄러지듯 걷는 동작의 발을 끄는 스텝을 증폭한 경우다. 이렇게 ‘정점 이동’은 수많은 미술품들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그리고 그 설명의 범위는 작품과 감상자의 관계까지로 확장된다. 이 개념은 대상의 정체나 행동 등을 명확히 이해시키는데 필요한 적절한 정보의 양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그 양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의 이해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발레리나를 즐겨 그렸던 드가의 작품. Edgar Degas (1834–1917), The Rehearsal Onstage, 1874, 
Pastel over brush-and-ink drawing on thin cream-colored wove paper, laid down on bristol board and mounted on canvas, 53.3 * 72.4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긴장-이완론과 정보의 증폭

한 편으로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대상의 정체나 행동을 정확히 이해하지만 특별한 미적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에 빗대어 정보의 증폭이 미적 경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질문을 접할 때마다 버라인D. E. Berlyne이나 크라이틀러H. Kreitler의 각성이론이나 심리적 긴장-이완론의 탁월함을 느끼곤 한다. 낯선 이 이론의 골자만 이야기하면 미술 속 대상은 실재하는 대상이 갖고 있는 것에 비해 매우 적은 양의 시각 정보만 갖고 있다. 그러니 감상자는 그 적은 정보를 토대로 대상의 정체나 행동을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을 갖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어려움은 심리적 긴장을 의미하고 정점이동을 통해 증폭된 정보는 이 긴장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긴장-이완 과정은 우리의 쾌감중추를 자극하고 이 쾌감을 우리는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보면 미술 참 쉽다! mind

지상현 한성대 융복합디자인학부 교수 지각심리 Ph.D.
홍익대 미술대학과 연세대 대학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회화양식style이 결정하는 감성적 효과에 관한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는 한중일의 문화를 교차비교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삼국 미술양식의 차이를 규명하고 이 차이를 결정하는 감성적 기질의 차이를 추정하는 일이다. 관련 저서로는 <한국인의 마음>(사회평론)과 <한중일의 미의식>(아트북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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