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나를 잠식할 새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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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 나를 잠식할 새 없이.
  • 2020.08.11 12:08
개강이 다가오면 여지없이 개강스트레스에 아토피와 위염이 도지지만 찐불안러는 이 와중에 이미 생존법을 익혔다오

오늘 하루도 잘 수습하고 있다. 뒤집어진 풍뎅이 같은 기분으로 눈을 떴던 아침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다.

 

아침, 여지없이 630분 경 눈이 떠졌다. Early morning awakening (EMA). 한참 더 잠들어 있어도 될 시간에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cotisol이 치솟으면 불안에 치받쳐 눈을 뜬다.

샘들, EMA 시작이요하면 임상심리전문가 선생님들이나 임상심리/정신과학교실 교수님들이 속한 단톡방 멤버들은 나의 딱함을 눈치채고는 혀를 끌끌 찬다. 부러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는 시시한 약속을 만들어주려는 마음들에 꽤나 쑥쓰러워도, 당분간은 심리치료 받을 시간은 없으니 이렇게라도 토로하고 털어내며ventilation 지나가야 한다.

며칠, 몇주가 지나 무력감과 불안의 다음 주자가 나오면 그때에는 또 내가 다른 분의 지지자가 되어준다.

 

불안은 타고 태어나는 기질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불안 높은 아이가 치료장면에 방문하면 부모 면담이 필수가 될 수 밖에.

부모가 물려준 불안과 은연 중에 가르친 불안이 이 친구의 행동을 이렇게나 쓸데 없이 잘 조성해둔 것이어서, 이때부터는 부모의 행동 수정이 관건이다. 속으로는 애가 타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게 한다.

조심해라거나 더러워’, ‘위험해’, ‘하지마따위의 참견이 줄어들면 아이들의 뇌는 꽤나 변화가능성이 높아서plasticity가소성, 순진하게도 환경의 변화에 잘 반응한다. 차츰 학습된 불안의 그림자는 옅어지고, 타고난 기질만 아이들을 괴롭힌다. 그만도 굉장히 큰 짐이지만.

 

아쉽게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은 불안의 강도가 높다고 해서 편안히 치료장면에 갈 수 있는 세대는 아니었을 것이고, 기질과 환경의 환장의 콜라보가 만들어낸 불안러들의 비중이 높다 (불안이 적은 사람이 이런 심리학 관련 글을 읽을 리도 없거니와…).

여기서 잠깐.

본인이 걱정이 많은 편인데 불안 기질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땡, 이미 그는 타고 태어난 불안러가 아니다. 불안러는 이미 불안 기질을 잠재우기 위해 6,7세 경 부터 오만 노력을 해왔다.

혹은, 주변 사람 중에 누가 불안 기질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땡, 역시 타고 태어난 불안러가 아니다. 불안러는 불안러를 알아본다.

이들의 불안은 미묘하게 동기화되었다가 미묘하게 각자의 영역에서 특유의 파동으로 불안을 날카롭게 과시한다. 불안러들의 뿌리 깊은 불안의 역사는 각자에게 묘한 자부심이기도 해서, 이 그룹의 대화는 상당히 당황스럽다. 서로 진정을 시키려는 것인지 서로 불안 배틀에서 이기려는 것인지 애매하게 한참 동안 불안 만담을 주고 받는다.

 

아무튼 기질적 불안러는 시나리오 작가를 했어도 이백번을 했을, 굉장한 시나리오들이 머릿속에서 매일 솟구치는 경험을 하기에 그 만으로 피로도가 상당하다. 시나리오는 청소년이 주인공인 한예종 졸업작품 스타일의 독립영화면 좋으련만, 잘해야 페이소스가 가득한 유럽영화, 최악은 늘 할리우드식 재난영화이다. 고양이 목숨이 아홉 개라면 불안러들의 목숨은 한달에 아홉 개쯤 된다. 따지고 보면 별 큰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을 두고 가장 파국적인 상상으로 마음 속에서 파멸을 맞기를 반복한다.

주문한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들고 계단을 오를 때 계단에 걸려 쟁반과 음료를 엎는 상상을 하거나, 지하철 계단 어딘가에서 굴러 혹은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멈춰서 심하게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비행기를 탈 일이 있다면 그래도 간단히 유서라도 작성했어야 했을까, 누군가 내 남은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이메일 계정과 비밀번호는 적어 두었어야 하는 건 아닐까, 분주히 생각한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70%가 물이라면, 이들의 정신을 구성하는 70%는 불안이다.

나 역시 기질과 환경이 잘도 키운 탓에 불안의 씨앗이 늘 언제든 개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니 아침 일찍 눈을 떠 제일 먼저 하는 일과는 역시 걱정이다. 아침마다 동네 한바퀴 씩 돌듯 걱정의 수레바퀴를 신나게 돌린다. 대형 다트 룰렛이 세차게 돌다가 한 곳에 머무르면 그때부터 그 다트 룰렛은 한동안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멈춰선 곳에서 불안의 담요를 두르고 누운 채 얼어붙어 있다 (얼어붙은 채 누운 것이 아니다. 눕고 싶어서 눕는 것이 아니라고!).

 

얼어붙어 있는 시간은 40대인 지금에와서는 꽤나 줄어들었다. 대략 5초에서 10. 그 시간 동안 잠시 졸여지는 느낌으로 머물러있다가, 오늘의 할 일을 차례로 떠올려보면서 (뜬금없이) 번개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크게 내쉰다 (배신감을 느낀 불안러 동지들이 있다면 진정해주기 바란다. 명색이 임상심리를 전공한 사람인데 5초에서 10초만에 회복은 하는 게 맞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 내가 발 붙이고 있는 현실이 눈에 들어오고, 호흡도 점차 안정이 된다. 현관 밖에는 새벽 7시에 배송되었을 식재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커터칼 하나 들고 이 식재료 놈들…’하며 역할극을 하면서 현관문을 연다. 또 다른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돌리는 곳에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속히 처리해주길 기다리는 일들이 있음을 알고, 내가 내 호흡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마음 속이 염려와 불안으로 터져나갈 것 같으면 나의 몸을 움직여야 한다

이후로는 그나마 쉽다. 연쇄적으로 하나의 일, 그 다음의 일, 그 다음의 일을 생각 없이 한다. 고민도 없다는 듯 불안도 없다는 듯 커피를 내리고, 달걀을 부치고, 다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배달 온 양파 한 망을 열심히 까서 랩으로 싸서 지퍼백에 넣어두고, 알콜솜으로 핸드폰을 한 번 더 닦고, 가지고 나갈 커피 한 잔을 더 내려, 출근이다.

 

출근 이후에는 걱정의 수레바퀴가 아닌 일의 수레바퀴가 알아서 나를 굴린다. 인간이 모든 일에서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개인적으로는 반대다. 일부의 과제들은 나의 어떤 생각도 판단도 개입될 필요 없이 진행될 필요가 있다.

마음 속에서 수십 번의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른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느라 수십년을 허비하면서, 문득 내가 평온을 느끼는 때가 참으로 일관됨을 알았다. 
요가 수업의 마지막 사바아사나(Savasana 송장처럼 신체의 어떤 기관도 움직이지 않고 등을 대고 누운 자세)를 할 때와, 학회 등으로 열 시간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고 있어야 할 때, 그리고 대여섯 시간씩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할 때, 나는 극도의 안전감을 느꼈다. 강제로 나의 결정권을 앗아가는, 그러나 분명히 시간 한정적으로 외부의 통제가 나를 강박하는 때에 불안러들은 기꺼이 마음의 조타장치를 외부에 냅다 던져버린다.

그때 알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한 통제권이 아니었다.

책임의 소재가 내가 아닐 때 나는 분명히 편안하고, 어떤 일은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 모든 조건을 내가 조성할 수 없으며 모든 결과에 내가 개입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손을 떠난, 혹은 애초에 나의 손에 들어오지 않은 여러 상황에 감사할 일이지, 애면글면 그걸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는 건 내 불안에 휘발유와 신나를 들이붓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아니어도 돼,와 이건 내가 잘 하지,의 결정이 빨라질 때에, 가당 찮게 품고 있던 욕망과 그 욕망에서 오는 긴장이 수그러든다.

넷플릭스 시리즈 중 가히 최고의 작품, 기묘한 이야기.시종일관 옥죄어 오는 위협에도 아이들은 열심히 페달을 밟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간다. 
넷플릭스 시리즈 중 가히 최고의 작품, 기묘한 이야기.시종일관 옥죄어 오는 위협에도 아이들은 열심히 페달을 밟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오간다. 

 

나는 또 내일 아침이면 또 다시 그 엉거주춤한 꼴로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10초간만 괴로워할 것이고,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쳐가며 나의 불안을 5분 간 토로할 것이고, 전광석화와 같이 (…)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갈 것이고, 10시간 동안 나의 영역에서 다시 없을 일꾼으로 근면성실하게 일하며 매일을 최선을 다 해 수습할 것 역시 알고 있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매일 이렇게 살면 위인에 다름 아니다.

이전에는 통제감을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급격히 불안정해졌다면, 이제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저 팝콘을 튀기고 미용실 의자에 앉아 묘한 안온감에 거울 너머를 보듯 구경할 것 역시 알고 있다.

 

불안이 나를 잠식할 새 없이 내가 나를 굴리고 만다. 그럼 뭐라도 남는 건 있겠지. mind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임상심리학회 홍보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대한뇌기능매핑학회 대의원 및 학술위원. 정신병리 및 심리치료의 효과를 임상과학 및 뇌신경학적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연구를 지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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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ㅅㅎ 2020-08-12 16:08:04
임상심리학자에게도 때때로 불안이 엄습해 온다는 걸 아니까 위안이 되네요. 불안이 오면 몸을 움직여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