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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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 2020.08.26 10:40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고 하는데 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개인이 활력을 유지하는 데에 꼭 필요한 자원 중 하나가 자기만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결혼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결혼이 뭐라고 생각해? 결혼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거야.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고. 결혼은 서로의 시간을 평생동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야. 그런데 당신은 혼자 제주도를 내려가겠다고?” 연구년(안식년) 1년간 제주도에 내려가 있으면 어떠하겠냐는 나의 제안에 대한 와이프의 태도는 단호했다. 1년간 낯선 땅에서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계획하던 나의 꿈은 불과 두시간만에 물거품이 되어 공기 중에 퍼져갔다.

교수라는 직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연구년이다. 6년의 활동을 정리하고 자신의 학문생활을 돌아보고 그 다음 시즌을 위한 재충전을 할 수 있다. 낯선 장소에서 학생의 역할을 다시 해 볼 수도 있고, 부족했던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을 쌓을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나에겐 이 꿈같은 기회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처음 임용된 대학에서 2년 반을 근무하고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그 기간이 다시 원위치가 되어 버렸다. 천신만고 끝에 교수가 된 지 9년차에 시기를 맞았지만 이번엔 학교 측의 사정이 발목을 잡았다. 교수대 학생비를 맞추어야 하는 소규모 대학에서 너무 많은 교수가 자리를 비우면 안된다는 명목으로 나의 연구년은 다시 2년 반이 미루어졌다. 그리고 받게 된 이 기회. 이제 어디로 갈 지만 고르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나에게 쉬운 연구년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만한 대사건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대사관의 문은 굳게 닫히고, 외교부는 해외 여행 자제 경보를 하향시키지 않고 있다. 국내의 확진자 숫자는 쉽게 줄어들지 않고 백신의 개발 소식도 요원하기만 하다. 우리보다 더욱 사정이 나쁜 유럽과 미국의 학교들은 대부분 출근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어서 보내는 문의 메일마다 정중하게 올해는 방문교수를 받을 수 없다는 답변을 보내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제주도 행이었다. 제주도에 1년짜리 집을 구하고 제주도의 대학이나 병원에서 1년 방문교수를 알아보자는 게 내 새로운 계획이었다. 나는 주중에 열심히 공부와 연구를 하고 주말에는 제주도의 곳곳을 여유있게 탐색한다. 와이프가 방문을 한다면 제주도 토착민(?)의 자세로 다양한 비경을 보여줄 수도 있다. 완벽한 대안이었다. 그런데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는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왜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하냐고. 결혼에 불만이 있냐는...

내 삶의 활력, 혼자만의 시간

생각해보면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만나는 사람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누군가가 있을 때에도 난 혼자만의 여행을 무척 즐기곤 했다. 국제 학술대회를 가게 되면 보통 사비를 들여서 일행보다 일찍 현장에 도착하곤 했다. 학회 공식 기간에 연구비로 결제할 숙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저렴하지만 여행자들의 활기가 넘치는 게스트하우스에 작은 몸을 누이고, 특별한 계획 없이 느릿느릿 시내를 다니다 골목 한 켠의 커피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런 시간들이 너무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일행이 없으니 SNS에 올릴 명소를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국내 대형포털 사이트가 추천하는 맛집에 줄을 설 필요도 없다. 그냥 되는 대로 현지인들과 어울려 먹고 되는 대로 걸으면서 그 곳 사람들의 생활을 느껴보는 것이 그 자체로 힐링이 되었다. 

여기에 덤으로 그 지역 대학 심리학과를 방문해보는 것은 또 다른 자극이 된다. 우리는 평상 시에 우리의 국력이 세계 10위 정도는 된다는 착각을 하고 사는 것 같다. 무역 지표로만 본다면 대충 그럴지도 모르지만 대학을 가보면 우리의 진정한 현주소를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상대로 생각도 하지 않는 이베리아 반도나 동유럽의 대학들을 방문해 보아도 그들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와 인력의 심리학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그곳에서 낮아짐을 느끼고 우리나라 심리학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자극을 받곤 한다. 이게 모두 혼자 다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다.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얼굴도 모르는 캐나다의 한 박사과정생과 다양한 논의를 주고 받았었다. 단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논문을 준비한다는 것 만으로도 큰 위안과 도전이 되던 그 친구가 공부하던 몬트리올 대학교 심리학과를 찾았다. 물론 그는 졸업하고 이 자리에 없지만.
박사논문을 준비하며 얼굴도 모르는 캐나다의 한 박사과정생과 다양한 논의를 주고 받았다. 단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논문을 준비한다는 것 만으로도 큰 위안과 도전이 되던 그 친구가 공부하던 몬트리올 대학교 심리학과를 찾았다. 물론 그는 졸업하고 이 자리에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해외 여행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틈틈이 지도를 펼쳐서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을 찾아내어 방문하는 것도 인생의 큰 즐거움이다. 드넓은 평택의 평야를 걸으며 곡창 지대가 무엇인지를 체험하고, 가야산 관광단지에서 하루에 네 번 다니는 지역버스를 기다리고, 사북읍의 시내를 걸어서 폐광촌의 기념물을 돌아보는 경험은 혼자 쓸 수 있는 시간의 자유도가 높은 사람이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운 도전일 것이다. 물론 이런 체험 자체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많겠지만. 지방에서 학회나 약속이 생기면 최대한 약속보다 일찍 출발해 가장 느린 경로로 한반도의 이곳 저곳을 누비며 나만의 여행을 시작하곤 했다. 그렇게 지나간 동네에 산다는 사람들이나 학생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같은 고향 사람을 만난 듯 반갑게 이것 저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관광지가 아닌 삶의 현장을 다녀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라니,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게다가 고심 끝에 생각해낸 제주도 행도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함께 지내는 데 불만이 있냐는 의심에 대한 답까지 해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인류의 근무시간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적어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나라들에서는 틀림 없이 그렇다. 그런데 근무시간이 적기로 이름 난 미국에서 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기 어렵다고 말한다Bianchi, 2009. 특히 직업을 가진 여성에서 이런 호소가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직업과 가사, 양육을 모두 부담해야 하는 책임이 주된 이유이다. 아이를 둔 여성이 아니더라도 현대의 인류는 개인적인 시간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명칭의 사회적 모임이 존재하고 물리적으로 함께 하지 않을 때에도 SNS에 매달려 타인의 동태를 살피고 나의 삶을 광고하는 데에 어마어마한 시간을 쓰고 있다. 거기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까지 합하면 24시간 중 오직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문제는 타인과 보내는 시간이, 그리고 비대면 상황에서조차 타인들을 의식하면서 보내는 SNS 속의 시간들이 모두에게 좋은 의미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원보전이론Conservation of Resource:COR; Hobfoll, 1989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자원을 찾고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물론 이 자원의 의미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개인적 시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좋은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가사와 양육에서 해방된 모든 시간이 자신을 재충전 시키는 개인적 시간이 될 수 있다Van Horn, Bellis, & Snyder, 2001. 일기를 이용한 연구에서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휴식을 취하고 운동을 하는 레저 활동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는 결과도 있다Kahneman, Krueger, Schkade, Schwarz, & Stone, 2004. 각자 충전을 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일상의 책임에서 벗어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Budescu, Sisselman-Borgia, & Taylor, 2018.

대학교수가 다른 직업에 비해서 고된 직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세간에 회자되는 것처럼 교수가 학기 중 9시간만 출근하는 등록금 날강도는 아니다. 부모님도 와이프도 이해하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교수는 많은 시간의 근무와 밤샘을 밥먹듯이 하는 직업이다. 물론 시간외 수당 따위는 청구할 부서조차 없는 직업이다. 그럼에도 교수라는 직업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의 스케줄을 스스로 통제할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딘가를 떠나고 싶다면 그 기간 동안의 일을 언제로라도 변경해서 처리만 하면 그만이기 떄문이다. 실제 연구에서도 가사와 육아의 스케줄을 스스로의 의지로 조정 가능한 주부들의 경우 시간에 대한 통제권이 없는 동일한 노동시간의 주부들에 비해 자신의 시간이 충분히 여유롭다는 지각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Hill, Tranby, Kelly, & Moen, 2013. 중요한건 절대적 시간이 아니라 내 의지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코로나의 세계적 유행은 시간 조정의 자율성이라는 내 직업의 장점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시간은 있으나 언제나 집 주변을 크게 벗어날 수가 없다. 출국은 봉쇄되어 이제는 가장 가고 싶은 국내 관광지하면 영종도가 떠오를 지경이다. 국내여행을 다니면 되지 않겠냐만은 사람이 많은 곳을 가급적 피하라는 정부의 권고는 여전히 지엄하다. 무엇보다 함께 떠나야 할 와이프의 태도가 굳건하다. 코로나가 해결될 때까지 사람이 밀집한 곳을 가지 않으시겠단다.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러한 관광지가 존재할까? 쾌적한 휴양을 선호하는 와이프가 인적이 드문 지역관광지에서 편안한 휴식을 할 장소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개인적 시간의 심리적 의미

스스로의 시간을 얼마나 개인의 의지대로 쓸 수 있는 지에 대한 지각은 개인의 행복과 정신건강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Hobfoll, 1989; Milkie, Raley, & Bianchi, 2009. 나는 지금 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블루라는 부정적 심리 상태도 아마 이런 원인에서 시작될지 모르겠다. 

당장 어쩔 수 있는 선택은 부족하지만 인류는 이 재앙을 언젠가 극복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시기를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개인적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고 타인의 ‘개인적 시간’을 존중하는 자세이다. 이젠 학교 교직원분들의 잦은 휴가에도 보다 전향적인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그 분들이 행복해야 우리 학교도 발전하는 것이니까. 대학원생들의 취미생활과 휴가도 적극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할 필요가 느껴진다. 그만큼 편안하게 쉬고 돌아올 수 있도록 대체근무의 시스템도 확보를 해야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와이프의 개인적 시간을 위해 노력해야할 것 같다. 아무 곳도 다니지 못하고 1년 이상을 집 언저리에서 살고 있는 와이프가 내 취향을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내 개인적 시간이 중요한 만큼 함께 사는 사람의 개인적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리고 서로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오늘 내가 준비할 일인 듯 하다.

언젠간 주어질 나의 시간을 위해

이렇게 글을 쓰며 언젠가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는 나의 손목에는 제플린의 GMT 시계가 함께 하고 있다. 그리니치 표준시를 의미하는 GMT는 일반시침 외에 24시간을 가르칠 수 있는 GMT시침이 따로 있어서 지구상의 어느 장소이든 그 시간을 함께 표시할 수 있다. 너무나 가고 싶은 나라와 도시가 생기면 나는 제일 먼저 이 GMT 시침을 조정해서 그 도시에 맞춘다. 그곳의 시간을 확인하면서 그곳에서의 생활을 꿈꾸고 심리적인 시차를 조정하는 것이다.

독일 시계브랜드 제풀린의 GMT 모델이다. 24시간을 보여주는 제 4의 바늘이 내가 살고 있지 않은 다른 도시의 시간을 알려준다. 외국과 연락을 취할 때나 비행으로 시간대가 변경될 때 유용한 기능이지만 나에게는 가고싶은 도시를 상상하는 기능을 해줄 뿐이다. 지금은 밀라노의 시간이 설정되어 있다.
독일 시계브랜드 제플린의 GMT 모델이다. 24시간을 보여주는 제 4의 바늘이 내가 살고 있지 않은 다른 도시의 시간을 알려준다. 외국과 연락을 취할 때나 비행으로 시간대가 변경될 때 유용한 기능이지만 나에게는 가고 싶은 도시를 상상하는 기능을 해줄 뿐이다. 지금은 밀라노의 시간이 설정되어 있다.

인류에겐 가장 불행한 순간에도 희망을 생각할 수 있는 판타지란 무기가 있다. 제플린을 손목에 차고 영종도를 향할 날을 기다린다. mind

<참고문헌>

  • Bianchi, S.M. (2009). What gives when mothers are employed? Parental time allocation in dual-earner and single-earner two-parent families. In D.R. Crane, E.J. Hill (Eds.), Handbook of families and work: interdisciplinary perspectives (pp. 305–330). Lanham, M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 Budescu, M., Sisselman-Borgia, A., & Taylor, R. D. (2018). Perceptions of adequate personal time and wellbeing among african american families with adolescents. Journal of Child and Family Studies, 27(6), 1763-1773. 
  • Hill, R., Tranby, E., Kelly, E., & Moen, P. (2013). Relieving the time squeeze? Effects of a white-collar workplace change on parents. 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 75(4), 1014–1029.
  • Hobfoll, S. E. (1989). Conservation of resources: a new attempt at conceptualizing stress. American Psychologist, 44(3), 513–524.
  • Kahneman, D., Krueger, A. B., Schkade, D., Schwarz, N., & Stone, A. (2004). Toward national well-being accounts. The American Economic Review, 94(2), 429–434.
  • Milkie, M. A., Raley, S. B., & Bianchi, S. M. (2009). Taking on the second shift: time allocations and time pressures of US parents with preschoolers. Social Forces, 88(2), 487–517.
  • Van Horn, M. L., Bellis, J. M., & Snyder, S. W. (2001). Family resource scale-revised: psychometrics and validation of a measure of family resources in a sample of low-income families. Journal of Psychoeducational Assessment, 19(1), 54–68.
최승원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덕성여대 심리학과 부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학은 반드시 생물-심리-사회적 접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기에 언젠가는 심리학이란 이름보다 더 발전적인 개명이 필요하다고 믿는 심리학자. 상담센터와 정신과병원을 거쳐 대학에 와있는 이분야 진로탐험의 교과서적인 인물이나 진로상담보다는 괴팍한 연구자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람. 기분장애와 B군 성격장애가 주요연구관심분야이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떤 곳에서든 최선을 다할 멀티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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