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는 언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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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는 언제 오는가
  • 2020.08.19 01:03
지연행동(Procrastination, 꾸물대기, 미루기)에 몰두해 작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면, 그 이면의 역동을 보아야 할 때.

그것이 음악이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제안서든, 아무튼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뮤즈가 찾아오기를 바란다. 뮤즈 영접을 위한 각자의 의식ritual은 다양하다.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럿이 모여 장시간의 브레인스토밍 brainstorming 회의를 하기도 한다. 내일이 이삿날인듯 갑자기 책상 정리를 하거나, 뭔가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찾겠다며 질 낮은 컨텐츠의 유튜브 컨텐츠를 오가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 시간은 몇 시간, 며칠, 몇 달이 되기도 한다. 모두 지연행동Procrastination, 꾸물대기, 미루기들이다.
개인의 정신건강과 실제 작업물의 질을 고려한다면 추천할만한 방법은 아닌, 잡기들이다.

나 역시 한때 탁월한 작가가 되어 보겠다는 그릇된 열망으로, 잘 쓰지 않는 찬장 곳곳에 IPA 맥주나 와인과 위스키를 수상쩍게 비축해 두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도 괜히 몰래) 술을 마셔가며 글을 쓰던 버릇이 있었는데, 다년 간의 경험 이후 글을 위한 음주 의식은 이제 관두었다.
글은 늘지 않고 술만 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잠시 잠깐의 효과성(혹은 기분탓)이 있기는 해도, 알코올이나 약물이 창의성이나 생산성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높인다는 보장은 없다. 술의 효과를 입증한 실험연구가 간혹 있긴 해도, 일상생활에서 + 개인이 + 자신의 창의성을 위한 알코올의 적정량을 알기란 상당히 어렵다.
더욱이, 음주 운전 단속에 걸리기 시작할 정도(…)의 양이 그나마 창의성이나 생산성을 높이는데, 보통 작업을 명분 삼아 술을 마시는 이들은 일단 마셨다 하면 늘 적정 수준을 훌쩍 넘긴다. 술로 인해 개인의 인지기능은 느려지고 사고의 관점은 좁아져, 생산하는 결과물이라곤 주사 레퍼토리와 참신한 흑역사 뿐이다.

작업을 핑계로 대마초 같은 약물을 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역시 좋은 선택은 아니다. 고용량의 대마초를 사용한 집단은 저용량 대마초 집단이나 심지어 아무 약물도 사용하지 않은 집단에 비해 (대표적인 창의성 지표인) 확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가 손상되어 있었다는 2015년의 한 연구가 대표적인 증거이다. 이 네덜란드 연구는 수많은 대마초 사용자의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결과가 참 깔끔하게 나와 반박불가하지….
엑스터시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2014년의 연구에서도, 본인들이 자평하는 창의성만 아주 약간borderline trend 높아져 있을 뿐 실제 이들의 창의성은 높은 편이 아니었다. 결과가 참 머쓱한 관계로, 연구참여자들이 이 논문을 못 읽었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 이러한 연구들이 알려지면서, 약물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에 균열이 일어났다. 대마초가 명곡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스눕 독이나 커트 코베인, 폴 매카트니가 자꾸 대마초 이야기를 하니 대중이 대마초에 오귀인 misattribution 했을 가능성들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애초에 대마초 없이도 명곡을 썼을 사람들이기도 했다.[1]

대마초와 헤로인 과용으로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커트 코베인. 그러고보니 이미 십수년전에, 스물여덟에 시간이 멈춘 커트코베인보다 나는 나이가 더 많아져버렸네.
대마초와 헤로인 과용으로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커트 코베인. 그러고보니 이미 십수년전에, 스물여덟에 시간이 멈춘 커트코베인보다 나는 나이가 더 많아져버렸네.

생각나는 대로 엄격한 검열 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방식을 말하는 브레인스토밍은 또 어떤가. 많은 사람들은 실제의 일을 하기보다, 자신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에 도취되고자 회의를 사용한다. 왜 하는지 모르겠는 회의들을 지속하고 있다면, 단 한 명의 기분을 위해서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으면 된다.
안타깝게도,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 (garbage in, garbage out, GIGO)는 통계학의 금언은 브레인스토밍에도 적용된다. 개인 혼자 하는 브레인스토밍과 달리, 여럿이 하는 브레인스토밍의 효과성에는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쓰레기 같은 (워딩이 너무 강한데, 이건 내 탓이 아니다. garbage…) 수많은 회의를 기억해보라. 누군가의 프로젝트를 위해 열 사람이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해 봤자 30인분의 거대한 쓰레기만 나올 뿐이며 나중에 이 쓰레기를 치우는 프로젝트 담당자만 죽어나는 것이다. 회의가 길어질수록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참신하고 알차게 무책임한 아이디어들이 여기저기서 속출한다. 창의적으로 못된 자들이다일의 시작은 그만큼 또 지연된다.

책상 정리 역시 일을 제때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그럴듯한 피난처다. 책상 위 뿐 아니라 전자제품의 전선들까지 갑자기 케이블타이나 빵끈으로 단단히 묶어 정리하고, 하다하다 바탕화면까지 정리하다 보면 내가 이 동네의 곤도 마리에[2]가 된 것 같고 비포애프터 사진도 찍고 싶고 마음도 참 산뜻하다. 물론 이런 책상 정리를 결연히 막을 일은 아니지만 시험일이나 마감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면 일의 우선순위는 단단히 잘못 되어있다. 심지어, 창의성을 요하는 일이라면 책상을 더욱 그냥 두었어야 했다.
2013Psychological Science에 게재된 한 연구에서 지저분한 방에도 꽤 괜찮은 기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었다. 세 차례의 실험에 따르면[3], 기부와 같은 도덕적 업무를 처리하거나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지기에는 깔끔한 방이 효과적이었고, 책이나 종이가 흩어져 있는 지저분한 방에서는 새로운 것에 대한 접근성이나 창의성이 증가했다.
그러니 파일 더미와 일회용 커피컵 들로 엉망진창인 책상을 바라보면서 애진작부터 이곳에 머물러있던 뮤즈를 새삼 맞이하는 것이 작업에는 더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술이든, 회의든, 청소든, 대체 이 효과 없어 보이는 의식들은 왜 고집하는가.

사실 여러 답이 가능한데, 첫째, 작업을 위한 일련의 의식들이 과학적인 근거는 부족할지언정, 기복신앙으로 이를 극복하는 케이스가 있다. 가짜약placebo플라시보 효과를 누리는 분들이다. 2017년의 한 짓궂은 연구는 연구참여자들에게 특정 냄새가 창의성을 높여준다며(물론 거짓) 이 냄새를 맡게 하고 창의성 게임을 수행하게 했다. 그 결과, 이 가짜 창의성 증진냄새를 맡은 45명의 참여자들의 평균 창의성이 실제로 높아져 버렸다….
위약효과를 쏠쏠히 이용하고자 뭔가 자신만의 루틴을 만든다면 그건 꽤 괜찮은 방법이다. 다만 술이나 약물과 같이 본인의 인지기능이나 활력에 해가 되는 방법은 자제할 것. 특정한 향이나 음악, 소리를 이용하거나, 원두를 천천히 갈아 커피를 마시는 것과 같이 자신만의 행동 개시 방법을 찾아 오늘의 새로운 작업을 준비하게끔 뇌에게 예열 시간을 주는 것이 좋다.

두번째로 조금 더 병리적인 경우를 살펴보자면, 본인의 의지가 박약해서 모든 일들을 뒤로 미루게 되는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이 지연행동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 자정이 가까워가는 시각, 나는 왜 오늘도 글 한 줄을 적지 못했지, 왜 오늘의 작업량을 채우지 못했지, 왜 그때 침대에서 뛰쳐나오지 못했지, 등의 자책에 휩싸이는 분들은 지연행동-자괴감 무한루프의 성실한 마라토너이다 (어찌저찌 하다보니 하루가 그냥 감  나는 의지가 박약하구나   .. 자괴감   다음날까지 이어지는 무기력   어찌저찌 하다보니 하루가 그냥 감 ⮕ 나는 의지가 박약하구나 ⮕ .. 자괴감).
그러나 이 지연행동과 관련한 수많은 연구들에서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지연행동에 대한 개인의 프레임은 바뀔 필요가 있다. 특히 모든 인간의 의지는 원래 약해 빠져서 절대 자신의 의지를 과신하지 말라는 여러 연구들을 고려하면, 의지 문제로 남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것만큼 무례한 일도 없다.
사실 병리적인 지연행동은 개인의 정서 조절 문제에서 비롯된다. , 지루함, 불안, 무력감, 실패에 대한 염려 등 부정적인 정서가 문제다. 이런 감정들이 올라올 때에 이를 적절히 다루는 기술이 없다면 그때부터 손쉽게, 그리고 적은 비용으로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 공상, 집안 정리, 유튜브.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 보다는 안 하는 쪽이 이로울 거라 믿고 이 지연행동들을 기꺼이 끌어안아버린다. 어쨌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내 행동이 단순한 의지 박약의 문제가 아니며 (이건 그냥 인류 보편적 문제다), 이 지연행동은 심리학에서 정식으로 다루는 임상 문제 중 하나임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실행력을 비난하는 패턴을 잠시 멈출 수 있다. 현재와 미래의 자신을 하대하고 자기혐오감을 느끼던 분들이라면, 대체 자신 안의 어떤 역동이 자신을 이불 속이나 유튜브에 붙잡아 두는지 낯설게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심리치료를 통해 불편한 감정이 반복적으로 올라오는 맥락을 살피고, 적응적인 정서 처리 기술들을 익힐 수도 있다.

일은 시작도 안했는데 왠지 내일의 마감이 두렵지 않은 괴이한 평온이 내 마음 안에 깃들어 있다면,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싸인이다. 반복되는 지연행동이 나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마감일 전날은 으레 긴장되는 것이 맞다. 창조적 작업물이 아닌 삼류 카피본, 혹은 창조적인 쓰레기를 만든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이로 인한 나의 평판의 변동에도 예민해지는 것이 맞다.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이 어때서? 그 감정들도 역시 나의 창조적인 작업물들이다.

마감일은 여지 없이 온다. 마감일에 맞서 진짜 창조적 작업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내가 수행하는 행동이다. 이것만 기억하자. 정말로 어딘가 뮤즈가 있다면, 그 뮤즈는 우리의 누적된 작업량을 봐가며 작업 도중에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지 작업을 여차저차 열심히 미루는 자에게 오는 법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행동을 개시할 때다. 지연행동만 빼고, 그 어느 것이든.

진짜의, 행동 말이다. mind

 

[1] 사실 창의성 높은 집단은 약물을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다. 창의성과 약물 남용 간 관련성은 (여러 연구들을 집대성하는) 메타연구meta-analysis로 입증된 바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들로는 약물 덕에 창의성이 높아진 것인지, 창의적인 인물들이 결국 약물에 빠지는 것인지, 혹은 유전자나 호기심과 같은 어떤 제3의 변인 때문에 창의성도 높아지고 약물도 남용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점은 아무튼 둘은 상관이 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 창의성 꽤나 있어 그것이 천형이 되어(…) 나이 들어서도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약물에 빠질 위험성 또한 높을 수 있기에 애초에 술이나 약에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2] 물건을 가슴에 댔을 때 ‘설레지 않는 것은 모버려라Keep only what sparks joy’는 메시지정리의 신이라는 별칭이 붙은 정리정돈 컨설팅 사업가이자 미니멀리스트.

[3] 연구에 따르면 깔끔한 방의 연구참여자 중 82 %는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하기로 선택하고, 지저분한 방의 참여자 47 %만이 돈을 기부했다. 각자 방을 나서면서 깔끔한 방 참가자의 67 %가 간식으로 초콜릿 대신 사과를 선택했고, 지저분한 방의 20 %만이 사과를 가져갔다. 또한 탁구공의 새로운 용도를 마음껏 상상해보도록 하자 (대표적인 확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 과제), 지저분한 방에서 더욱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산되었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깔끔한 방의 참여자들은 전통적인 방식의 건강 메뉴를 선택했고 지저분한 방의 참여자들은 건강 메뉴 중 신메뉴를 과감히 선택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임상심리학회 홍보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대한뇌기능매핑학회 대의원 및 학술위원. 정신병리 및 심리치료의 효과를 임상과학 및 뇌신경학적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연구를 지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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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팔 2020-08-25 12:00:57
매번 교수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내용도 좋고 센스있는 유머가 단연 최고. 회의 부분은 읽다가 우리 회사 생각나서 프사할 뻔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