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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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말
  • 2020.08.24 15:00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믿는다는 말을 한다. 믿는다는 말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그 말로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가 다를 것이다.

"엄마는 아들 믿어.”

“당신을 정말 믿었는데…”

“자기 나 믿지?”

이처럼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믿는다고 하거나 믿으라고 말한다. 믿는다는 말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나? 사전적인 뜻은 ‘어떤 것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뭔가를 기대하고 그 기대가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 이때 ‘믿는다’고 말하는 주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문장의 주격 보어인 사람이나 어떤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언행이나 모습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 자체를 믿는다고 말하려면, 그것은 절대자나 종교적 이념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 즉, 우리는 친구, 자녀, 선생님을 그저 ‘믿는다’고 표현하지만, 그가 절대적인 신 정도나 되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기대하고 그 기대가 맞을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혹여 절대적인 존재로 믿는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대상의 특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의 의지나 다짐에서 비롯되어서 그의 태도나 언행을 결정해야 한다. 부처를 믿는 사람이 때마다 절에 가서 예불을 하고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애쓰는 것처럼.

내가 믿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언젠가 나의 내담자가 상담실에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낮게 읊조렸다. “그 사람을 정말 믿었거든요. 그래서 너무 큰 상처를 받았어요.” 깊은 슬픔이 역력한 그에게 물었다. “우리가 믿는다는 말을 할 때에는 목적어가 있어요. 그리고 그 목적어가 신이 아닌 다음에는 주로 명사가 아니라 서술어, 즉 동사나 형용사가 되어야 해요. 다시 말하면 상대방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이상, 우리는 보통은 그 사람이 어떻게 하거나 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걸 믿는다고 표현해요. OO님이 그 사람에 대해 믿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 사람이 어떻게 하기를 기대했나요?” 나의 내담자는 나를 향해 있지만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한 눈으로 한참 생각에 잠겼다.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차례다. 그가 믿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사람이 어떻게 하기를 기대했는지, 그 기대를 했던 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건지, 언제부터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 그리고 그 사람을 그저 믿고 싶었던 절실한 마음에 대하여.

Frida Kahlo (1907-1954), ' Diego on my mind (Self-portrait as Tehuana)', 1943,  76 x 61 cm, oil on canvas, Jacques and Natasha Gelman Collection, Mexico City, Mexico.
Frida Kahlo (1907-1954), ' Diego on my mind (Self-portrait as Tehuana)', 1943, 76 x 61 cm, oil on canvas, Jacques and Natasha Gelman Collection, Mexico City, Mexico.

믿는 마음도 실망하는 마음도 나의 것이라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다. 어느 날 도낏자루를 들어서 휘둘렀는데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서 발등으로 떨어졌다면, 나는 세상에 과연 믿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탄해야 할까? 그 도끼가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을 왜 미처 하지 못했을까? 최근에 새로 산 명품 도끼라 굳이 상태를 확인할 필요를 못 느꼈거나, 전에 썼을 때 튼튼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아니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이라 아버지를 대하듯 애틋하게 의지하는 마음이 있었거나, 일상이 바쁘다 보니 도끼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번 한 번은 괜찮겠거니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발등을 찍은 도끼에게 말한다. 내가 너를 믿었는데 정말 실망했다고. 또는 도끼를 휘두르기 전에 말한다. 내가 너를 믿으니 실망시키지 말라고.

그러나 쉽사리 실망하거나 슬퍼하기 전에 내 마음을 살펴볼 일이다. 나는 무엇을 왜 믿었으며, 그 기대가 어긋난 것이 왜 이토록 실망스럽고 아픈지를. 

그리고, 믿는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

“엄마는 너를 믿어”라는 말에 담긴 은근한 강요와 자칫 맹목적일 수 있는 기대를 조심하고 싶어서 아이를 키우며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고자 신경을 써왔다. 어느덧 딸이 초등학교 갈 나이가 되어, 입학을 앞둔 어느 주말이었다. 오랜만에 아이는 할아버지와 백화점 나들이를 했다.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가방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는 헤어지면서 “할아버지는 우리 OO 믿는다. 우리 OO가 학교 가서 잘할 거라고 믿어.”라고 하셨다. 언짢아졌다. 왜 아이한테 저렇게 부담을 주시지? 집에 돌아와 이런 저런 정리를 하고 나서 잠자리에 들려던 무렵, 딸이 느닷없이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울먹거렸다. “할아버지 보고 싶어. 할아버지는 나를 믿는다고 했어. 내가 잘할 거라고 믿는다고 했어. 나는 할아버지 좋아.” 아, 정말 당황했다. 뭐지, 이 상황은?

딸은 입학을 앞두고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기는 워낙 새로운 것, 낯선 것에 쉽게 다가가지 않는 기질이 있는 아이다. 젖먹이일 때 요람을 새로 사서 눕히니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던 아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바닷가에 놀러 가 모래사장에 내려놓으면 놓인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한참을 주변을 관찰하며 돌아다니지 않던 아이였으니, 생전 처음 겪을 학교생활이 상상도 안 되어 겁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아이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혼자 다짐하며 우리 딸 믿는다고 등 한번 토닥여 주지 않았던 거다.

고등학교 3학년, 대입을 앞둔 어느 날의 아버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빠, 나 어느 대학 가면 좋겠어?”하고 물었더니, 지방만 아니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여학생이라 타지역에 가서 집 떨어져 지내면 위험하니 그것만 피하라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순리대로 살라고 하며 앞서 무엇을 계획하여 제시하거나 기대하는 법이 없었다. 진학이나 결혼, 취업 등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역시 어떤 의견도 보태지 않아서, 나이가 들수록 덜해졌지만 어린 날엔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로움과 불안, 서러움들이 뒤엉켜 겉으로는 센 척을 하느라 냉소하기를 익혔던 것 같다.

누군가의 믿음이 되는 일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의 맹목적인 믿음, 희망이 되고 싶다. 불안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갖는 기대에 기대어 힘을 얻는다. 우리 엄마가, 애인이, 언니가, 선생님이 나를 믿는다고 했던 걸 떠올리며, 그 기대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힘을 내는 것. 나도 믿을 수 없는 내 자신을 믿어주는 그 마음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것. 때로는 특별한 기대로 부담 주지 않을 테니 편히 있으라는 쿨한 시크함을 대하기보다 “나는 너를 믿어”라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

서로 믿고 싶은 것과 믿어지고 싶은 것이 같다면 참 다행이다. 그 행운을 누리려면 나무꾼이 살뜰하게 도끼를 살피듯 서로를 살펴서 믿고 싶은 것, 믿음을 주고 싶은 마음을 알아차려야겠다. 그리하여 내가 너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하는지, 내게 어떻게 해주기를 기대하는지, 그래서 종국에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는지, 그 믿음을 비로소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여 원한에 사로잡혀 나무꾼의 발등을 찍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그런 살뜰한 믿음을 받고도 부러 발등을 찍을 도끼는 아마도 지구상에 한 자루도 없을 것이다. mind

박혜연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 Ph.D.
대학병원 공공의료사업단에서 공직자 및 일반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관리와 정신건강 문제 예방 및 치료를 위해 일하고 있는 임상심리전문가이다. 경기도 소방심리지원단 부단장, 보건복지부 전문 카운셀러를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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