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새삼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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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새삼스럽게
  • 2020.08.29 08:00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그럼 '겨우 이런 일'을 자주해 보십시오. 엄청 좋은 일을 경험해도 오래가지 않고, 겨우 이런 것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제 평생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희한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다른 사람의 맨얼굴을 보게 되면 흠칫 놀랍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 옆에 누가 앉게 되면 괜히 신경쓰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긴급재난문자가 옵니다. 이제는 짜증조차 나지 않습니다. 비도 진짜 오지게 내렸습니다. 7월 이후부터 광복절까지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름에 입기 위해 산 밝은 색 마 바지는 비에 버릴까봐 좀처럼 옷장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발목이 드러나도록 예쁘게 신을 가죽 로퍼도 비 때문에 신발장을 나서지 못합니다. 아침에 하늘을 보면 우울합니다. 옷 입고 밖을 나가는 것이 당연하듯이 마스크와 우산을 챙겨 나갑니다. 진짜 이런 경험은 평생 처음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도 못 가는데, 비가 많이 와서 국내 여행도 힘듭니다. 비가 좀 그치고 해가 좀 난다 싶었는데, 코로나가 또 다시 기승입니다. 정말 언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비싼 스테이크가 맛있는 또다른 이유

당연하게 누렸던 많은 것들이 제한되기 시작하니 새삼 '이전의 삶이 행복했구나'를 느낍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마스크를 챙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출근할 때 내 옆에 누가 앉든지 크게 신경 안 쓰는 것이, 학생들 얼굴을 직접 마주보고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밝은 태양 아래 빛나는 바닷가를 보는 것이,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훌쩍 낯선 나라로 떠나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며 ‘아 오늘 날씨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생각해 보니 참 행복했습니다. 문제는 이전에는 이런 일들이 그렇게 행복했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잘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는 이런 것에 쉽게 무던해지도록 진화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뇌는 연비가 나쁩니다. 체중의 2% 정도밖에 되지 않는 녀석이 전체 산소는 20~25%를 소비합니다. 그래서 뇌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죠.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 ‘익숙해짐’입니다. 습관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요.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는 엄청 신경을 쓰고 타야 하지만, 익숙해지면 다른 생각들을 잔뜩 하면서도 더 잘 탈 수 있는 이유는 습관을 통해 뇌가 에너지를 아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익숙해짐이 모든 것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행복에도 적용됩니다. 익숙해지면, 더 이상 행복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큰 맘 먹고 먹은 비싼 스테이크가 맛있는 이유는 가끔 먹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기분좋은 것이 곧 행복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심리학에서 행복은 일종의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도달해야 하는 이상향이나 궁극적인 목표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은 기쁨, 즐거움, 만족감 등의 긍정적인 정서를 자주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은 “긍정적인 정서를 자주, 강하게 느끼십니까?”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즉 엄청 큰 사건(대학 입학, 취업, 자녀 출산, 로또 당첨 등)으로 만족을 얻는 것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자잘한 기분 좋은 사건들을 자주 경험하는 것도 행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행복한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긍정적인 기분을 자주 경험하는 사람이 실제로 자신을 행복하다고 기술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들 경험하셨겠지만, 잔잔한 것들은 경험하더라고 장기적인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잔잔하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 말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익숙해 진 것에서는 행복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린 여기에서 한 가지 마법을 부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삼스러움’입니다. 

무척이나 어려운 삶 속에서도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부단히 그렸던 이가 이중섭이다. 이중섭 (1916~1956), '길 떠나는 가족', 1954년, 종이에 유채, 29.5 x 64.5cm ⓒ국립현대미술관
무척이나 어려운 삶 속에서도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부단히 그렸던 이가 이중섭이다. 이중섭 (1916~1956), '길 떠나는 가족', 1954년, 종이에 유채, 29.5 x 64.5cm ⓒ국립현대미술관

행복은 새삼스럽게

‘새삼스럽다’는 말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느껴지는 감정이 갑자기 새로운 데가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익숙했던 일이나 사건에서 새로운 감정이 드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새삼스럽게 일상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새삼스럽게 일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로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하는 ‘알아차림’도 필요합니다. 결국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느껴지는 긍정적인 정서를 알아차리고, 새삼스럽게 행복감을 뇌에 새겨 넣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아이가 “아빠~”하면서 달려듭니다. 저도 모르게 입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는 새삼스럽게 ’나는 행복하구나’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육아로 힘듭니다. 아내와 같이 유모차를 끌고 산책이라도 나가자고 합니다. 집 주변의 천변을 산책합니다. 이사 온 지 일년이 다 돼 가지만 아직 집 근처도 못 가본 곳이 많습니다. ‘여기 이런 게 있었네’, ‘저긴 저런 게 있었네’ 하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눕니다.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 같이 가 앉습니다. 아이는 웬일인지 조용히 앉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간식을 먹습니다. 한 입 먹어 본 커피는 크림도 부드럽고 아주 맛이 좋습니다. 새삼스럽게 ‘행복하구나’하고 나에게 말해 줍니다. 오랜만에 욕조에 물을 받아 놓습니다. 적당히 따뜻해진 물에 몸을 담급니다. 그리고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밀어만 놓았던 책을 집어 들고 읽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곧 졸립니다. 책을 덮고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합니다. 그냥 이 나른하고 여유 있는 시간이 새삼 좋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게 말합니다. 행복하구나. 

이와 같이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는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내게 ‘행복하다’고 입력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은 잔잔하고 차분하게 올라갑니다. 그리고 뇌는 자주 내가 ‘행복하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지난 시간들이 진짜 행복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뇌에게는 내가 나한테 자주 얘기해 줬던 것으로 지난 사건을 ‘퉁’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만약 지난 사건들이 불행했다고 느꼈다면, 이는 그 기간이 좋지 않았음을 스스로에게 자주 얘기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울하신 분들과 상담을 해 보면 지난 일주일이 계속 우울했다고 얘기들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이를 기록해 보라고 하면 나름 긍정적인 기분을 느낀 적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 때는 그 생각이 나지 않는 이유는 ‘나는 우울해. 재밌는 게 하나도 없어’라고 나한테 자주 얘기했기 때문에, 뇌가 이번 주는 그런 주라고 ‘퉁’쳤기 때문입니다(이를 과일반화된 기억overgeneralized memory라고 부릅니다).

부정적인 사건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사건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것은 부정적인 사건에 비해 생존에 크게 유리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는 않고, ‘새삼스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뇌가 나의 경험을 퉁치려할 때, ‘지금 나쁘지 않아!!’라고 얘기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왜 행복해 보일까요?

아이들을 키우시거나, 어린 아이들을 자주 보시는 분들은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생각보다 자주 웃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이들은 별 것도 아닌 일에도 까르르 거리며 웃는 일이 많습니다. 그저 똥이나 방구 얘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웃습니다. 어리면 어릴수록 별일 아닌 일에도 웃는 일이 늘어납니다. 아빠 얼굴만 봐도, 엄마 얼굴만 봐도 싱긋 웃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이들이 이와 같이 긍정적인 정서 경험을 자주 하는 이유는 많은 일들이 ‘새삼스럽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도 당연하게 느끼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아이들을 볼 때면 ‘이렇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구나’를 알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주 웃는 이유는 바로 그 순간에 즐거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운 경험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평가절하 하지 않고 오롯이 느낍니다. 아이들에게 오늘 어땠는지를 물어보면 ‘좋았어’, ‘재밌었어’라고 쉽게 툭 얘기하는 것도 실제 그 날은 자주 웃고 친구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행복이라는 것은 바로 그 순간에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로또에 당첨되면 이런 이런 것들을 해야지'와 같이 좋은 일을 기대할 때나, 이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 갔던 일과 같은 좋은 추억을 떠올리면서도 물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지금 여기’에서 경험해야 느껴지는 것입니다. 즉 행복은 언제나 현재, 지금, 바로 여기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좀 더 자주 웃는 이유는 어리면 어릴수록 아이들은 자기의 마음을 과거에 두지도, 미래에 두지도 않고 바로 지금 여기에만 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점점 덜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도 내가 마음을 과거나 미래에 지나치게 오래 남겨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 이러한 것들을 이루면 행복해질거야’가 아닌, ‘지금 이러 이러해서 행복해’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린 '겨우 이런 일'로 행복합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광고 문구가 있습니다. 박보검씨가 나오는 음료 광고로 마지막 멘트가 이렇습니다. “오늘도 우린 겨우 이런 일로 행복합니다.” 행복에 대해서 너무 정확히 얘기해 주고 있는 문구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겨우 이런 일’을 자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순간 느껴지는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새삼스럽게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행복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오늘 하루도 문득문득 행복하면 됩니다(방송인 김제동씨가 아침 라디오를 하던 시절, 마지막 인사말이었습니다).

문득 문득 행복하기 위해, 본인의 행복 레퍼토리를 하나씩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나는 이런 것 할 때 기분이 좋아지더라’, ‘나는 이런 걸 하고 나면 뿌듯해지더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목록이 늘어날수록, 이런 경험이 누적될수록, 그리고 이런 것을 새삼스럽게 뇌에 새길수록 우리는 행복할 것입니다. mind

안정광 충북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 D.
충북대 심리학과 조교수로 한국심리학회 공인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공인 인지행동치료 전문가이다. 고려대 심리학과에서 임상 및 상담심리학 전공으로 석사, 박사를 취득하였고 서울대병원에서 임상심리전문가 수련을 받았다. 서울대병원 암병원에서 암환자 및 보호자를 대상으로 심리 상담을 하였으며, 고려대 사회불안장애 상담센터, KU 마음건강연구소에서 인지행동치료를 해 왔다. 인지행동치료 효과 비교 연구, 심상을 활용한 치료 기법 연구 및 치료 기제 연구 등을 진행하고 있다. 역서로 ‘정서도식치료매뉴얼: 심리치료에서의 정서조절(2019)’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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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0-09-08 04:40:56
이 글을 읽게 되어 새삼 행복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