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금요일 저녁, 대학원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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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금요일 저녁, 대학원생들.
  • 2020.08.28 20:30
지금 이시각 대학원생들은..!

이맘때면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메일들을 받게 된다. 여러 이유로 내 연구실로의 진학 상담은 따로 하지는 않아 보통 반려하게 되지만, 한동안 진학 상담을 할 때에는 늘 하던 의식이 있었다.

일단 웬만하면 오지 않을 것을 권유합니다..

학위를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이 경우라면 대학원을 가는 것이 맞다. 그러나 굳이, 꼭, 본인이, 그 일을 해야만 하는지도 다시 묻는다. 
임상심리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해 결국 임상심리 전공 교수가 되어 임상심리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수많은 학생들을 만났었는데, 많은 경우 이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임상심리는 누가 들어도 재미있다. 지나가다가 들어도 재미있고, 무료로 들어도 재미있고, 돈 내고 들어도 재미있는 것이 임상심리학이다. 재미 만으로 올 곳은 아니다.
이건 원래 재미있는 학문이고, 본인에게만 유독 의미를 반짝이며 다가오는 운명같은 학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큰일이다. 어느새 당신은 대학원 입학처에 원서를 들고 서 있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해서 영혼의 손으로 상대의 어깨를 붙들고 영혼의 목소리로 소리친다.

정신차려! 무슨 소리야! 대학원이라니!

그러나 상대는 타격감이 1도 없는 얼굴을 하고 계속 해서 이야기 한다. 정말 하고 싶고, 많이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본인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무슨 소리야... 왜 그런 평온한 얼굴로 본인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올해 초 일련의 소동 끝에 알게된 사실이 있었는데, 대체로 나의 이런 말들이 '으름장' 내지는 '떠보는 말'로 들렸다고 한다. 

왜 내가 당신을 떠 본다고 생각하는 거야.. 둘이 서로 무슨 밀당을 할 게 있어야 내가 떠보기를 하지, 왜 당신을 떠보겠어..

두달 여 인턴 후 입학이 결정되었으나 등록일 직전 연구실을 홀연히 떠난 한 친구도 딱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엔 교수님이 정말 시험해 보려고 연구실이 힘들다고 거짓말 하신 것인줄 알았어요' 라고.

아니, 그렇지 않다. 대학원은 누가 힘들게 하지 않아도 원래 힘든 곳이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변수들이 일주일에도, 하루에도 서너차례 일들이 터지는데, 이걸 수습하고 나면 저게 터지고, 저걸 수습하면 아까 그거나 또 다른 게 터진다. 네덜란드 뚝방을 주먹으로 막았다는 소년의 경우엔 그나마 뚝방 구멍이 두 개였을텐데, 이거는 무슨 수습할 일들이 프랙탈로 가지를 친다.
이런 문제들은 교수가 알아도 문제고 몰라도 문제인 것들이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이 중대한 문제를 눈치 챈 내 눈을 찌르고 싶고 덮어두고 싶지만 이미 입은 이 문제들을 누구에게든 술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주변에서는 (동료든, 선배든, 애인이든) 괜찮을 거야, 하며 다독일 거고, 이때 위안은 1도 되지 않는다. 어차피 나의 참담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학위 과정동안, 영구 은폐할 생각도 없지만 지금 당장은 알려져선 안 될 비밀들이 자꾸 생겨나는데 (교수님이 눈치를 채면 어쩌지!) 이것이 해결되기 위해선 결국 교수에게 토로해야만 한다 (눈치 채 줘! 눈치를 채 줘!).

결국 눈물 묻은 타자기로 저간의 상황을 편지에 담아 교수님에게 알리면, 교수님들은 본인 성격과 상대와의 그간의 역사에 따라서 극단적 스펙트럼의 반응을 보인다.

어? 괜찮아, 수습하면 돼   혹은
뭐? 이제와서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나 그 어느쪽의 반응이든 대학원생은 이미 자신의 대학원생활과 앞으로의 커리어와 교수가 나를 보는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하여간 수많은 것들이 염려되기 시작한다. 교수가 아무리 화를 안 낸다고 해도 이미 본인이 본인을 다그치기 시작한다.
(지금만큼은 농담이 아닌데,) 치료를 요할 정도의 우울과 불안으로 번지는 일은 예삿일이다.

원격으로 사용하는 분석용 컴퓨터 메모장에, 랩 대학원생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흔적들이 보인다.. (이 컴을 사용하는) 혜리야, 규명아, 혜민아, 행복하자아 아프지 말고호 아프지 말고호..
원격으로 사용하는 분석용 컴퓨터 메모장에, 랩 대학원생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흔적들이 보인다.. (이 컴을 사용하는) 혜리야, 규명아, 혜민아, 행복하자아 아프지 말고호 아프지 말고호..

동료와 한두 학기 차이로 들어오거나 심지어 같은 동기끼리도, 서로 발전의 속도에 차이가 있다는 느낌이 (주관적으로) 들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다른 지옥굴을 판다. 공부 꽤나 했기에 선택했던 진로였겠으나 연구실에 와 보면, 학회에 가 보면, 끊임없이 연구만 생각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요새 이 분들은 뭘 하고 있나 보면 coursera에서 뭘 듣고 있고, 심리학 하는 친구가 갑자기 선형대수를 공부하느라 스터디 팀을 짜고, 코로나로 랩이 닫혀 있는 동안 집에서 MATLAB을 가지고 뚝딱뚝딱 영상 분석 결과를 짠,하고 만들어내거나, 연구실 방학 동안 계속해서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 일정에 그게 필요해서) 내게 계속 이메일을 보내고 어떻게든 논문을 완성하는 이들이 모여있다.

연구활동에 너무 몰입해도 자꾸 이상한 선택을 하게 만든다. 연구라는 건 하면 할 수록 재미있는 점이 있어서 '논문 하나만 쓰고 나갈게요' 하던 나의 석사 학생 셋은 지금 연구를 세 개 씩 잡고 있다 (꽤 성과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학내에서는 좋은 평판이 자자 하다. 본인들은 이제 본인들을 연구확대범이라고 부른다. 어느 순간 연구를 또 늘리고, 또 늘리고, 새로운 IRB를 쓰고 또 쓰고 있다...). 이제 3학기에 올라가는 둘은 석박통합을 신청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방학이고, COVID-19으로 인해 랩을 셧다운한 지금 시점에, 금요일 저녁 8시 30분에" 지금 원격으로 데이터 분석을 하고 있다... (내 방에 데이터 분석용 컴퓨터가 하나 있는데, 보고 싶지 않아도 화면이 휙휙 전환되면서 뭘 하는지 보인다).

그러니까, 이 글은 지금 그 화면을 쳐다보면서 쓰기 시작한 글이다.
불과 한시간 전, 대학원의 해악을 알리는 글을 마인드지에 써 볼까 해요, 했더니 나의 학생분이 '그러면 오히려 거기에 자극 받는 분들이 나는 잘 할 수 있어! 이러면서 더 도전할지도 몰라요'라고 해서 대학원 글은 안 쓰려고 했는데, 저 모니터를 보고 있으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쓸 수 밖에 없다.

사실 대학원의 해악을 알리는 글은 이미 밈으로 넘쳐나서 그에 더 보태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지금도 분석을 돌리고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익히느라 모든 사적인 시간을 내려놓은 대학원생 분들, 그에 걸맞는 댓가가 분명이 있기를, 그것만 기원하고 싶어 글을 쓴다. 
다시 돌아가기도 싫을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겠으나 이 치열한 순간이 복리로 누적되어, 어느 순간 누구도 당신에게서 빼앗지 못할 원천기술이 되어 줄 것이니까.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큰 학문적 영감이 되어 줄 것이니까.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mind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임상심리학회 홍보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대한뇌기능매핑학회 대의원 및 학술위원. 정신병리 및 심리치료의 효과를 임상과학 및 뇌신경학적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연구를 지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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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먼곳에 2020-08-28 23:26:52
저는 정신을 차려보니 박사개강을... 교수님 늘 학회에서 연예인 뵙는 심정으로 뵈었는데 올해는 불투명하여 못가겠죠 ........유튜브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 교수님 글도요~~ 교수님도 연구실 선생님들도 화이팅입니다 !!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한얼 2020-08-28 22:13:56
저도 정신차려보니 석박통합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허교수님 학생들은 좋겠네요 대학원생을 생각해주는 교수님과 연구를 하게 되어서!
교수님도, 대학원생분들도 화이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