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 두려워 사랑을 피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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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이 두려워 사랑을 피할 수는 없다
  • 2020.09.21 11:12
만남의 예정된 헤어짐을 동반하며, 대부분 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산다. 우리는 이 예정된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까?

내가 너와 헤어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 귀여운 고양이의 이름은 만복이다. 만복이는 20198월에 나와 같이 살게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만 네 살(추정이었다. 만복이가 고양이의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다 보내고 네 살이 되어서야 나와 함께 살게 된 사연은 조금 기구한데, 만복이가 네 살이 되도록 잘 돌보아 준 전 집사님의 사정을 자세히 말할 수는 없으니, 아무튼 어쩔 수 없이 있어 다소 급하게 나와 살게 되었다는 부분만 밝히겠다.

고양이를 입양할 계획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나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어른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될 줄은 몰랐다. 동거 초반에 우리는 서로 여간 힘들어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고양이와 관련된 여러 불안한 생각 중에서도 가장 나를 괴롭혔던 생각은 사실, 이 고양이가 얼마나 살 수 있을까였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들으면 고양이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은 노묘를 입양한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수명에 신경을 쓰느냐고 말한다. 물론 타당한 지적이다. 이 멋진 고양이가 집고양이의 평균 수명만큼 채운다고 하면, 우리는 앞으로 약 십 년 정도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

하지만 함께 십 년을 보내든 이십 년을 보내든 간에, 아주 높은 확률로 나는 고양이를 먼저 보내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이렇게 많이 사랑하게 된 고양이를 앞으로 몇 년이 흐른들 보내줄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이 고양이를 상실하게 될 경험을 견딜 수 있을까? 바로 그 점이 나는 걱정이었다.  조금 부끄러운 일이지만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에 나는 고양이를 입양한 뒤 한두 달 동안은 매일같이 내 고양이가 죽는 상상을 하며 울었고, 고양이 카페의 추모 게시판을 읽으며 휴지 한 곽을 다 비우도록 눈물 콧물을 다 쏟았다이런 행동을 관둔 것은 고양이를 잃을 것이 무서워 울 시간에 고양이와 1분이라도 더 놀아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도 상실이 덜 무서워지는 것은 아니기에, 누군가가 아픈 고양이나 사망한 고양이 이야기를 하면 아직도 나는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린다.

상실의 두려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증상(?)이 한편으로는 병적이라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이미 고양이를 잃었거나 아픈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친한 친구에게만 이 증상을 은밀히 털어놓았다. 그런데 웬걸, 나보다 조금 일찍 고양이를 입양한 그 친구도 역시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먼저 고양이를 보내 본 경험이 있었던 그 친구는 심지어 고양이의 건강과 복지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최대한 알아내기 위해 눈물을 참아가며 고양이 추모 게시판을 정독 중이었다.

George Clausen, 'Youth Mourning', 1916,  oil on canvas,  914* 914 mm, War Imperial  Museum, London.
George Clausen, 'Youth Mourning', 1916, oil on canvas, 914* 914 mm, War Imperial Museum, London.

그때서야 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나만의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해져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SNS와 콘텐츠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잃은 뒤의 상실감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으며, 댓글에는 반려동물을 먼저 보내는 경험을 한 뒤 다시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못한다는 사연들이 가득했다. 생각해 보니 나의 외삼촌 역시도 꼭 그런 분이었는데, 말수 적고 내성적인 자동차 정비공인 나의 외삼촌은 나나 동생이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귀담아듣는 사려 깊은 분이지만 반려동물 이야기만은 웬만하면 듣지 않으려 하고 사진조차 보지 않으려고 했다. 알고 보니 외삼촌은 자신이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반려동물을 기르다가 더 이상 그 아이를 기르지 못하게 됐던 경험이 있었는데, 너무도 그 친구를 사랑했던 나머지 다른 사람의 강아지 고양이를 보는 것조차 힘들게 된 것이다.

애도상담

예정된 상실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감을 잡게 된 것은 애도상담에 대해 공부하면서였다. 직장에서 동료 상담선생님들과 애도Grief상담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실제 애도상담의 사례(물론 내담자도 공개에 동의한 사례)를 비디오로 보며 각 상담에 대한 상담자와 내담자의 코멘터리를 듣는 것이었다. 공개된 사례의 내담자는 아들을 상실한 여성이었고, 아들은 소아암 판정을 받은 뒤 힘든 수술을 여러 번 겪다가 사망하였는데, 아들을 먼저 보낸 뒤 내담자는 죄책감에 자신을 즐겁게 하거나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가 없었고(소중한 사람을 잃은 뒤 많은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이다또 다른 자녀를 잘 돌보지도 못한 채 자신의 삶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철수해 있는 상태였다. 교육용 자료에는 그녀의 아들이 건강하고 행복했을 때의 사진, 아들이 어머니를 향해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영상 등이 함께 담겨 있었다. 직장 동료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별짓을 다 해 보았지만, 솔직히 그 영상을 보고서는 울지 않을 도리가 없어 눈가와 코가 새빨개진 채 앉아 있는 날이 여러 번이었다.

그 열 몇 번이 넘는 회기 중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게 만들면서도, 상실 이후의 삶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지에 대해 가장 큰 힌트를 준 것은 기억 재구성과 관련된 회기였다. 그 회기에서, 내담자는 아들이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던 비슷한 또래 아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준 것을 기억하게 된다. 반쪽골반절제술이라는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그 아이에게, 내담자의 자녀는, 자신도 같은 수술을 받았으며, 자신은 잘 회복되고 있고, 또 노력하면 나중에 걸을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상처까지 보여줘 가며 차분히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비록 내담자의 자녀는 경과가 좋지 않아 사망하게 되었지만, 내담자의 자녀를 보며 용기를 얻은 그 가족은 수술을 받기로 결정하였고 그 뒤 회복경과를 밟았다고 한다. 수술을 받는 것이 자녀에게 너무 큰 고통을 안겨준 것이 아닌지 고민하며 끈질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던 내담자는 잊고 있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용감했으며, 또 얼마나 살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삶을 사랑했는지를 느끼게된다. 그리고 수술을 받기로 한 선택은 너무도 사랑했던 삶을 연장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도.

이어지는 회기에서 내담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자녀와 상상 속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이 순 본인과 본인만의, 거의 혼잣말이나 마찬가지인 대화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내 의견은 다르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사랑하는 대상의 상을 가지고 있다. 생애 초기 양육자와의 관계가 하나의 심상으로 아이에게 내재화되어, 양육자에 대한 인식이 아이의 일부가 되듯, 다른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도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일부가 된다. 내담자는 혼잣말을 한 것이 아니라, 내담자 안에서 그의 일부가 된 그의 아들과 대화를 나눈 것이다. 대상이 살아있지는 않다고 해도, 관계는 이런 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사랑하는 대상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라이온 킹에서 라피키는 아버지를 잃은 심바에게 그는 당신 안에 있다(He lives in you)'라는 노래를 다시금 불러주며 그를 일깨웠던 것이다.

헤어져도 우리의 연결은 끊기지 않는다. 

반려동물의 죽음에 대한 많은 은유적 표현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표현이다. 다리는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말이 내게는 지금은 갈라지게 되었으나 우리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며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상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인식, 사랑했던 것이 우리 안에 조금쯤 남겨져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상실 이후에 이어지는 삶에서 가장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러한 내적 연결이 남게 된다 해도 살아 있는 대상과 직접 만나는 것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이며, 또 어떠한 상실은 전혀 대체될 수 없는 영역으로 남기도 한다. 존 던John Donne이 말했듯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키기 마련인데(존 던은 인류를 생각하며 이 말을 했지만, 사랑하는 모든 대상으로 범위를 조금 확장시킨다 해도 이 시인은 이해해줄 것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은 어떠랴. 우리는 상실 앞에서 어느 정도는 축소되고 깎여 나가고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사실 상실로부터의 완전한 회복이란 없으며, 상실 후에 일상을 잘 살아나간다 해도 그리움과 공허감에 엉엉 울게 되는 일을 완전히 막을 방도는 없다. 환갑이 넘고 고희가 넘은 사람이라 해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우리는 살아가며 흔히 보게 되지 않던가. 그런데 상실 후에 대상과의 연결감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사실 그 구멍을 다 메워 버리고 완전히 멀쩡해지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 같고 영원히 손상된 것만 같은 상태라 해도 우리가 사랑했던 것이 대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기 위함이다. , 만약 그에 대한 내 안의 상image이 죽음으로만 대표되고 있다면, 내가 그에게-그가 나에게 주었던 의미와 사랑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기 위함이다.

애도도 사랑의 한 형태

만복이는 올해 다섯 살이 되었고 이 년 정도 있으면 노령묘 소리를 듣게 된다. 아마도 이 귀여운 고양이는 나보다 먼저 노년을 맞고 노환이나 죽음도 먼저 맞게 될 것이다. 지금 나는 이렇게 상실 이후의 경험에 대해 무언가 깨달음이라도 얻고 그 의미를 알고 있는 것처럼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상실에 대해 무슨 뾰족한 수를 갖고 있지는 않고, 또 그런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다면 애도는 사랑의 한 형태Grief is a form of love; Shear, 2016라는 사실, 그리고 상실이 두려워 사랑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나는 사랑 때문에 괴로워질 것이겠지만, 바로 그 사랑 덕분에 어떠한 형태의 관계가 내 안에서 남아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높은 확률로 고양이를 먼저 보내게 될 것이 두렵지만, 힘껏 이 고양이를 사랑하도록 마음먹는다. mind

    <참고문헌>

  • Shear, M. K. (2016). Grief is a form of love. In R. A. Neimeyer (Ed.), Series in death, dying, and bereavement. Techniques of grief therapy: Assessment and intervention (p. 14–18). Routledge/Taylor & Francis Group.
임민경 범죄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 임상심리전문가
독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하였고, 현재는 임상심리전문가로서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언제나 누군가의 애독자이자 무언가의 애호가이며, 트위터 그만두어야 한다고 매일 말하지만 그만두지 못하는 트위터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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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0-10-20 02:04:31
너무 공감가는 글이에요ㅠㅠㅠㅠ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