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아다니지 말기, 그냥 누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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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다니지 말기, 그냥 누려보기
  • 2020.10.09 10:10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닌 삶이 목적 자체인 인생을 응원하며

오늘 이 와인은 참으로 좋은 것 같소. 알콜 맛도 별로 나지 않고 부드러운데 순도는 높은 느낌이오. 이거 비싼 건가요? -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모든 대화는 경어체로 표현했음을 밝힌다.

오랜만에 아내의 좋은 평가를 듣게 되었다. 회심작으로 준비한 부르고뉴산 샤블리 와인에 대해서 아내가 후한 평점을 내린 것이다. 최근 내가 샀던 와인들은 아내에게 연속으로 혹평을 받았다. 알콜 냄새가 너무 나고, 이상한 잡스런 맛이 난다는 평가들이었는데 오늘은 간만에 와인을 사온 보람이 있다. 아내의 감별 능력은 날로 높아지고 있는데 제한된 예산에서 좋은 와인을 사야하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다. 그래도오늘은 기분이 으쓱하다. 이런 게 행복일까?

루이자도 브랜드의 샤블리와인.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만날 수 있는 부르고뉴산 샤도네이로 이만한 것이 없는 듯 하다. 생굴과 최고의 조합이라고 '신의 물방울'에서 소개한 바도 있다.

루이자도 브랜드의 샤블리와인.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만날 수 있는 부르고뉴산 샤도네이로 이만한 것이 없는 듯 하다. 생굴과 최고의 조합이라고 '신의 물방울'에서 소개한 바도 있다.
루이자도 브랜드의 샤블리와인.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만날 수 있는 부르고뉴산 샤도네이로 이만한 것이 없는 듯 하다. 생굴과 최고의 조합이라고 '신의 물방울'에서 소개한 바도 있다.

언택트 시대를 즐기는 방법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전문가 수준은 아니지만 와인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는 주로 외부 손님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와인을 즐기곤 했었다. 해외출장의 기회라도 생기면 합리적인 가격에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현지의 와인을 체험할 생각에 가슴이 설레곤 했었다. 아내가 청량감 있는 라거 맥주만을 편애하다 보니 와인에 대해서는 평가가 영 야박했기 때문에 특별한기념일이 아니고는 아내와 와인을 즐긴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해외여행은 커녕 레스토랑에서의 외식조차 금지되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와인을 마실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나는 새로운 대안 모색이 필요했다. 그 대안은 집에서 아내와 와인을 즐기는 것. 아내가 좋아하건 말건 일단 식사자리에서 와인병을 개봉하기 시작했다. 와인병은 성인 1인이 혼자 즐기기엔 꽤나 부담스런 양 인지라 남편의 알콜 중독을 우려한 착한 배우자는 자연스럽게 와인 즐기기에 동참하게되었다.

깨달음의 시간

대부분의 와인 초보자들이 그렇듯이 아내도 와인은 그저 달콤한 술로 알고 있었다. 설탕시럽같은 저가 와인을 주면 맛있다고 감탄하다가도 내가 아끼는 와인들을 마시면 어떻게 이렇게 맛이 없는걸 돈주고 마시냐며 눈쌀을 찌푸리곤 했다. 뭐 이해한다. 나도 처음 겉멋에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고 장장 10년 가까운 시간을 와인 맛을 모르고 살았다. 바디감이 무슨 말인지, 와인의 깊은 향기와 탄닌감을 즐긴다는게 무슨소린지 이해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아내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은 잘 이해를 못하겠지만 자꾸 체험하고 공부하다가 보면 언젠간 그 가치를 알게 될거라고. 그런데 이런 선배의 친절한 가르침에 대한 아내의 질문은 너무나 당돌했다.

아니 무슨 술을 공부하며 마신단 말이예? 전문가라 불리는 자들의 설명을 들어야만 맛있게 느껴지는 와인이라면 그건 맛없는 와인 이나 다름 없습니다. 진짜 좋은 술은 마시는 사람 누구나 끼게 마련입니다. 내가 듣기에 당신의 방식은 와인의 가치를 알아가는게 아니라 그냥 허장성세를 부리고자 하는데 지나지 않아요. 나는 깨닫지 못하는 맛을 전문가란 사람들의 말만 믿고 거금을 들여 체험하는게 가당키나 합니까?

충격적인 지적이다. 아내의 말에는 틀림이 없다. 내가 그 물건의 좋음을 알지 못하는데 그것을 얻기 위해 큰 돈을 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나는 책과 블로그를 통해 와인을 배우는 것을 중단했다. 내가 맛있는 와인의 정보를 알기 위해 검색을 하는 거야 문제될 것이 없지만, 누군가의 평을 듣고 와인을 선택하는 것은 나만의 와인세계를 만들어 가는데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었다. 내 인생이 흔히 그래왔듯이 닥치는대로 체험하고 실패를 당당히 맛보는 와인여행을 새롭게 시작했다. 물론 재정적 한계가 분명한 내 형편상 무작위 체험의 출발은 저가 와인부터 오름차순이 적절했다. 이미 10여년의 와인 초보 시절을 거치며 절대 먹어선 안될 와인의 라벨 느낌 정도는 알고 있는지라 최악의 참사들은 피해갈 수 있었다.

2019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방문했을때 들린 쉐프Joseph의 레스토랑에서 만난 화이트 와인. 그땐 이 방문이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인간은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2019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방문했을때 들린 쉐프 Joseph의 레스토랑에서 만난 화이트 와인. 그땐 이 방문이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인간은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2019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방문했을때 들린 쉐프 Joseph의 레스토랑에서 만난 화이트 와인. 그땐 이 방문이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인간은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발견, 그 속의 행복

이 탐색의 처음 목표는 밑바닥부터 와인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로마네 콩티샤토 라피트 로칠드같은 전설적 와인을 손에 넣었을 때 세상 모든 와인과의 진정한 차이를 체험하는 정복자의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체험할 중저가 와인은 너무나도 많고, 예산은 언제나 부족했다. 도전에 한계를 느낄 때쯤 나는 전혀 새로운 곳에서 와인을 즐기는 재미를 찾게 되었다.

나와 함께 이 험난한 와인 탐험을 하면서 맛없다’, ‘맛있다의 심플한 2점 척도 평가만 해주던 아내의 와인 판단 능력이 일취월장하기 시작한것이다. 귀신같이 저가 와인을 구별하면서 너무나 잡스런 알콜향이 난다’, ‘충분한 숙성이 되지 않은 것 같다같은 날카로운 평을 한다. 전혀 가격을 알려주지 않지만 저가와 중고가의 와인을 정확하게 구별해 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제는 제법 인정받는 레드 와인들도 정확히구분해낼 정도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내가 와인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그녀의 최우선 선택은 시원한 라거 맥주다.

이제는 와인을 고를 때 아내가 어떤 평을 할지가 가장 흥미진진한 기준이 되었다. 곳곳에서 새로운 와인을 구입하면서, 때로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비장의 와인을 집에 들고 가면서, 근본없는 와인 평론가 여사님의 평가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이런 삶의 도전이 주는재미가 상상 이상이다. 내가 좋아하는 와인의 가치를 아내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 함께 기뻐할 대상이 하나 늘었다는 것은 인생이 주는고마운 선물이다.

Johannes Vermeer  (1632–1675), The Wine Glass, 1658~1660, oil on canvas, 67.7 *  79.6 cm, Gemäldegalerie .
Johannes Vermeer (1632–1675), The Wine Glass, 1658~1660, oil on canvas, 67.7 * 79.6 cm, Gemäldegalerie .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 행복은 누리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할수록 인간은 더 불행해진다는 역설이 심리학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Mauss, Tamir, Anderson, & Savino, 2011. 행복하려는목표가 행복하기위한 성취의 기준을 상승시켜 결국은 실망과 불행이 가중된다는 것으로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심 만큼이나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도 어리석은 것임을 지적해준다. 최고의 와인을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한 순간부터 내가 경험하고 있는 가성비 좋은 와인들은 모두무언가 크게 부족한와인이 되는 것이다. 가격을 올려봐도 내 갈증은 더욱 커져만 갔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 도전을 중단한 것은 너무나도 잘한 일이다.

사실 내가 와인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저 함께 모인 사람들과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취할 용도로 고르게 되는 술들과 달리 와인은 술을 사는 사람도 대접받는 사람도 서로를 생각하며 신중하게 선택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함께한 모임에서 음식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와인을 만났을 때 서로 기쁨을 나누는 장면들, 힘든 연구과제의 중간결과물을 들고 국제 학회 발표를 마친뒤 낯선 나라의 광장에서 연구실 식구들과 그간의 고생담을 나누며 와인을 즐기는 장면들. 이게 내가 와인을 사랑하는 이유이고 행복이었다. 행복은 찾아다니는게 아니라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통해 누리는 것이다.

이 마음 언제나 변함없이

아내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내가 내게 선물한 또 다른 인생의 기쁨인 시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내 첫번째 취미가 시계 공부와 수집이지만 결혼의 시점으로만 돌아가도 나에게 시계는 출근할 때 습관적으로 차고 다니는 휴대품 이상의 의미가 전혀 없었다. 심리학 박사의 가난한 삶에서 명품 시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교직이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자리를 잡은 뒤에도 시계는내 관심 순위 밖이었다. 남자는 여윳돈이 있다면 좋은 차를 사야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러다 예물 시계를 고르라는 여자친구의 명이 떨어졌다. 솔직히 아는 브랜드라고는 롤렉스와 오메가 정도밖에 없고 그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상식 정도만을 가지고 있었다. 떠오르는 이미지도 조폭들이 단체로 차고 다니는 금시계였던 지라 그 두 브랜드는 애초에 후보에서탈락시켰다. 아내가 권한 것은 브랜드 가치가 롤렉스 이상이라 평가되는-물론 브랜드 자체의 평가인 경향이 있지만- IWC 였다. 하지만 그 가치가 무엇인지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 상태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애호가들의 계급도에 따라 거금을 쓰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았다. 내 막눈에너무나 좋아 보이던 론진 시계의 두배는 돈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당시 후보 중 가장 마음에 들던 론진의 마스터콜렉션 문페이즈를 선택하게 되었다. 왕초보의 눈에는 이보다 나은 시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름 시계의 준전문가가 된 지금 시점에선 가슴을 쓸어 내리게 되는 선택이었다. 예물을 교환하는 가장 큰 의미는 두 사람의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굳이 물건으로 그 약속을 상징할 필요가 있겠냐 만은 굳이 그 의미를 살려야 한다면 시대의 유행을 타지 않고 잘고장나지도 않으며 변함없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검증된 브랜드의 모델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롤렉스나 오메가의 전통있는 모델을 예물로 고르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호사스러워서 라기 보다는 내구성이 좋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론진은 롤렉스나 오메가에 절대 뒤지지 않는 전통과 크게 변하지 않는 디자인 철학을 유지하고 있는 브랜드이다. 아직 시계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던 나에게 가장 만족을 주던 론진 마스터 콜랙션은 시계 탐구를 시작하기에 가장 적절한 출발점이었다. 나는 이것을 출발점으로 세상의 눈이 아닌 내가 만족하는 시계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와인을 향한 탐험이 계속 되듯 합리적 시계를 찾기 위한 내 여행도 계속될 것이다.

론진의 매출을 책임지고 있는 대표작 중 하나인 '해리티지 마스터 컬랙션 문페이즈'. 크로노그래프에 캘린더와 문페이즈 기능을 모두 집어넣은 대표적 컴플리케이션 모델이다. 물론 다시 구입할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복잡한 기능을 가진 시계를 사는 일은 없을테지만 볼수록 가치가 느껴지는 명작이다.
론진의 매출을 책임지고 있는 대표작 중 하나인 '해리티지 마스터 컬랙션 문페이즈'. 크로노그래프에 캘린더와 문페이즈 기능을 모두 집어넣은 대표적 컴플리케이션 모델이다. 물론 다시 구입할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복잡한 기능을 가진 시계를 사는 일은 없을테지만 볼수록 가치가 느껴지는 명작이다.

오늘도 집에서 아내와 함께 할 와인을 고르기 위해 매장을 기웃거린다. 평생 세계 탑급의 와인을 체험할 일은 없을테지만 함께 와인을 즐기는 이 순간이 나에겐 최고의 순간이다.

   <참고문헌> 

  • Mauss, I. B., Tamir, M., Anderson, C. L., & Savino, N. S. (2011). Can seeking happiness make people unhappy? Paradoxical effects of valuing happiness. Emotion, 11(4), 807.
최승원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덕성여대 심리학과 부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학은 반드시 생물-심리-사회적 접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기에 언젠가는 심리학이란 이름보다 더 발전적인 개명이 필요하다고 믿는 심리학자. 상담센터와 정신과병원을 거쳐 대학에 와있는 이분야 진로탐험의 교과서적인 인물이나 진로상담보다는 괴팍한 연구자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람. 기분장애와 B군 성격장애가 주요연구관심분야이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떤 곳에서든 최선을 다할 멀티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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