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조절을 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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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조절을 해야 할 때
  • 2020.10.11 01:08
성인임에도 타인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관계에 몰입하는 분들이 많다. 끈적거리는 감정들과 분명히 잘못된 환상들이 나를 순식간에 잡아챈다. 사회 초년생이 되어서도, 심지어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서도 사람들은 ‘겉도는 느낌’에 쉽게 취약해진다.

곁에서 보기에 아, 님아 그 선은 넘지 말지, 싶은 경우가 있다. 처음부터 아슬아슬하더라만. 은근한 자기애와 친밀감에 대한 갈망이 버무려져 오늘 A가 기어코 B에게 말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B의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졌고 이내 앉아있던 자세를 고쳐 물리적 거리를 다시 조정하는 모습이 참 전형적이다 싶었다. 퍼스널 버블Personal bubble*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정말 절묘하다고 생각했는데, B의 버블이 지금 건드려진 것이다. A의 표정에도 당혹감이 가득했다.

거리 조절 하세요’.

내담자나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조언 몇 가지를 꼽았을 때 단연 거리 조절에 대한 잔소리는 빠지지 않는다. 거리 조절을 하시라 주문하면 (이것이 심리학적으로 정식 용어가 아님에도) 영리한 분들은 무슨 뜻인지 눈치챈다. 애착의 대상이 대단히 잘못 설정되어 있다는 의미. 친밀감에 대한 자신의 과도한 욕망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고 있다는 의미. 아차 싶은 마음에 (‘, 이게 아닌가..?’) 대인관계에 대한 부적절한 기대를 회수할 채비를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흔한 일이다. 성인임에도 타인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관계에 몰입하는 분들이 많다. 다른 사람과 정서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늘 접촉contact되어 있기를 바란다. 혹은 그 사람 안에 들어가길 바란다. 건강한 경계선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사실 접촉이라기보다는 중첩overlap 혹은 합입introjection이라는 단어가 더욱 알맞다.

텅 빈 공간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삶을 객관화시키고 있다. 	Vincent van Gogh  (1853–1890), 'Bedroom in Arles', 1888,  72.4 * 91.3 cm,  Van Gogh Museum.
텅 빈 공간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삶을 객관화시키고 있다. Vincent van Gogh (1853–1890), 'Bedroom in Arles', 1888, 72.4 * 91.3 cm, Van Gogh Museum.

본래 우리의 마음에는 여러 목적을 가진 여러 개의 방이 있어야 한다. 나의 매우 사적인 침실부터 원가족이 머무는 응접실 혹은 다이닝룸, 가까운 손님들이 드나드는 게스트룸, 필요에 따른 짧은 대화가 오가는 현관문 어귀.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마음의 공간을 내어준다. 누군가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도, 마음에서 나가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자기방어의 높낮이도, 예의를 갖추는 수준도 달라진다. 때로는 타인의 방문을 단호히 거절하고 나의 공간을 가만히 지키고 있어야 하는 때도 있다.

홀로 모호함과 지루함, 불안정감을 감내하는 시간이다.

이 벽을 너무 높이 세우는 것도 물론 문제겠지만, 내가 거리 조절을 자꾸 주문하게 되는 이들은 마음에 구획이 없는 이들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려 지나친 시도를 하느라 자녀와의 관계에서, 오랜 친구나 애인과의 관계에서, 흠모하는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서, 심지어 아직은 서먹한 직장동료와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옹벽을 모두 철거해버린다. 상대가 원하거나 요구한 적도 없는데 그 사람에게 자기 마음의 집문서를 상대의 손에 기꺼이 쥐어주려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맥락은 다양하다. 나의 취약점을 간파한 누군가가 실제로 나를 쥐고 흔들려 시도했을 수 있다. 모종의 이유로 나의 역동이 잘못 작동하여 저 사람에게 만큼은 꼭 사랑받고 싶다거나 누군가의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등의 잘못된 신념을 갖는 경우도 흔하다.

많은 경우, 아이들은 단짝 친구에 대한 소망을 시작으로 친밀한 관계에 대한 판타지를 갖는다.

나 역시 그랬다. 넌출월귤잼이나 소금에 절인 라임 등 이름도 휘황찬란한 음식들이 등장하는 그 시대의 소녀문학을 읽으며 모든 모험을 함께 하는 우정 깊은 친구를 만드는 것이 굉장한 과업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모든 비밀을 공유하고 서로의 비밀을 목숨처럼 지켜주는 관계의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일단 서울 변두리 도시에서의 삶이란 게 목숨을 걸고 지킬 정도의 비밀도 없거니와, 뭐가 비밀이어야 하고 뭐가 해도 되는 이야기인지에 대한 변별력도 얄팍하여 아이들은 쉽게 서로에게 상처 주었다. 시덥잖은 비밀들은 금세 시들어 버렸다. 평생을 같이 할, 마음을 나누는 친구를 만드는 일은 내게는 몹시 어려웠다.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줄 모르는 많은 어린 내담자들은 새 학년이 시작되면 단짝이 생기지 않아 학교 가는 것을 공포스러워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어떤 집단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이미 다른 친구들은 다 무리를 지었거나, 친하게 지내는 듯 보인다. 쉬는 시간이나 수련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은 커지고, 시시각각 짙어지는 열패감은 갖가지 나쁜 생각들로 응축된다. 나 자신에 대해서, 환경에 대해서, 친구들에 대해서.

끈적거리는 감정들과 분명히 잘못된 환상들이 나를 순식간에 잡아챈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고, 네 마음이 내 마음인, 그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면, 실은 나는 아무런 매력도 가치도 없는 것은 아닐까. 많은 십대는 사춘기 내내 이런 고민을 하며 종내는 내가 이 세계에서 사라져도 누구도 상관없겠지 하는 생각에 빠진다. 사회 초년생이 되어서도, 심지어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서도 사람들은 겉도는 느낌에 쉽게 취약해진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의 마음 너무 많은 공간을 상대가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과 병리적 결합을 시도하는 징후는 다음과 같다.

  • 나보다 더 인정받는 것처럼 보이는 동료나 형제들을 비난하고 있거나 상대의 애정과 관심을 끌기 위해 충동적 대처를 하거나 나의 문제에 만족스러울 만큼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부아가 치미는 것이 징후이다.
  • 상대가 독립적으로 내린 의사결정에 과잉반응하고, 상대가 자기 문제를 알아서 척척 처리하는 모습을 볼 때 기분이 쉽게 상하는 것 역시 징후이다.
  • 상대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하고 실제보다 과도하게 친근함을 (다소 무례한 방식으로) 표하려는 것, 그리고 상대가 마음이 상해하는 말을 부지불식간에 내뱉는 것 역시 징후이다.

그 즉시 거리 조절을 시작해야 한다.

>>Warning: 나의 진지를 다시 구축할 것<<

거리 조절의 왕도가 있는지 궁금하겠지만 실은 거리 조절이라는 의제를 인식한 시점부터 사람들은 이미 많은 행동 변화를 보인다. 한번도 거리 조절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람들과 분명 많은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으로는, 순간순간 자신의 미숙한 의존욕구와 잘못된 애착의 형태에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던 도중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 혹은 새로 맞이한 가족에게, ‘그렇게까지사랑받으려는 자기 모습을, 마치 전지적 관점에서 바라보듯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메타-인지meta-cognition이다.

내 마음의 성인 감독자가 두 발로 대지 위에 단단히 서서 아이처럼 구는 욕망을 편안히 응시하기 시작하면 타인에게 과도하게 기대하고 요구하려는 아이의 마음은 그 진폭을 줄인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대인관계에서 괴상한 시도를 하기 전에 가능한 빨리 본인의 마음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를 조정해야 하는 타이밍 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잔인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그게 세상 유명한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사라져도 세상은 어떻게든 또 잘 돌아간다는 것을 목격하면서, 역설적으로 조금은 홀가분해지기도 한다. 내 마음을 24시간, 365일 내내 정확히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바라볼 때에도, 우리는 조금씩 가벼워진다.

모든 사람은 그렇게 자신의 고독감을 견디며 걸어가고 있었구나, 하며.

특히 성숙의 단계 마다, 많은 사람들은 한번쯤 자문하게 된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려고 했을까, 그 사람에게 왜 영향을 미치고 싶어했을까, 왜 다른 사람과 그렇게까지 모든 것을 함께 하려 했을까. 그 노력은 정말 내 인생에 중요했을까.

다른 사람들과 긴밀하게 지내지 않아도 꽤 자신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 그런 때가 있다. 타인의 인정 없이도 그 일 자체에 몰입해버리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도 내가 누군가에게 완벽한 사랑을 받거나 완벽한 인정을 받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 나의 고유한 가치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애정이나 인정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혹은 그 욕망의 대상과 조금씩 거리 조절을 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 안의 여러 방들은 이제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벽의 두께와 출입구의 크기를 달리 하며, 타인의 마음도 그러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리고 상대와의 최적의 거리를 계속해서 가늠한다. 나와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위태롭던 관계들은 자연스레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갔다.

무엇보다, 내 생의 시간을 쪼개어 보니, 사람이 전부인 순간들이 분명 존재했으나 한편으로는 나 혼자 감당해야 했던 일들 역시 나름의 빛나는 의미를 가지고 내 생 안에 직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여름 홑이불처럼 서걱거리다 몸에 어느 순간 경쾌하게 엉겼다 또 스르륵 풀리는, 그 정도의 쾌적한 거리면 족하다. 내가 오늘밤 그렇듯이 A 역시 긴 밤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거리 조절하는 방법을 천천히 알아가겠지만 오늘은 많이 아프겠지mind[1] 심상imagery 속에 존재하는 내 주위를 둘러싼 커다란 비누거품. 타인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거리를 표상하며 대략 4피트(1.2미터)의 반지름을 갖는 것으로 묘사됨.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임상심리학회 홍보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대한뇌기능매핑학회 대의원 및 학술위원. 정신병리 및 심리치료의 효과를 임상과학 및 뇌신경학적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연구를 지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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