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와 마감일이 결국 당신을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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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와 마감일이 결국 당신을 구원하리라.
  • 2020.10.23 18:09
마감이 정해진 일이 꽤나 괴롭게 느껴지는 것은 완벽주의 성향 때문이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것 역시 그 완벽주의와, 마감일.

학술대회 발표 자료 마감일. 마감일마다 혹시나 하며 마감일 연장 공지를 기다리는 건 학생이나 교수나 작가나 다 똑같다종일의 일정을 정리해두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오늘까지 못 냈다...

(의외로) 나서지 않으려는 기질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강박적인 발표 준비 습벽 때문에 학회 연자로 나서는 일은 늘 고통스럽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주제가 정해지면 그와 관련하여 출간된 최근 10-15년 사이의 논문들을 가능한 모두 확인한다. google scholar에 접속하여 키워드를 여러 방식으로 조합해 넣기를 반복, 다시 최근 5, 최근 2, 최근 1년으로 제한하며 재차 확인을 한다.
한두 개 연구를 두고 부가적인 설명을 길게 하기보다는 가능한! 많은! 연구논문들을 빠짐없이 전달해야 한다그러니 여기까지 드는 시간이 일단 수십 시간이다.

이를 엮어 발표 자료를 만들기까지의 작업에도 상당한 시간이 투입된다. 표지 그림은 언제나 중요하다. 시행착오 끝에 글자체에는 정착했지만 그림은 매번 주제에 따라 달라야 한다. 그림의 크기그림의 배치….

처음에는 단순히, 누군가의 생을 낭비하지 않으려던 선의였. 정해진 시간 동안, 가능한 모든 학술적 재료들을 장내에 쏟아주리라, 특히 최신의 연구는 모조리 알게 하고 가리라, 뭐 그런 식이었다.
물론 
재료들을 취사선택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청중 개인의 관심사와 처리 속도의 함수function에 따를 일이다. 다만 적어도 이 강의를 들은 청중이라면 임상 혹은 연구 장면에서 이미 기각된 모델에 머물러 잘못된 이야기를 하지는 않길 바라는 마음에, 수전노가 동전 모으듯 그렇게도 논문들을 모아댔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게 나의 저장 강박이었던 것도 같다. 그러니까 나는 아주 이타적인 강연자라기보다는 이타적인 문헌 저장 강박자 literature hoarder….
'저기요, 일단 이것도 좀 들어 둬 보시고요, 저것도 좀 기억해 둬 보시고요, 아니 글쎄 나중에 다 쓸 데가 있다니깐요.'

완벽주의적 특성을 고치려고도 해 봤다. 아니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개인 실적에도 들어가지 않는 그저 학술 강연일 뿐인데, 목표를 너무 높게 잡는다. 물리적인 시간 압박은 그 어떤 요인보다 심한 불안과 공포를 이끌어낸다. 일들이 밀릴 때의 압박감은 불안에 이미 부유floating하고 있는 사람들을 수면 밑으로 그야말로 내리누른다. 발표 준비 시간은 늘 예상보다 길어진다. 한 두 배..?

다행인 점은 그나마 나의 업이 심리학자여서 어느 순간부터 나의 발표 준비 프로토콜에 대한 기능function 분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보통 선행 사건과, 행동과, 그 기능 혹은 결과(보상적/처벌적)를 분석해보면 되는데,

- 선행 사건: 발표를 부탁드립니다라는 갑작스러운 연락...
- 행동: 강박적으로 가능한 모든 논문을 탐독하는 것.

여기까진 비교적 간단하다.
그러나 기능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Q1.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 이렇게까지 한다고 누가 알아주나?
A2. 하.. 저요..

Q2. 이렇게 하는 게 나한테 도움은 되나?
A2. 네..

Q3. 이렇게 하는 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은 되나?
A3. ..아유..

자문자답을 할수록 어쩐지 나의 습벽의 긍정적 기능이 입증된다.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완벽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는 동안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보상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정도라면 (나는 아주 괴로워 죽겠지만) 장기적으로든 공익적으로든 나쁘지 않은 습관이다. 실제로 많은 내담자분들이 완벽주의적 특성을 버리고 싶다고 말씀하시지만 상담이 진행되다 보면, ‘그런데 그걸로 덕을 본 것도 사실이지요’의  현자 타임이 온다.

사실 완벽주의는 오해를 사기 쉬운 개념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완벽주의의 세부유형을 딱히 구분하지 않고 분석에 사용하면서 모든 완벽주의적 특성은 우울, 무망감, 후회, 정서 및 인지 문제, 신경성 식욕부진증(거식증)으로 이어진다는 비관적인 예측을 내어놓기도 했다. 심지어 치료자가 완벽주의적이면 심리치료 효과성이 떨어지고 내담자의 치료 순응도도 떨어지는 연구 결과도 등장했다. [1, 2]

그러나 최근 십여 년 사이, 긍정적 완벽주의positive perfectionism와 부정적 완벽주의자negative perfectionism를 구분하는 연구자들은 성장 지향적인 완벽주의자의 미덕을 비로소 말하기 시작했다.[3]
이들은 삶의 만족도가 높았다. 정서적 고통에도 강하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37개 연구, 8,901명의 데이터를 메타분석한 결과로도 완벽주의적 노력perfectionistic strivings과 높은 학업적 성취 간 관계가 나타났다![4]

그러니까 언제나 생각의 틀schema이 중요한데, 본인이 어떤 주제에 대해 완벽히 알아두고 싶다거나, 가능한 높은 수준의 성취를 지향한다면 그 자체로는 나쁜 일이 아니다. 괜찮다. 다만 이런 목표를 압도적overwhelming’ 과제로 보고 실패를 예견한다면, 이게 그 예의 부정적 완벽주의자로 가는 패스트트랙이다.

도전적인 challenging’ 이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에서 참 매력적이었다. 나는 <나를 압도하는 과제>라는 프레임을 <내게 도전적인 과제>로 바꾸는 말장난으로 나의 뇌를 속이기 시작했다... 
연구 
논문 중 까다로운 질환의 치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곧잘 사용되는 이 단어는 (용례: 이 질환에 대한 심리치료는 매우 도전적인 과제로써….), 그야말로 뭔가 도전 욕구를 충동질한다.
해 볼 만할 것 같다. 실패한다고 해도 나는 꽤나 도전적인일을 추구했다. 그 도전의 역사는 나의 기록에 남는다. 나는 한결같이 도전적이었다!
이 명제에 성공과 실패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도전적이었던 내 생의 과정은 그 자체로 꽤나 괜찮아 보인다.

무엇보다 어떤 과제를 실패하지 않기 위해 완벽히 통제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나이도 지났다. 40대가 되고 보니 (윤리성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실수와 실패는 누구에게나 흔했고 그것을 개인의 흠결로 여겨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 큰 재난이었다.

내가 지른 목표에 치이는 재미도 있었다. 불안, 공포를 느껴 새벽마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기도 하지만, 스릴이 촘촘히 스며들어 있기도 했다. 일정이나 마감일 등을 고려할 때에 그간 출간된 거의 모든 논문들을 (요약본이라도) 굳이 다 찾아 읽겠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목표는 누가 내 목을 죄어 강요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오라를 지우고 죄인의 형상으로 커피를 들이부으며 아무도 듣지 않아도 우는소리를 하며 책상 앞에 지박령처럼 앉아있는 이유는 재미 때문이다.
놀이기구의 안전장치를 믿지 못하는 심약함과 미약한 기울임에도 격렬하게 반응하는 전정기관을 겸비한 덕에 120 이상만이 탈 수 있다는 모든 놀이기구를 거부하는 나로서는, 일상에서 스릴을 느낄 곳은 역시 발표와 과제의 마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해내야 할 일들의 기준을 일부러 높게 잡는 건 (딱히 취미가 없는 내겐) 일종의 취미 같은 것이다.

더욱이, 작업은 끝도 없지만 다행히 나를 구원하는 건 언제나 마감이다. 정말이다. 마감은 우리를 잡아먹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숨 쉴 시점을 알려주는 시그널이다.
문헌 저장 강박자에게 마감이 없다면 매일 매주 해당 주제의 연구 논문들이 새로이 게재될 때마다 분루를 흘리며 또 ppt 파일에 ‘새 슬라이드’를 추가하고 있을 것이다. 영영 발표되지 않는 발표 자료란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 무슨 헤밍웨이의 슬픈 여섯 단어 엽편소설도 아니고. [5]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스스로 《무기여 잘 있거라》의 첫 부분을 적어도 50번은 고쳐 썼다고 밝힌 바 있다. 누가 마감일을 좀 정해주지..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러고보니 헤밍웨이 역시 ​​​​​《무기여 잘 있거라》 첫 부분을 50번 이상 수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누가 마감일을 좀 정해주지..

그러니 마감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일은 결국 끝이 난다. 그리고 발표일은 어김없이 다가온다. 나는 손을 떼고 물러서서, 약간의 오류와 실수를 너그러운 청중들이 눈치는 채되 눈감아 주길 바라며, 내가 정말 전달하고 싶었던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나의 시간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mind

[1] 정작 대중은 완벽주의를 꽤나 바람직한 특성으로 보는 듯도 한데, 대학생 117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 연구에서 연구 참가자들이 타인에게 긍정적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완벽주의적 특성을 과장보고하는 모습이 관찰되기도 했다. Stoeber, J., & Hotham, S. (2013). Perfectionism and social desirability: Students report increased perfectionism to create a positive impression. Personality and Individual Differences, 55(5), 626-629.

[2] Presley, V. L., Jones, C. A., & Newton, E. K. (2017). Are perfectionist therapists perfec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rapist perfectionism and client outcomes in cognitive behavioural therapy. Behavioural and Cognitive Psychotherapy, 45(3), 225-237.

[3] Bergman, A. J., Nyland, J. E., & Burns, L. R. (2007). Correlates with perfectionism and the utility of a dual process model. Personality and Individual Differences, 43(2), 389-399.

[4] Madigan, D. J. (2019). A meta-analysis of perfectionism and academic achievement. Educational Psychology Review, 31(4). 967-989.

[5]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아기 신발 판매. 미착용.)- E. Hemingway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임상심리학회 홍보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대한뇌기능매핑학회 대의원 및 학술위원. 정신병리 및 심리치료의 효과를 임상과학 및 뇌신경학적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연구를 지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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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2022-03-07 09:41:24
교수님 글은 언제 읽어도 재밌고 그 내면에는 깊은 통찰이 깃들어 있어 무릎을 탁 치게 합니다. 존경하는 허지원 교수님 이글도 잘 읽었습니다!

독자 2020-11-22 07:23:28
글이 재밌어요.술술 읽히고 끄덕여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