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을 괴롭게 만드는 생각: 대학원생 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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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을 괴롭게 만드는 생각: 대학원생 진화론
  • 2021.01.06 18:00
교내 심리학 세미나 수업에서 '대학원 생활에 대한 소회'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짧게 지나가 버린 답변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을 담아 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를 시작이자 마지막으로 사라질 뻔한 대학원생을 괴롭게 만드는 생각 시리즈를 이어보고자 합니다.

대학원 과정에 관한 소회

우리 학교에는 매주 심리학 및 관련 분야의 연사를 초청하여 연구 발표를 듣고, 간담회를 통해 연사님께 다양한 질문을 드릴 수 있는 세미나 수업이 있습니다. 학기 말 즈음 진행된 대학원생 발표 시간에 제 연구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발표를 마치고 교수님께서 대학원 과정에 관한 소회를 간단히 이야기해 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소회-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해온 소망, 미련, 애증'

대학원 생활의 막바지에 이른 저에게 대학원 생활이 어땠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자 영화 『라라랜드』La La Land의 마지막 장면처럼 지난 5년 반 동안의 희로애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마음속 깊은 창고에 넣어두었던 기억, 생각, 감정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Zoom 화면 속에 송출되고 있는 100명이 넘는 청자의 얼굴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고, 오랫동안 간직해온 미련과 애증은 더 오랜 시간 내 안에서 숙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에 때와 장소에 적절한 생각들을 찾아 소회를 청중들과 나누었습니다.

불확실성과 마주하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대학원 생활을 불확실성uncertainty과의 싸움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꼭 대학원이 아니라 정규교육 과정을 마치고 나서 성인이 마주하는 삶, 또는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나와서 마주하는 장면들은 불확실성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대학원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점, 그리고 후배들도 제가 겪은 어려움을 반복하는 점은 불확실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개 학생들은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알려주시지 않는 거죠?'를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언어로 또는 무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이라는 교육 시스템에 들어왔고, 학생(학예를 배우는 사람)의 신분으로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에 지도교수님 또는 프로젝트의 리더인 선배 등 누군가가 나에게 가르침을 줄 사람이 '자, 자네 연구를 하고 싶으면 이제 정확하게 이것, 이것, 그리고 다음엔 이것을 하면 된다네'라며 매우 구체적이고 꼼꼼한 방향성을 지시해줄 것만 같은 나름 합리적인 판타지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성과물이 배움의 시작

하지만 대학원에서 배움의 방식은 판타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한데, 어딘가 돌봄 받지 못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특별한 주문order도 피드백feedback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하는 불안감으로 이어지기도 했고요. 그러다 문득 '대 학문의 장인 대학원! 여기는 스스로 학습하는 곳이로구나, 나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연구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면 되는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꼬물꼬물 진행하게 됩니다. 작은 연구 성과물이던지, 아니면 자료수집을 위한 실험계획이라든지.

작고 소중한 성과물을 사람들 앞에 내밀었을 때 비로소 배움은 시작됩니다. 대학원에서의 배움은 피드백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대학원에서 정말 나를 아끼는 사람은 나에게 칭찬해주는 사람이기보다, 유익하고 솔직한 그리고 가감 없는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성과물 = 나의 또 다른 자아

처음으로 애착이 형성되어 버린 나의 작은 성과물의 한계점, 수정해야 할 점, 논리적 오류, 그리고 전반적으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퀄리티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나면 대개 마음에 상처를 입곤 합니다. (처음 만들었던 포스터는 지금 열어봐도 어처구니없지만, 처음 피드백 받았을 때의 마음의 쓰라림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이 나네요. 하하..)

중요한 점은 모든 피드백은 온전히 나의 성과물을 향해 있는데, 이 모든 이야기가 성과물을 만들어 낸 저에 대한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내가 못나서 포스터를 못나게 만들었고.. 논리적이지 않은 글을 쓴 나는 논리적이지 않은 맹꽁이야.' 이런 생각들이 약간의 수면 부족과 신체 건강 상태의 난조와 만나면 어둠의 동굴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지금의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의 주의력 결핍 성향을 보완하기 위해서 충분히 교정proof reading해야 했고, 소리 내서 읽어서 보면서 글이 매끄럽지 않은 점을 찾아서 수정해야 했고, 또 컨펌받기 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나 혼자만의 논리에 빠진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했던 것이지 뭐 제가 특별히 남들보다 더 못나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요.

성과물에 대한 부정적 피드백이 대학원생의 멘탈에 미치는 영향

그래도 그때는 그 작은 성과물이 소중한 내 삶의 소소한 기쁨들(주말, 숙면, 인간관계)을 내어주고 얻은 것이기에 처음 부정적인 (사실은 매우 건설적인) 피드백을 마주했을 때 대학원생의 멘탈은 더 취약한 상태에 놓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다다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주시지도 않았으면서 왜 별로라고만 하시지?"

제가 느끼기에는 이 시점에서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전공 불문하고 다른 연구실에 다니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시기에 '나는 지도 교수님과 스타일이 안 맞는 것 같다', 혹은 '연구는 내 적성이랑 안 맞는 것 같다'고 하며 진로를 바꾸기도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성향을 빠르게 파악하고, 새로운 길을 가는 것도 적응성이 높은 것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분명 어딘가에는 대학원보다 따듯하고 친절한 트레이닝이 존재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불확실성은 더욱더, 두 번째 시련

어쨌든 저 시기를 넘기고 나면, 피드백을 통한 가르침에 익숙해집니다. 수정할 것은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약간의 '쿨함'을 장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약간의 자신감도 생깁니다(실력에서 나오기보다 짬에서 나오는..). 그 무렵 어느 날 발표에서 이런 피드백을 듣게 됩니다.

"연구 결과가 너무 복잡하고,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연구 질문이 뭔지 모르겠다."

대학원에서 고군분투하며 '자율학습'에 잘 적응했다고 생각했던 대학원생에게 두 번째 시련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처음 피드백을 받았을 때와는 반응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여전히 왜곡되어있지만 다른 방식으로 비뚤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교수님은 (혹은 다른 동료들은) 왜 내 연구를 왜 이해하지 못하시지?"

만약 이 질문이 너무 오랜 시간 든다면,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내 연구를 왜 이해하지 못하시는가?'라는 질문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는지 깨닫는 것이 대학원생이 경험하는 또 한 번의 진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구 상에 있는 연구자 중에 나와 가장 비슷한 연구 주제와 배경 지식을 가진 지도교수님 마저 이해 못 하는 연구라면 대체 얼마나 불친절하고도 정리되지 않은 날 것인가를 알게 되는 순간 연구를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말 모든 사람의 피드백에 귀 기울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연구에 대한 백그라운드가 없는 사람들의 피드백은 더 소중해졌고요. 연구라는 것은 우리끼리 모여서 '와, 재밌다'하고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는 내용들을 밝히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고 종종 그때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대학원은 어떤 곳이야?

아직도 가야 할 길이 구만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학원 생활에서 깊은 가르침을 주신 지도교수님과 많은 교수님, 선후배님들께 감사를 전하며 대학원 생활에 대한 짧은 소회를 마칩니다.

이렇게나 길고 장황한 글을 읽고 누군가가 저에게 '대학원은 어떤 곳이야?'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누가 나에게 뭘 하라고 하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고, 또 아무거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닌 곳이야."

mind

김혜린 서울대 심리학과 임상심리 박사수료
서울대 심리학과 임상심리학 전공 박사과정 학생이다. 최진영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노년기 사회적 고립이 노화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고자 하는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사회적 고립상황에서 관찰되는 뇌 반응과 지각된 외로움 수준의 개인차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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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현 2021-01-12 23:11:38
동감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저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였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어딘가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신기원 2021-01-12 17:17:54
너무 공감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