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보면 압니다”에 대한 시각심리학적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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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보면 압니다”에 대한 시각심리학적 단편
  • 2021.03.10 12:00
Gibson이 제안한 행동 유도성의 개념에 의하면 우리는 환경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하여 다양한 시각 속성들을 분석, 종합하고 기억 및 환경적 맥락을 고려해 정체를 파악한 후 사용법을 구분하는 일련의 복잡한 정보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이미 우리가 맞닥뜨린 그 순간 자신들의 정체와 용도를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개구쟁이 아이들의 비범함

   얼마 전 유치원생인 둘째 녀석이 엄마에게 혼나고선 훌쩍거리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엄마 몰래 휴대 전화기로 검색한 아이돌 동영상을 들여다보고 키득대다가 혼쭐이 났단다. 어떻게든 인터넷에 범람하는 영상물로부터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도무지 쉽지가 않다. 요즘 아이들은 다양한 정보통신 기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가르치지 않아도 척보면 아는아주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는 듯 싶다.

   사실 나 또한 어려서 집안의 각종 생활용품들과 전자제품들을 생긴 모양만 보고도 조작법을 습득하는것에 어려움이 없었다. 부모님도 조심조심 어렵게 사용하시던 물건들을 요렇게 조렇게 가지고 놀다가 고장을 내서 물론 둘째 녀석처럼 혼쭐이 났던 적도 있다. 아마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과 장난기로 개구쟁이 유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은 돌이켜보면 대부분 신기할 정도로 그 당시 척보면 압니다마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직관과 행동 유도성

   좀 더 격식을있게 포장하면 척보면 압니다에 기초한 인식 능력은 사람들이 흔히 언급하는 직관intuition의 능력과 연결된다. 물론 심리학적으로 직관은 매우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에 해당하며 합리적 사고가 아닌 상황적 맥락과 개인의 주관적 경험 및 성향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기 위한 심리학 이론을 특정하기조차 어렵다. 학위 과정에서 지도 교수가 적어도 논문 작성 시에 피해야 할 단어로 직관적으로"intuitively를 예로 든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뜬금없지만 시각심리학에는 사실 이런 척보면 압니다능력과 맥락이 닿아있는 개념이 존재한다. Gibson은 그의 생태학적 광학ecological optics 이론에서 소위 행동 유도성affordance'이란 개념을 소개했다 Gibson, 1979. 그가 언급한 행동 유도성을 좀 부드럽게 정의하면 특정 사물의 시각적 형태와 모양은 그 사물의 의미적, 언어적 범주category 정보뿐만 아니라 그 사물의 조작 및 사용과 관련된 일련의 행위들actions에 대한 정보까지를 모두 일괄 제공한다는 개념이다.

   얼핏 짐작하기 어려운 이 개념은 시지각visual perception에 대한 고전적 관점과 대조를 통해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구체적으로 고전적 시지각 이론은, 주변 환경에 어떤 물체가 있을 경우 해당 물체의 정체 파악은 그것이 보유한 대표적 시각 속성들과 그 물체가 위치한 환경적 맥락을 분석적으로 가늠해 우리 기억 속의 과거 정보와 대조하는 과정을 통해 달성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해당 물체를 어떻게 조작하고 상호작용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는 이런 정체 파악 이후 나와 사물과의 일련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기억과 지식으로부터 추가된다고 가정한다.

   반면 Gibson은 이러한 분석적인 사물 지각 과정은 엄밀히 보면 불필요하며 오히려 사물의 정체 및 용도와 관련된 매우 정확한 정보들이 우리 기억이나 지식이 아닌 외부 환경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Gibson이 제안한 행동 유도성의 개념을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환경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우리가 그것들의 다양한 시각 속성들을 분석, 종합하고 기억 및 환경적 맥락을 고려해 정체를 파악한 후 사용법을 구분하는 일련의 복잡한 정보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이미 우리가 맞닥뜨린 그 순간 자신들의 정체와 용도를 즉각 제공한다.

식칼의 정체와 용도에 대한 번거로운 정보처리

   예를 들어 고전적 시각 이론은 주방 기구인 식칼을 앞에 두고 은색의 뾰족한 꼭지점과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긴 삼각형의 금속 물체가 흑색의 긴 육면체와 한쪽 면에서 맞물려 주방이라는 공간의 손에 닿을 위치에 있으니 이건 식재료를 자르는 데 사용하는 칼이고, 엄마가 사용하셨던 것을 회상해 볼 때 날카로운 금속 부위가 아닌 뭉툭한 육면체 부위를 붙잡고 식재료를 반듯한 곳에 놓아 금속 부위의 날카로운 면을 얹어 앞뒤로 움직여야 해...’라는 장황한 용도 파악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한편 Gibson의 행동 유도성 개념은 말 그대로 식칼을 보자마자 저건 음... 자르는 물건이고 그냥 이렇게... 쓱쓱 사용하면 돼...’라는 식의 즉각적 이해가 수반된다고 가정한다사실 그의 주장은 감각 경험의 실재를 부정하는 등 내가 요약한 내용보다 훨씬 더 극단적임을 밝혀둔다.

   말 그대로 저 물건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일단 딱 보면 압니다그 자체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물론 소위 정보처리 기전information processing mechanism의 설명을 목적으로 삼는 시각정보처리이론 전문가들의 눈에는 이런 Gibson의 주장이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다. Gibson의 주장은 그가 지향하는 바와는 달리 인간을 내면적 사고thinking의 핵심인 정보의 조작과 처리라는 필수 과정을 생략한 채 외부 환경의 변화에 그저 몸을 맡기는 오히려 지극히 수동적 존재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호하지만 매력적이고 필요한 능력

   한편으론 Gibson의 행동 유도성 개념은 늘 변화하는 환경에 우리가 어떻게 신속하게 대처하고 적응적으로 행동하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신중하고 분석적인 사고가 보통은 도움이 되지만 대개 현대인의 하루는 매우 분주하고 환경적으로도 변화무쌍하다. 만약 Gibson이 주장한 행동 유도성과 같은 정보가 환경에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들을 매우 정확하고 신속한 탐지하는 능력을 선천적 및 후천적으로 습득해왔다면 그것이 과연 우리의 생존에 그동안 도움 혹은 방해가 되어왔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매우 탐색적이고 도전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아마도 Gibson이 주장한 행동 유도성에 대한 탐지 훈련을 본능적으로 시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에 비해 새로운 것에 대한 학습도 빠르고 사고의 고착 없이 창의적인 행동을 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식탁 의자를 뒤집어 의자 다리를 붙잡고 앉아 로봇 조종석에 앉았다고 키득거리는 아들 녀석이 문뜩 생각난다. 어른들이 보기엔 용도가 그저 딱 정해진 물건을 뒤집어 놓고 척보면 조종석이네....’라며 금방 장난감을 만들어내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보면서 뒤늦게나마 배울만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mind

   <참고문헌>

  • Gibson, J. J. (1979). The ecological approach to visual perception. Boston: Houghton Mifflin.

 

 
현주석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인지심리 Ph.D.
인지심리학의 주제 중 시각작업기억과 주의에 관한 주제로 박사 학위를 하고, 현재 중앙대 심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인지심리학에 대한 공부를 기초로 인간의 장, 단기 기억과 사고 및 선택적 주의 현상 연구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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