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포스Sisyphus의 이야기를 아는가? 죽음의 신 하데스를 기만한 죄로 산 정상까지 무거운 바위를 밀어 올린 뒤, 바위가 산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또 다시 바위를 굴려 올리는 작업을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았다는 신화 속 이야기이다. 영겁의 작업을 수행하던 시시포스에게 어느 날 하데스가 말한다. ‘수고했어 시시포스, 지금 굴리던 바위까지만 마무리하고 이제 그만해도 좋아.’ 하데스 뒤에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던 지옥의 졸개들이 건넨 꽃다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있다. ‘은퇴를 축하합니다. 빛나는 당신의 내일을 응원합니다.’ 시시포스가 만약 은퇴를 한다면 시시포스는 행복할까? 은퇴 이후 삶을 평가하는 다양한 기준이 있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은퇴가 노년기 은퇴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건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시시포스가 어떤 나라에서 은퇴를 했느냐에 따라 은퇴 이후 삶의 양상이 많이 다를 것 같다. 개인이 월소득에 따라 스스로 노후 연금을 준비하는 한국에서 은퇴를 했다면 오랜 기간 무임금 노동을 해온 시시포스는 은퇴 이후에도 건강을 챙길 새도 없이 생존을 위한 생활 전선에 다시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은퇴 후 생활은 ‘제2의 취업준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럴 경우 ‘진정한 의미의 은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과는 달리, 보편적 복지를 실행하여 노년기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어 있는 뉴질랜드와 같은 나라에서 은퇴를 했다면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행동’이 노년기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보다 정확히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뉴질랜드 노인들을 대상으로 은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논문을 소개한다.
Szabó와 동료들은 2006년부터 2014년까지 뉴질랜드에서 수집된 종단 자료인 NZHWRNew Zealand Health, Work and Retirement Study 데이터를 활용하여, 총 1368명의 은퇴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은퇴와 건강 관계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자기보고식 평가 방법12-Item Short Form Survey, SF-12을 활용하여 건강상태를 측정하였고, 흡연 여부, 현재 앓고 있는 만성질환의 개수 등의 건강 변수를 분석 자료에 포함했다. 은퇴 시점을 포함하여 은퇴하기 8년 전부터 8년 후 까지 총 1년 동안의 건강상태 궤적을 성장혼합모형Growth Mixture Model을 통해 추정한 결과, 은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총 세 가지 집단으로 나타났다. 이때 집단은 은퇴 전 건강수준에 따라 A,B,C 집단으로 나뉘었다. A가 가장 건강하고 C로 갈수록 건강 수준이 좋지 않았다. 은퇴 전까지 건강이 악화되는 속도는 B가 가장 높았고, A집단이 가장 더디었다. 은퇴 이후, 집단 B는 건강 악화의 속도가 훨씬 느렸고, 집단 C는 더 이상 건강이 악화되지 않았다. 반면, 가장 건강 상태가 양호했던 집단 A는 전부터 꾸준히 유지해오던 높은 수준의 건강 상태가 은퇴를 기점으로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연구자는 인구통계학적 변수 등을 활용하여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 각 집단의 특징을 몇 가지 도출했다. 집단 A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비율과 정규 교육을 이수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집단 B와 C는 상대적으로 낮은 경제적 수준을 보이는 동시에 앓고 있는 만성질환의 수 또한 많았다. 연구자는 은퇴가 A집단과 B, C 집단에게 건강 상 서로 다른 영향을 끼친 현상을 ‘역할 이론’role theory을 근거로 설명한다. 직장 내 스트레스와 업무에 대한 부담이 큰, 즉 만족스럽지 않은 경제 활동으로부터의 독립role exit은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깊게 결부되어 있는 동시에 만족스러운 직장 생활을 한 집단에게 은퇴role transition는 상실감과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주관적 건강인식의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한편, 은퇴 이후 가족 구성원 또는 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강화 및 전환한 이들에게는 은퇴가 여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Wang et al, 2011.
앞서 말했듯이, 본 연구는 우리나라와 다른 사회보장제도를 갖고 있는 뉴질랜드에서 이루어진 연구라는 점에서 결과 해석의 주의를 필요로 한다. 다만, 노후의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어 있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연구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은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더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시시포스의 건강은 은퇴 후 어떻게 달라질까? 매일 하염없이 돌을 굴리는 동안 자유가 주어지는 상상을 하곤 했더라면, 은퇴 후 계획했던 일상의 즐거움을 되찾을까? 아니면, 역할 전환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이며, 은퇴 전보다 소극적 일상을 살아갈까? 시시포스가 은퇴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갈 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은퇴의 시기는 온다. 경제적 노후 대비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이번 연구의 결론을 참고하여 은퇴를 슬기롭게 준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겠다. mind
[감수: 중앙대 심리학과 김기연 교수]
<참고문헌>
- Szabó, Á., Allen, J., Stephens, C., & Alpass, F. (2019). Is retirement associated with physical health benefits? A longitudinal investigation with older New Zealanders. Age and Ageing, 48(2), 267-272.
- Wang, M., Henkens, K., & van Solinge, H. (2011). A review of theoretical and empirical advancements. The American psychologist, 66(3), 204–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