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 재주를 합니다”, “곰이 재주를 합니다”
단조로운 음률에 맞춰 손을 바닥에 짚고 살짝 엎드려 다리를 뒤로 번쩍번쩍 두 번 들어 올리며 했던 말이다. 유치원 재롱잔치였다. 여러 동물이 등장했던 것 같고, 아마도 여자아이들은 토끼나 다람쥐, 새 등을 맡았던 것 같다. 물론 왕자와 공주 역할을 하며 재롱잔치의 센터에 집중 조명을 받은 친구도 있다. 여러동물들이 배경처럼 등장했는데 그 중에서 내가 맡았던 역할은 ‘곰’이었다. 사이즈가 큰 곰은 무대 뒤 한 쪽 구석에 서서 노래인지 타령인지도 모를 ‘곰이 재주를 합니다’를 했다. 내 주변의 어른들은 나를 ‘통통이’ 또는 ‘뒤두바리’라고 부르곤 했는데 당시 나는 뒤두바리의 정확한 의미를 몰랐다. 그저 단어의 어감이 투박하고 미련하게 느껴졌고 말을 듣는 순간 그냥 큰 덩어리가 된 것만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뒤두바리의 올바른 표현은 ‘뒤듬바리’로 –바리는 사람을 일컫는 순우리말이며 ‘뒤듬’은 ‘어리석고 둔하며 거친 사람’을 지칭한다고 한다. 옥상에서 떨어져 이마가 찢어지거나 그냥 걷다가도 장애물 없이 넘어져 무릎 보호대를 하고 있는 것이 일상이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 미친 듯이 질주했다고 생각한 100m 달리기에서 체육 선생님이 따라붙으며 “야, 너 어디 소풍가냐’ 는 말을 들으며 세웠던 기록 22초의 청소년 시절, 수영을 시작했지만 결국 물에 뜨지 못해 관두고, 발을 땅에서 떼는 것이 두려워 자전거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경험이 ‘뒤두바리’라는 단어를 내 자기 개념의 일부로 안착시켰다.
나는 비참할 정도로 손재주가 없어 무엇을 그리거나 만들거나 하는 것도 젬병이다. 친구들이 지점토로 휴지 케이스 같은 것을 만들 때 틀니를 만들어 선생님을 경악시키거나 수묵 담채화 수업에는 기괴한 난을 그려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광녀가 머리를 풀어 헤쳤다가 빗으로 가르마를 탄 것 같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뜨개질 숙제를 하다 보면 어느샌가 코가 무한정 늘어났다가 줄어 들었다 하여 제대로 된 목도리 하나를 만들지 못했다. 음식을 잘 쏟고 흘리고, 물건을 치고 떨어뜨리고 깨뜨리기도 해서 ’너의 몸의 끝이 어디인지 몰라?‘ 라는 소리를 자주 듣기도 했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로로 각종 가전제품을 망가뜨리거나 파괴하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날쌔고 민첩한 편이었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미술을 업으로 삼고 있거나 관련 일들을 하고 있었기에 나의 육체적 무딤과 곰 손은 언제나 놀림거리였고 나의 열등감의 일부가 되었다. 대신 나는 보고, 듣는 것에 탐닉했다. 방바닥에 누워 라디오를 듣고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까지 TV를 봤다. 그 속에 무궁무진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빠졌고 이야기 속 사람들이 궁금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어쩌면 내 운명의 학문은 심리학 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탐닉했던 또 하나는 사람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것들이다. 자연이 만들어 낸 환상적인 경관에 감탄하기보다는 인간이 만들어 낸 건축과 조각과 그림을 볼 때 미칠 것 같은 기쁨을 느낀다. 작가가 직접 깎고 다듬고 두드린 하나밖에 없는 장신구를 사랑하고 직선으로 바르게 잘리지 않은 듯 보이는 반항적인 옷의 라인을 좋아한다. 그렇게 나는 심미적인 사람이 됐다.
사람의 이야기가 좋지만 가끔 그 이야기가 끔찍하고 혐오스러울 때,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마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지칠 때 예술은 나에게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다시 갖도록 힘을 줬고 그래서 나는 예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짝사랑 하던 예술에 내가 직접 참여할 기회가 드디어 생겼다. 다가오는 10월 1일부터~10일, 한성대 입구역 This is not a church 갤러리에서 전시를 개최한다. 익숙한 생활 속 사물이면서 심리학적 오브제이기도 한 거울을 주제로 한 전시 《심경Mind Mirror》 전에는 12명의 작가가 만든 아름 다운 거울과 거울명상 방이 준비되어 있다. 예전에 교회였지만 지금은 교회가 아닌 공간에 전시된 거울을 보며 잠깐이라도 Mindful 해지는 경험을 해 보면 어떨까?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