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A의 이야기
필자의 지인 A의 이야기이다. A는 싱글맘으로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었다. A는 남편으로부터 양육비를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열심히 직장을 다녔으며 아침에 출근하여 대개 8시, 늦으면 9시에 퇴근하였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 후 A는 초등학교 방과후 돌봄교실에 아들을 맡겼다. 아들은 아침 8시에 등교하여 거의 저녁 8시까지, 말 그대로 하루 종일 학교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초여름 어느 화창한 날, 사건이 터졌다. 그날도 A는 아침 7시에 눈을 뜨지 못하는 아들을 깨워서 겨우 옷을 입혀서 아파트 현관 밖으로 먼저 내보냈다. 그런데 A가 나와보니 아들이 복도식 아파트의 7층 난간 위에 곧 떨어질 것같이 올라서 있는 것이 아닌가.
초등학교 1학년이 보일 수 없는 충격적인 행동에 A는 아들의 생활을 면밀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들은 그동안 방과 후 교실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10여 명이 있었던 방과 후 교실은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그곳의 왕이었던 K는 왕따놀이를 즐겼는데, K가 매일 ‘오늘의 왕따’를 정하면 나머지 아이들은 하루 종일 그 아이를 왕따시키고 괴롭혀야 했다. 당연히 A의 아들도 오늘의 왕따가 되었다.
우리는 지인 A의 아들이 겪은 것과 같은 사건을 접하면, ‘악한’ 가해자에게는 분노를 표출하고 ‘선한’ 피해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에 많은 집중을 한다. 물론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도움제공은 당연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러한 사건은 언제나 ‘가해자’가 일으킨다. 이 말은 이러한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에 대한 뜨거운 분노뿐 아니라 차가운 분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립된 환경에서 악이 출현한다
오늘의 왕따 사건은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의 현실판이라고 할 정도로 스토리가 닮았다. 파리대왕의 ‘무인도’라는 고립성은 오늘의 왕따의 방과후 교실이었고, 고립성이라는 환경은 두 스토리 모두에서 문명의 법과 규범을 무력화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학교폭력이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아이들끼리 두는 것’ 즉 교사와 학교의 방임 또는 무개입이다. 실제로 많은 심리학 연구들은 악의 출현은 악한 환경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교에서 문명이 닿지 않는 ‘고립된 환경’은 바로 교사와 학교의 철저한 무개입 상황으로, 이러한 토양은 학교폭력이 발생할 확률을 상당히 높여준다. 자, 그럼 고립된 환경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변하는가?
권력이 주는 두 가지, 자유와 책임
법과 규범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당연히 물리적 힘이 권력의 원천이 되며, 그 영향력은 극대화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권력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사람들은 권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권력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권력은 사람에게 두 개의 상반된 자아감을 부여한다. 하나는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이다.
자유는 독립적 자아감independent self-construal으로 자신의 내적 욕구와 생각을 외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표출하도록 한다. 권력감이 높은 사람들은 대개 멋있어 보이고 대중적 인기가 많은 이유가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언행 덕분이다. 책임감은 상호의존적 자아감interdependent self-construal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미디어에는 권력자들의 나쁜 모습들만 주로 보도되기 때문에 대중은 잘 느끼지 못하나 권력은 책임감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요인 중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는 ‘권력감’ 자체에서 자극되나 책임감은 ‘대표성’을 지각할 때만 자극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오늘의 왕따 사건의 가해자 K의 심리를 추적해보자. K는 어떻게 왕이 되었나? 파리대왕의 랠프처럼 민주적 투표나 지지를 통해 왕이 되었나? 그렇지 않다. K는 그냥 ‘힘이 쎄서’ 비공식적 왕이 되었을 뿐이다. 왕이 되는 과정에서 K는 자신이 다른 학생들을 대표한다는 느낌은 전혀 가지지 않았고 그냥 강한 권력감만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K에게는 권력이 부여하는 자아감 중 ‘자유’만 강화되었으며,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책임감은 전혀 강화되지 못했다. 법과 규범이 사라진 고립된 환경에서 권력자 K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기적 욕구, 쾌락적 욕구를 자유롭게 표출하게 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시간을 되돌려 오늘의 왕따 사건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K에게 어떤 접근을 해야 할까?
권력의 책임감을 부여시킨다면
또 다른 지인 B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B는 중학생 아들이 학교폭력 피해자로 신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요지는 과거부터 지속적인 문제를 일으켰던 운동선수 Q가 수업시간에 B의 아들에게 “장난으로” 뺨과 머리 등을 때리는 것을 교사가 목격하여 학교폭력위원회(학폭위)에 신고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B는 학폭위를 요청하여 Q를 처벌하는 절차를 밟았을 것이고 교사 역시 이를 의도하고 Q를 신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Q의 미래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B는 필자의 조언을 받아 다음과 같이 대처하였다. B는 Q와 직접 통화를 하여 앞으로 선수로서 얼마나 빛나는 미래가 Q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강조하고, Q가 우리 동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훌륭한, 자랑스러운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이후 학폭위를 열지 않는 대신 앞으로 두 가지 요구사항을 지킬 것을 제시하였고, 이를 위반할 시 학폭위를 여는 것에 대해 동의를 받았다. 즉 B는 권력감이 높아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행동했던 Q에게 ‘공동체 대표성과 훌륭함에 대한 기대’를 부여하여 책임감을 촉발시키는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전의 처벌에도 계속되었던 Q의 소소한 폭력행동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생길 K와 오늘의 왕따를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이슈에서 흔히 언급되는 전통적 방식인 ‘상담’은 안타깝게도 다분히 사후적 조치이다. 그러나 많은 심리학의 연구들은 사전적 조치에 대해서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필자가 제시한 환경적 조정과 권력 관점의 개입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이제는 가해자 K에 초점을 둔 창의적인 정책과 개입을 통해 오늘의 왕따를 막아야 할 시점이다. mind
※ 본 기사는 교수신문과 공동 기획으로 진행하는 '세상의 중심에서 심리학을 외치다'의 세 번째 주제, '학교정글'에 관한 기사입니다. 해당글은 교수신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