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나 사건에 대해 여러 사람의 의견이 분분한 것은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이것은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틀이 개인이나 집단마다 달라 생기는 것으로,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여러 의견이 문제를 건설적이고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데 다양한 정보의 역할을 하지만, 어떤 때는 이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어 문제를 악화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오직 서로 다른 의견의 타당성과 현실성을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자세로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을 때, 다양한 의견은 더 차원 높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개방적인 논의를 방해하는 사람들
이러한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논의를 방해하거나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극단적인 태도, 즉 극단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다. 극우와 극좌처럼 국가의 존재 가치와 기능에 대해 서로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극단적 환경보호주의자나 그 반대로 극단적 개발주의자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종교적으로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 근본주의자들이나 종말론자들이 그렇다. 그러면 이들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고 타당한가?
예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이 어려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려면 충족해야 할 조건은 무수히 많다. 그는 상당한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머리만 좋다고 합격하는 것도 아니고 노력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도 따라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공부하지 않은 문제가 나오면 허탕이다. 시험장에 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지 말아야 하고, 가는 도중에 병원에 가야 할 만큼 갑자기 아프지도 말아야 한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현실은 대부분 극단적이지 않다
이처럼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모든 조건을 충족할 때만, 즉 극단적인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 경우에 부합하지 않아 합격하기 어려운 평균 근처의 점수를 받는다. 한국 드라마에서처럼, 가난한 집안에서 양녀로 큰 여성이 열심히 노력해서 대기업에 취업하고, 거기서 회장 아들과 사랑을 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회장이 젊어서 잃어버린 딸이 바로 이 여성이라는 사례는 극단 그 자체다. 이처럼 극단주의는 확률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아주 낮아 매우 비현실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은 대부분 극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안전사고와 관련해서 하인리히는 자기가 접한 통계에 기초해서 1 : 29 : 300의 법칙을 내놓았다. 이 법칙은 대형 사고가 한 번 발생하기 위해서는 작은 재해가 수십 차례 발생하고, 사소한 사고가 수백 번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사소한 사고 모두가 작은 재해로 이어지지 않고, 작은 재해 모두가 대형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렇게 더 큰 사고로 이어지는 데 필요한 조건이 모두 충족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소한 사고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극단주의자는 비현실적 요소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이 그런데도 극단주의자는 자기 생각의 비현실적 요소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자기의 생각을 지지하는 여러 조건이 안정적으로 충족된다고 착각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눈에는 세상은 변하지도 않고 획일적인 존재이거나 그런 존재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의 생각이나 신념이 사실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자기와는 인간적으로 다른 존재로 대상화한다. 즉, 그들을 비인간화하고 반인간화하면서 그들에 대한 혐오나 적대감, 증오를 합리화한다.
이러한 이유로 극단주의자들은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과 논의해서 타협하거나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 극단주의자에게 이런 사람들은 오직 공격해서 패퇴시켜야 할 대상일 뿐인지, 타협과 공존의 동반자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극단주의는 독단주의 그리고 급진주의와 그 뿌리를 같이 한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는 특정 문제나 사건 관련해서 영향을 주는 다수의 요인이 있고, 그 결과 변화무쌍한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비현실적으로 무시한다.
그럼에도 극단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이처럼 극단주의가 갖는 현실에 대한 왜곡과 독선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에 상당한 매력을 느껴 선호한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극단적 주장이 갖는 높은 사회적 바람직성이다.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은 중립적이거나 양쪽의 생각을 반영하는 주장보다 다른 사람 눈에 더 자신 있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비친다. 그들의 주장은 망설임이 없고 서로 상충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극단적인 주장은 선동적이고 도발적인 경향이 강하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문제는 극단적 주장이 객관적인 잣대로 보면 결코 더 우수하지 않다는 것이다. 법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이 자가가 목격한 것을 확신에 찬 태도로 증언한다고 해서 그의 말이 더 정확하지는 않다. 물론 관련된 사람들은 이들의 말을 더 사실이라고 믿는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개별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집단으로 결정하는 것이 더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 이때 집단 의사 결정이 더 타당할 것 같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러한 결정을 주도하는데, 그들이 항상 더 지적이거나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극단주의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인지적으로 세상을 단순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머리를 써가면서 세상을 복잡하게 인식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세상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규정해서 이해하고 싶어 한다. 특정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이해와 판단이 불확실할 때, 사람들은 불안과 같은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이것을 해소하는 방법은 실제는 불확실하고 복잡한 현실을 어떤 단순한 틀로 규정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극단주의는 일반인의 이러한 선호에 가장 잘 부합한다. 사실 극단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 다양한 극단주의가 난무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분열되어 있고, 문제에 대한 공유된 인식과 건설적인 소통을 통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에 대한 통합적이고 실효적인 대답을 찾기는 참으로 어렵고 요원하다. 여기에 관련된 요인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극단주의의 문제를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단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분석이 문제 해결에 일조하기를 희망해 본다. mind
※ 본 기사는 교수신문과 공동으로 연재하는 '정태연의 한국사회 마음 읽기' 기사입니다. 해당글은 교수신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