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런 게 도대체 왜 유명하고 비싼 거지?’
갤러리의 거대한 흰 벽 한 가운데에 은색 테이프로 대충 붙인 바나나가 보인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작가의 「코미디언」이라 이름 붙여진 이 작품을 보는 많은 관람객의 머릿속에서는 인지부조화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 작품의 위대함을 열심히 설명하는 도슨트의 말과 몸짓이 과연 관객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사기인지 그 누구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현장.
심리학자인 나는 한 구석에서 작품보다는 이 광경을 너무도 재미있게 관찰하고 있고, 동시에 작가인 나는 이 이해하기 힘든 심오한 미학적 결과물을 질투와 불안에 찬 눈빛으로 보고 있다. 이내 내 머릿속에서는 한 단어가 떠오른다. ‘아우라’. 어쨌든 저 바나나는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우라는 수용자에게서 나온다
‘아우라Aura’는 발터 벤야민이 그의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예술 작품이 지닌 특별한 느낌, 작품 고유의 분위기이자 일회적이고 진품적인 현존성”으로 풀이된다.
당시 벤야민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복제 및 대량생산의 측면에 주목하여 아우라의 개념을 제시하였지만, 근대예술을 지나 현대예술의 시기로 들어서면서부터 아우라의 의미는 ‘진품이 가지는 특별한 가치’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아우라는 작품의 창작자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수용하는 대중·평론가·학자들이 부여한다. 좋은 작품은 작가가 창작을 위해 갈아 넣은 예술혼의 무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작품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심리가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예술, 감각의 시대에서 인지의 시대로
이 지점에서 예술은 온전히 심리학적 주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술에 있어 개념과 수용, 해석이 중요해질수록 예술은 감각의 시대를 지나 인지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지각과 인지는 예술작품의 창작과 감상의 과정에 개입된다. 지각심리학은 감각 기관을 통해 정보가 어떻게 수집되고 조직되는지를 연구하며 예술의 창작과 감상의 전 과정에서 새로운 차원의 해석을 제시한다. 인상파 화가의 작품이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도 작품을 통해 관객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낯설고 흥미로운 시지각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고흐의 눈을 통해 분석되고 재구성된 프랑스 시골 마을의 평범한 길거리 카페는 관람객에게 새로운 지각 경험을 제시한다. 작가의 스타일이라는 것은 결국 작가만의 고유한 감각 경험의 규칙을 만들고 표현한 결과물이며 그 독특함의 정도가 작품 아우라의 크기를 결정한다.
예술이 근대를 지나 현대로 진행하면서 창작과 감상에도 감각보다는 인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인지심리학은 기억·사고·언어 등 감각 기관을 통해 조직화된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는 단계를 설명하며, 감각으로 경험되는 현상보다 개념Concept에 아우라를 부여하는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짝퉁에서 느끼는 아우라?
현대 미술의 시작점으로 평가되는 마르셸 듀샹의 1917년 작품 「샘」은 작가가 전시장 내 화장실의 변기를 가져다가 그대로 전시한 것으로 이 변기의 지각된 형태를 아무리 심오하게 분석한들 작품 아우라의 근원에 다가갈 수 없다. 심지어 그림으로 제시된 듀샹의 샘은 1917년 듀샹의 오리지널을 1964년에 복제하여 런던 테이트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아우라는 흔히 볼 수 있는 변기라는 오브제에 R.Mutt라는 사인을 추가한 뒤 작품으로 전시한 듀샹의 인지적 사고 과정에서 나온다. 작품의 감상을 위해 관람객 또한 작품을 감각으로 보면 안 된다. 인지심리학적 관점에서 감상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왜 복제본을 통해서도 원본의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는지, 다른 누군가가 이 방법을 따라 해 세면대를 전시한다면 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 낼 수 없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런 건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되는 작품일수록 실제로 내가 그대로 따라 할 수 없다. ‘예술은 사기다’라는 백남준의 말도 현대예술은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의 문제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사기당하긴 쉽지만 내가 사기를 치기는 지극히 어렵다.
갤러리, 거대한 심리 실험의 장
다시 테이프로 벽에 붙인 바나나 작품을 떠올려 보자. 2024년 4월 리움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던 이 바나나 작품을 한 관람객이 먹어 치운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서울대 미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밝혀졌으며, 그는 ‘배가 고파서’ 바나나를 먹었다고 했다. 주요 언론들은 ‘관람객이 1억 5천만 원짜리 유명한 예술작품을 먹어 치웠다’고 기사를 뽑았고, 리움미술관 측은 새 바나나를 붙이고, 별도의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이 관람객은 과연 자신의 배고픔이라는 감각적 명령을 따라 바나나를 먹었을까? 아니면 5년 전 세계 최대 미술 전시회인 아트 바젤에서 같은 제목으로 전시된 바나나를 먹어 치웠던 누군가의 퍼포먼스를 ‘인지’한 상태에서 이런 해프닝을 벌인 것일까? 어찌 되었든 작품을 훼손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바나나 작품의 아우라는 더욱 커져간다. 심리학은 이제 현대예술의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가 되었고, 갤러리는 거대한 심리 실험의 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mind
※ 본 기사는 교수신문과 공동 기획으로 진행하는 '세상의 중심에서 심리학을 외치다'의 기사입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 심리학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과 분석을 통해 독자의 깊이 있고 입체적인 이해를 도울 것 입니다. 본 기사는 열 번째 주제로, '예술, 심리학을 만나다'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 기사는 교수신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