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자녀는 부모가 만든다?
상태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훌륭한 자녀는 부모가 만든다?
  • 2019.08.15 12:01
우리는 보통 훌륭한 자녀는 부모하기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다. 과연 그럴까? 자녀가 성장하는 데 부모가 하는 역할이 기대만큼 크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 글에서 알아보자.

“아이는 부모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느냐가 그 자녀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다. 심리학의 역사를 돌이켜봐도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은 시기는 없었다. 그중에는 매우 극단적인 생각,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왓슨John B. Watson의 주장처럼 자녀의 기질적 특성과 관계없이 외부의 개입에 의해 아이의 미래를 100%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현재에는 이렇게 과격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지만, 아직도 역시 자녀의 발달에서 부모 양육의 역할은 어디에서나 강조되곤 한다.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1891~1976. ‘세증인 앙드레 브르통·폴엘뤼아르·그리고 화가 앞에서 아기 예수를 혼내는 성모’ The Virgin Spanking the Christ Child before Three Witnesses: Andre Breton, Paul Eluard, and the Painter. 1926. 갠버스에 오일, 130 x 196 cm. Museum Ludwig, Cologne, Germany.ⒸMax Ernst
예수도 어머니의 회초리가 필요했던 것일까. 독일 출신 화가 막스 에른스트는 초현실주의자 답게 성모 마리아의 전통적 이미지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장면을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인 앙드레 브르통과 폴 엘뤼아르가 화가와 함께 구경하고 있다.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1891~1976. ‘세증인 앙드레 브르통, 폴엘뤼아르, 그리고 화가 앞에서 아기 예수를 혼내는 성모’, 1926. 갠버스에 오일, 130 x 196 cm. Museum Ludwig, Cologne, Germany. ⒸMax Ernst

바움린드의 양육유형론

이렇다 보니 부모의 역할, 소위 양육방식parental style을 측정하고 그 효과를 살펴보고자 하는 연구 역시 역사가 매우 깊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연구 중 하나가 1970년대 바움린드Diana Baumrind가 제안한 양육의 차원이다. 그녀는 부모가 아동과 상호작용할 때 보이는 특징을 애정warmth과 통제control라는 크게 두 가지 차원을 통해 보고자 하였다. 애정이란 말 그대로 자녀에게 얼마나 사랑을 주느냐의 문제이고, 통제란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얼마나 확실하게 세워놓느냐의 문제이다.

이 차원들의 높고 낮음에 따라 네 가지의 양육유형, 즉, 권위적 형태authoritative style(애정과 통제가 모두 높음), 권위주의적 형태authoritarian style(애정은 낮으나 통제가 높음), 허용적 형태permissive style(애정은 높고 통제가 낮음), 그리고 무시적 형태neglectful style(애정과 통제가 모두 낮음)를 제안하였다.

그 이후 실시된 많은 경험적 연구들은 그녀의 양육유형이 적절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식에도 부합한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즉, 대체로 권위적 형태의 양육을 하는 경우 자녀의 전반적인 적응이 좋은 편이었으며, 무시적 형태가 가장 안 좋은 적응을 보인다. 권위주의적 양육을 받은 아이들의 경우 일견 복종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자아존중감이 낮은 편이며, 허용적 형태로 양육받은 아이들은 자신감은 높을지언정 참을성이나 자기규제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결과인가!

바움린드의 양육유형론은 이후 양육연구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도 매우 유명한 개념이라 굳이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디서 한번 들어본 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한번 잠시만 생각을 해보자. 부모가 사랑을 주는 동시에 행동규율을 명확하게 했을 때 아이들의 적응이 좋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 사실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자기 자녀를 일부러 엇나가게 키우려고 노력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고 가정하면, 누구나 아이를 키우면 사랑을 주는 동시에 규율을 세우려고 할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의 양육행동을 보면 대체로 어느 정도는 충분히 사랑을 주고, 또 어느 정도는 충분히 규율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을 양육한다. 그러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사랑을 주고 규율을 세워야 그 ‘적응이 좋다는’ 아이로 키울 수 있는가?

연구자가 아닌 일반적인 대중들은 논문을 읽고 데이터를 분석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알고 있는 심리학적 지식은 대체로 개론서, 교양서적, 미디어, 입소문 등을 통해 압축요약된 정보이다 (사실 교수들도 자신의 세부전공이 아닌 이상 꼼꼼하게 논문을 들여다 보지도 않는다!). 뭐든지 압축하고 요약하다 보면 정보를 잃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요약본을 통해 얻은 지식은 실제보다 과장되거나 과소평가가 되는 경우도 많다. 많은 심리학적 정보들도 여기에 해당되는데, 양육의 효과 역시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양육유형 간 크지 않은 차이

양육유형의 효과에 관한 대단위 연구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1991년 람본Lamborn 등의 연구자는 1만명 이상의 미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바움린드의 양육유형의 효과를 검증하는 연구를 게재한 바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연구에 따르면 역시 고전적인 믿음, 즉 권위적 양육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적응이 가장 좋았다. 이 연구는 따라서 양육유형론의 적절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구로 많이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 논문을 자세히 뜯어보면 의외의 정보가 많이 숨어있다.

일단 이 연구의 참가자들이 1만명이 넘는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참가자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연구의 일반화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도 되지만, 동시에 표준오차가 줄어들기 때문에 집단간의 평균차이가 매우 작다 하더라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연구에서는 양육유형에 따른 청소년들의 비행행동을 측정한 바 있다. ‘1=거의 없다’에서 ‘4=매우 많다’로 측정한 결과 전체 평균은 1.2, 표준편차는 .27정도로 측정되었다.

양육유형에 따라서는 어떠할까? 권위적 양육군은 1.15, 권위주의적 양육군은 1.17, 허용적 양육군 1.20, 그리고 무시적 양육군의 값은 1.24였으며, 집단간의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였다. 분명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위적 양육군의 아이들은 ‘모범생’이고, 무시적 양육군의 아이들은 ‘비행청소년’일까? 이들간의 차이는 4점 만점에 평균적으로 0.1밖에 되지 않는다. 즉, 어떤 양육형태로 양육을 받던지 간에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별로 비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고등학교 평균 평점GPA 역시 같은 방식으로 측정을 하였다. 평점 A는 4점, B 3점, C 2점, D 1점, 그리고 F는 0점이었다. 평균적으로 권위적 양육군의 고등학교 GPA는 2.86, 귄위주의적 양육군 평균 2.76, 허용적 2.68, 그리고 무시적 양육군의 평균은 2.57이었으며, 역시 집단간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였다. 그렇다면 권위적 양육군의 아이들은 ‘우등생’이고, 무시적 양육군의 아이들은 ‘열등생’인가? 평량평균 2.86인 학생과 평량평균 2.57인 학생이 현실적으로 그렇게 학업수행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성적이라는 것이 잘 받아서 손해볼 일은 별로 없을 것이고, 한 문제를 가지고 당락이 결정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가볍게 보고 넘길 수만은 없다.

양육의 효과, 과도한 기대는 금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육의 효과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극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즉, 아무리 좋은 양육을 한다고 해도 자녀가 자동적으로 “최고의 인간”이 되지는 않으며, 또 아무리 나쁜 양육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 자녀가 100% “최악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일반적인 환경에서 사는 부모는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우려고 노력하며, 자녀 역시 대부분 부모님을 사랑하고 따른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의 행동은 서로 비슷하게 수렴되는 경향이 있고, 비슷한 행동들은 억지로 유형을 나눈다 해도 효과 자체가 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결과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혹시 주변에 아이를 양육하면서 고통받고 있는 부모가 있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대부분의 부모들은 양육을 하면서 수많은 좌절을 경험한다. 아이를 혼낼 때 마다 내가 사랑을 주지 않은 것인지, 이러다가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 것인지, 내가 부모로서 자격이 있는 것인지 자책하는 부모님들이 많다.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정상적인 양육을 하는데 본인이 그런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라면 혹시 양육의 효과에 대해 개인적으로 너무 과도한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보도록 하자.

아이는 ‘저절로’ 크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양육방식에 따라 쉽게 좋아졌다 나빠졌다 할 정도로 수동적인 존재도 아니다. 또 인간은 누구나 정상적인 발달을 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한두번의 양육의 실수 때문에 크게 잘못되는 경우는 의외로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완벽한 부모가 되려는 관념은 자기 자신과 아이를 갉아먹을 수 있으니 때로는 좀 내려놓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다만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비록 양육의 효과가 생각만큼 극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바움린드의 양육연구가 틀렸다거나, 양육연구 자체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계속 언급하지만 위의 정보는 일반적인 양육을 하는 정상적인 부모-자녀 관계에 해당되는 정보이다. 60억이 넘는 인간들이 지구에 살고 있고, 그러다 보면 아주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양육을 하는 부모들도 세상에는 충분히 많다. 이들을 위한 양육지원과 개입은 당연히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아이가 어렸을 때일수록 올바른 개입은 필수적이다. '아이는 부모가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 역시 명백하기 때문이다.

김근영 서강대 심리학과 교수 발달심리학 Ph.D
연세대 심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Vanderbilt 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두명의 쌍둥이 딸들을 키우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