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대학 논문심사 참관기
상태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스본대학 논문심사 참관기
  • 2019.08.21 14:00
해외 대학에서는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어떻게 할까? 여기 리스본대학 심리학과의 사례가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박사 한 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이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포르투갈과의 인연

다시 포르투갈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서유럽에서 아마도 가장 가 볼 확률이 적은 나라가 포르투갈일 거다. 처음 리스본에서 개최되는 학회를 갈 때 열 번도 넘게 망설였던 것 같다. 아는 것이라곤 보드게임 부루마블Blue Marble에서 그저 그런 가격과 수익을 자랑하는 도시인 리스본. 무엇으로도 끌리지 않고 아는 것도 없는 이 도시를 가야 할까?

그런데 어느덧 네 번째 방문 비행기를 타고 있다. 이젠 내가 가본 외국 중에 가장 많이 가 본 나라가 되었다. 문득 2년 전 리스본 대학을 방문했을 때가 떠오른다.

프랑스 니스에서 개최되는 학회를 갔어야 했다. 유럽의 서쪽 끝에서부터 프랑스로 넘어가자는 어느 학생의 제안. 겸사겸사 리스본 대학 심리학과에 연락을 취했다. 그곳에선 임상심리학 박사과정생 한 명의 논문심사가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그 행사를 참관하기로 약속을 정했다.

심사시간은 오후 2시. 오전 관광을 하고 점심을 먹고 충분히 갈 수 있는 시간이라고 착각했다. 오전에 아줄레주(포르투갈식 타일공예) 박물관을 구경하니 어언 12시가 되었다. 일단 대학 쪽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버스는 생각만큼 자주 오지 않았고 지하철 환승을 하고 나니 벌써 시간은 오후 한 시.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해리포터 망토의 기원

내가 간 시기는 2월. 한참 졸업사진을 찍는 시기였다. 포르투갈의 대학생들은 3학년부터 교복인 망토를 두르고 다닌다. 어찌나 망토를 사랑하는지 시내에서도 망토를 두른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해리포터의 교복이 이 망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니 가히 포르투갈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사진출처 리스본대학 홈페이지
리스본대학의 심리학과 단독 빌딩 모습. 심리학과 홈페이지에는 "We are Psychology, you are the Future!"라는 슬로건이 인상깊게 새겨져 있다. 

한 시 15분이 지나고 있다. 교내에서 식당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다행히 심리학과 건물이 보인다. 심리학과가 있는 건물이 아니라 심리학과의 건물이다. 많은 선진국들이 그렇듯 심리학과는 독립적인 건물을 가지고 있고 그 크기도 웬만한 우리나라 대학의 단과대학보다 크다. 심리학과 건물 지하에 학생식당이 있다. 샌드위치로 급하게 점심을 때운다. 손님 자격으로 학교를 방문하는데 지각이란 상상도 할 수 없다. 입속에 빵을 급히 넣고 심사장으로 향한다.1시 40분. 다행히 심사장 건물을 찾았다. 일종의 대학 본관 같은 곳인데 행정실보다 눈에 띄는 것이 논문심사용 방들이다. 마치 모의법정처럼 생긴 발표장에는 심사위원석, 방청석, 발표자석이 모두 분리되어 있다. 하나 둘 대학원생들이 모여드는데 족히 100명은 되어 보이는 학생들이 집결한다. 한 직원 분이 나에게 와서 신분확인을 한다.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리스본대학 박사학위 심사

2시 정확하게 논문심사가 시작된다. 심사장엔 긴장감이 감돈다. 심사를 담당한 교수 5인이 입장한다. 모두 가운을 입고 있다. 우리는 졸업식에서 보직교수들이나 한번 입는 그 가운을 이 분들은 논문심사 때마다 입는단다. 옷이 뭐가 대단하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고색창연한 심사장에 가운을 입은 교수들이 들어오니 그야말로 숨이 막혀오는 긴장감이 전달된다.

나는 오늘 저녁 기차로 스페인을 가야한다. 논문심사 참관을 끝내고 그 유명한 에그타르트 원조집을 들렀다가 저녁을 먹고 역으로 가면 충분한 시간이다. 심사를 설마 두 시간 이상 하려고?

지도교수는 참가한 모든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오늘 논문심사의 취지를 설명한다. 심사위원 중에는 외부 교수진 두 명이 포함되어 있는데 한 분은 학생의 논문 분야 주제에 정평이 나 있는 캐나다의 교수였다.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위해 해외에서 심사위원을 위촉하다니 신선한 충격이다. 이런 경비는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4시간 계속된 질문과 답변

학생이 자기 논문의 요지를 프레젠테이션한다. 거의 30분이 걸릴 정도로 장대한 결과였다. 질적 연구가 포함되다 보니 더욱 시간이 길어졌다. 이대로 끝나는가?

곧바로 첫 번째 위원의 발언이 시작되었다. 20분 간 본인의 심사평과 주요 비판점 및 질문을 제시한다. 졸업예정자는 이 질문들에 대해 충분한 답변을 해야 한다. 30분이 넘는 답변이 뒤를 따른다. 이미 한 시간 반이 흘렀다. 박사과정 학생은 너무나 의연하게 지적사항을 설명하고 때로는 변호한다. 벌써 한 시간 반이 흘렀다. 설마 모두 이렇게?

두 번째, 세 번째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 심사위원이 끝나니 이미 세 시간이 경과해 다섯 시로 치닫는다. 네 번째 심사위원은 캐나다 교수로 영어만 구사한다. 이 사람의 심사를 위해 동시통역이 참여하였다. 졸업논문심사에 들이는 노력과 돈이 놀라울 따름이다. 학생은 이번에도 당당히 포르투갈어로 자신의 입장을 방어한다. 네 명의 도전을 세 시간 동안 받아내는 학생은 거의 검투사나 다름없다. 위대하고 감동적인 순간이다.

어느덧 시간은 5시를 넘어선다. 이젠 에그타르트를 먹으러 벨림지구를 가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아직도 심사위원 1인은 질문조차 하지 않았고 그 뒤 얼마나 더 행사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거의 하루 종일 논문심사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한 명의 학자를 키우기 위해 

너무나 아쉽지만 기차시간을 위해 조용히 자리를 뜬다. 초대해준 학과장님께도 눈인사밖에 하지 못했다. 저 검투장 한복판에서 자신의 논문을 지키고 있는 학생에게 진심어린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었는데 불가능하다. 이젠 마드리드행 기차를 타야 한다.

포르투갈은 분명 우리보다도 국민소득이 떨어지는 나라이고, 그러다 보니 은연중에 이 나라의 학문 수준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포르투갈 전체에서 2등의 위치를 고수하는 리스본대학은 결코 우리가 함부로 볼 수 없는 상대였다.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에 대학을 시작했고(물론 그때 시작한 대학은 코임브라 대학이다. 리스본대학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드넓은 공간이 주는 인프라도 나를 주눅 들게 했지만 가장 감동스러운 점은 한 명의 학자를 키우기 위해 들이는 그들의 성의와 노력이다. 나는 오늘 진정으로 박사다운 박사의 탄생과정을 본 것이다.

스페인으로 가는 야간열차(실제 리스본에서는 오직 야간열차만 외국으로 나가고 들어온다) 안에서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나름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지도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리고 우리 학계는 한 명의 인재를 키우는데 충분한 성의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그 가치만큼 대접받는 게 아니라 대접받는 만큼 가치가 생긴다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렇듯 엄격하고 숭고한 학위과정을 통해 배출되는 박사가 학문을 가볍게 여길 리 없다. 대강 구성되는 수업과 좋은 게 좋은 것으로 넘어가는 학위심사과정. 사실 우리 학생들은 게으르지도 무능하지도 않다. 무능하고 성의 없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진정한 학자로 출발할 기회를 주지 못했던 것이다.

중요한 건 인재를 만드는 과정

그 날 이후로 달라진 것? 일단 논문심사장소를 변경했다. 강의실이 아닌 도서관 극장에서 심사를 진행하고 아주 충분한 질문과 답변기회를 마련한다. 심사를 적당히 넘어가진 않지만 학생에게 무례하지도 않으려 노력한다. 우리 학생 하나하나를 최고의 인재로 대접할 때 그 학생들은 최고의 인재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형식과 원칙을 바로 세우고, 학생들에게 가능한 최고의 대우를 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 나 혼자 될 일은 아니지만 우리 심리학계가 선진국 수준으로 가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할 노력이다. 학교마다 MRI 장비를 놓는다고 나아질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사람이고, 중요한 건 인재를 만드는 것이다.

포르토 성라자루스 공원에서.mind

최승원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덕성여대 심리학과 부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학은 반드시 생물-심리-사회적 접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기에 언젠가는 심리학이란 이름보다 더 발전적인 개명이 필요하다고 믿는 심리학자. 상담센터와 정신과병원을 거쳐 대학에 와있는 이분야 진로탐험의 교과서적인 인물이나 진로상담보다는 괴팍한 연구자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람. 기분장애와 B군 성격장애가 주요연구관심분야이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떤 곳에서든 최선을 다할 멀티 플레이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