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의 색상 그리고 마음
학생들의 시험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나는 손에 집히는 수성 사인펜을 색을 가리지 않고 집어 드는 습관이 있다. 그저 시험지 인쇄에 사용된 검은색이 아니라면 상관없다는 판단아래 빨간색 사인펜이 있으면 그것을 쓰고 없으면 파란색 사인펜을 집어 든다. 심지어는 두 색깔마저도 없을 때는 검은색 사인펜이나 기타 색의 형광펜을 사용한 적도 있다.
이러한 무심한 내 습관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 심리학 논문이 하나 눈에 띄어 소개하고자 한다. 체코의 Masaryk 대학의 심리학자들은 최근 198명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두 가지 언어 과제 실험을 실시해, 참가자가 사용하는 펜의 색상이 과제 수행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이들이 사용한 첫 번째 과제는 일종의 단어 완성word completion 과제로서 일련의 단어들 각각에서 제거된 어근stem들을 채워 넣어 원래의 단어를 완성하는 과제였다. 두 번째 다른 과제는 우리가 흔히 교정proofreading에 해당되는 과제로서 주어진 덩이글text에서 철자나 문법, 어법적 오류를 모두 찾아내는 과제였다.
빨간색의 효과 검증
이들 실험에서 사용된 주요 실 처치는,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참가자가 사용할 펜의 색상이다. 절반의 참가자는 빨간색을, 나머지는 파란색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처치는 빨간색 펜이 부정적 단어의 연상에 도움이 되고, 채점자의 평가를 까다롭게 만들 수 있다는 과거 연구의 주장에 기초한다. 이러한 과거 연구들은 비교적 흥미로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여러 연구들 간에 다소 상충되는 결과 때문에 반복 검증replication의 필요성이 절실한 상태였다.
이번 연구에서는 과거 영어권에서 시도되었던 영문으로 구성된 과제 자료를 체코어로 번역해 실험에 사용함으로써, 과거에 실시된 실험 연구에 대한 반복 검증을 시도함과 동시에 교차 문화적 보편성 확보에 주력했다. 먼저 첫 실험에 사용된 단어 완성 과제의 체코 단어들 중 일부는 부정적 결과와 관련있는 일련의 단어들이었다. 예를 들어 파산bankruptcy, 꾸짖음rebuke 및 실패failure 등의 단어에서 어근에 해당되는 알파벳 낱자들이 제거된 상태였는데, 참가자들은 주어진 시간 내에 주어진 과제 단어들을 원래의 온전한 단어로 가능한 많이 완성했다. 두 번째 과제는 약 1,000개 정도를 상회하는 체코 알파벳 낱자로 구성된 비교적 내용상 중립적인 덩이글에서 어법 오류를 가능한 많이 찾아내는 교정 과제였다. 물론 찾아낸 어법 오류의 정확성보다는 도합 몇 개를 체크하는지에 주목함으로써 정확성 측면이 아닌 평가 기준의 관대함 여부에 관찰의 초점을 맞추었다.
과거에 동일한 가설을 검증한 영어권 연구의 경우, 빨간색이 아닌 다른 색의 펜을 사용해 과제를 수행했을 때보다 빨간색을 사용했을 때 단어 완성 개수가 더 많았으며 교정 과제의 경우 또한 빨간색 펜이 아닌 경우보다 빨간색 펜을 사용했을 때 교정이 필요한 부분을 더 많이 체크한 것을 보고했다. 이번 연구에서도 역시 역시 빨간색 펜을 사용했을 때 단어 완성 과제에서 약 0.5 단어 이상, 교정 과제에서도 역시 약 두 개 부분 정도를 평균적으로 더 표기한 것이 관찰되어 과거 연구와 거의 동일한 결과 패턴이 관찰되었다.
빨간색과 부정적 마음
이번 연구를 보고한 연구자들은, 먼저 빨간색 펜 사용 시 부정적 단어 완성이 좀 더 원활했던 이유에 대해 빨간색이 ‘실패’와 같은 부정적 감정과 매우 강하게 연합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더 나아가 빨간색 펜을 사용한 교정 시 상대적으로 교정이 필요한 부분을 더 많이 표기한 것은, 빨간색이 실수mistake에 대한 탐색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즉 빨간색 펜으로 단어를 완성할 때는 참가자의 부정적 감정이 활성화되어 이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단어들의 연상이 좀 더 수월했으며, 이러한 부정적 감정의 활성화는 역시 빨간색 펜이 사용된 교정 과제에서도 타인의 실수에 대해 지적하는 것에 있어서 공격적이면서도 주저함이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빨간색 펜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연구들도 다수 있지만 문화권을 넘어서 영어와 체코어를 사용한 과제에서 일치된 결과가 관찰된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의 현장에서 채점, 평가 등에 빨간색 펜을 선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 소개한 연구의 주장이 매우 그럴 듯하게 들린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당신은 무슨색의 펜을 사용하겠는가?
학생들이 제출한 보고서나 시험 답안지에 대한 평가 이후 이를 종종 학생에게 돌려주게 되는 나로서는, 학생들이 공을 들여 써내려간 글과 답안을 평가할 때 가급적이면 빨간색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세세하고 비판적으로 의견을 남겨 학생들의 빈틈없는 학습을 돕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한편으로는 필요이상 비판적이고 까다로운 인상을 남기는 것이 조금 조심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 여러분들이 과연 누군가가 평가를 요청한 글에 세세한 의견을 남기기 위해 여러 색깔의 펜 중 하나를 집어 들어야 한다면 무슨 색깔의 펜을 집어들 것인가? 평가의 성격과 목적에 맞게 잘 선택했으면 좋겠다. mind
<참고문헌>
- Fikrlova, J., Cechova, L., Lebedova, T., Pycha, P., Sesulkova, A., Prochazka, J., & Vaculik, M. (2019). The power of red: The influence of colour on evaluation and failure-A replication. Acta Psychologica, 198, 102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