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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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
  • 2019.09.30 11:10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삶을 이루고 있는 사소한 좋아하는 것들로 성격이나 살아온 역사, 경험들이 드러난다.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인가.

웃음거리가 된 자기소개

중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이 된 첫 날이었다. 이제 막 부임한 듯 젊고 예쁜 여자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셔서 담임선생님이라고 본인을 소개했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반 아이들에게 한 명씩 일어나 자기 소개를 하도록 했다. 아이들은 앉은 순서에 따라 일어나서 자기 이름이 뭔지, 어느 초등학교를 졸업했는지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고, 내 차례가 되었다. 조금 긴장되는 심정으로 일어나서 내 이름을 말한 후 좋아하는 것들을 줄줄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떡볶이를 좋아하고, 청바지를 좋아하고... 뭐 그런 식이었는데, 반 아이들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말하기 보다는 에둘러 표현하여 친구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가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었던 나는, 특이한 자기 소개를 하는 바람에 친구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이후 그럭저럭 재미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이해 받지 못해 좀 외로운 마음이 남아있었는데, 국어 책에 실린 글 한 편이 그 마음을 달래주었다.

"나는 비 오는 날 저녁 때, 뒷골목 선술집에서 풍기는 불고기 냄새를 좋아한다. 새로 산 양서(洋書) 냄새, 털옷 냄새를 좋아한다. 커피 끓이는 냄새, 라일락 짙은 향기, 국화, 수선화(水仙花), 소나무의 향기를 좋아한다. 봄 흙 냄새를 좋아한다. 나는 사과를 좋아하고 호도와 잣과 꿀을 좋아하고, 친구와 향기로운 차를 마시기를 좋아한다. 군밤을 외투 주머니에다 넣고 길을 걸으면서 먹기를 좋아하고, 겨울날 찰스 강변을 걸으면서 핥던 콘 아이스 크림을 좋아한다."

​피천득 님의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 중 일부이다. 좋아하는 것들, 사랑하는 것들을 나열한 짧은 수필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나는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러고, 나는 점잖게 늙어 가고 싶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만나는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고 느끼며 좋아한다고 썼을 뿐인데, 참 아름답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같이 차 한잔 하겠냐고 청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문학자였던 피천득 님을 많은 사람들이 수필가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이처럼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Judith Jans Leyster (also Leijster) (c. July 28, 1609[1]– February 10, 1660) was a Dutch Golden Age painter.
네덜란드 황금시기 화가 쥬디스 에리스터의 자화상이다. 이렇게 자신의 일을 즐거워하는 자화상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쥬디스 얀스 레이스터Judith Jans Leyster, 1609~1660. '자화상', 

취향이 말해주는 것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요즘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은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안녕 나는 아미(방탄소년단의 팬클럽)야”라고 한다는 것처럼, 어떤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지, 그 그룹 중 특히 누구를 좋아하는지도 역시 정체성의 중요한 한 면이다. 사계절 중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는지, 쉬는 날엔 뭘 하는 걸 좋아하는지, 손톱을 어느 정도로 짧게 자르는 걸 좋아하는 지 같은 것들로 나의 성격이나 살아온 역사, 경험들이 드러난다. 인스턴트 커피만 마셔본 사람은 자신이 어느 산지의 원두 커피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고, 설거지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시판 주방 세제 중 어떤 것이 제일 마음에 드는지를 답할 수가 없다.

생각할 겨를 없이 지내느라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바쁘고 피곤해서 혹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생각하기는커녕 여러 선택지를 놓고 더 기분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언감생심 사치스러울 때가 많다.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삶은 필요한 것에 집중하는 삶과 확실히 다른 차원의 삶이다. 상담자로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여태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무심하게 지내다가 이제 와서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당황하거나 눈가가 촉촉해지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때로는 부모님의 선택에 순종하느라, 때로는 형제자매에게 양보하느라, 때로는 필요한 것을 확보하는 데에 급급하여 좋아하는 것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자신이 어떤 색의 옷을 좋아하는지, 중국집에서 파는 음식 중 자장면 말고 다른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신발은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는지,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하는 것이 기분이 좋은 지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인가

동료들과 점심 메뉴를 정할 때나 뭘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 괜찮다. 특별히 호불호 없다’는 답으로 일관하던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구나. 나는 여태 좋아하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살았구나.’ 하고 깨달을 때 그 통찰은 참 아프다. 통찰의 아픔을 견디고 드디어 새로운 데이트를 시작하듯 자기 자신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기로 한 사람이 이젠 뭘 좋아하는지 질문을 받으면 전과 달리 비로소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뭘 좋아하지?” 그러나 내가 어떤 신발을 좋아하는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어느 하나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작정하고 생각해보려니 더욱 어려워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 한번의 좋아한다는 표현과 선택이 곧 나를 결정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너무나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내 기호의 소중함을 느끼고 인정해보려 하니 그게 갓 태어난 아기를 다루듯이 조심스러워서, 한번의 말이나 행동 조차 쉽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

아무런 부담 없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드러내기, 좋아하는 것을 구별하여 선택하고 선택 후에 그것을 즐기거나 감당하기, 이런 것은 사실 반복적인 시도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막상 별로 좋지 않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주변 사람들과 좀 불편해질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한 후에 그 결과를 책임지는 것도 스스로 기꺼이 감당해봐야 그 다음이 있다. 이번엔 그게 좋지만 다음엔 저게 좋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도 된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너무 무거울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 말고 좋은 것

어떤 이의 인생에 있어 아프지만 빛나는 통찰의 순간을 함께 맞이한 후, 그에게 필요한 것 말고 좋은 것, 해야 하는 것 말고 좋아하는 것, 차악 말고 최선을 물어보는 순간을 좋아한다. 길을 지나다가 쇼윈도에서 보이는 분홍색 가디건이 예쁘면 우리는 그 가게에 들어가본다. 그런데 그 분홍색 가디건을 만져보고 입어본 다음에 물어본다. “다른 색은 없나요?” 그러고는 사지 않고 그냥 나오거나 회색 가디건을 사가지고 나온다. 갖고 있는 여러 톤의 회색 옷들을 떠올리면서. 늘 이렇게 살아왔다면, 이제 필요한 것 말고 좋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

느닷없이 분홍 가디건을 사가지고 들어갔다가 가족에게 핀잔을 들을 수도 있고, 같이 맞춰 입을 옷들이 마땅치 않아서 활용을 못할 수도 있고, 안 입어보던 색이라 어색해서 옷장 안에만 모셔둘 수도 있다. 이 달 생활비 예산 범위를 넘어가서 한동안 곤란할 수도 있고, 막상 입어보니 그 색깔은 별로 나에게 안 어울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뭐 어떤가. 내가 좋은 것을 스스로 선택해서 결정해봤고, 그 선택의 결과를 경험해봤고, 다음엔 다른 좋은 걸 찾을 수 있을 거다. 원래 취향이라는 것은 효율성이나 생산성과는 좀 거리가 먼 것 아닌가? 효울적인 나, 생산적인 나, 별 취향 없이 둥글둥글 잘 지내는 나 보다는, 봄 벚꽃에 비해 벚나무 단풍잎이 좋은 나, 황금잉어빵 말고 붕어빵을 좋아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또 얼마나 좋은지. 삶의 사소한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삶은 참 아름답다. 피천득 님의 수필처럼. mind

박혜연 분당서울대병원 공공의료사업단 임상심리 Ph.D.
대학병원 공공의료사업단에서 공직자 및 일반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관리와 정신건강 문제 예방 및 치료를 위해 일하고 있는 임상심리전문가이다. 경기도 소방심리지원단 부단장, 보건복지부 전문 카운셀러를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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