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각하는 피해자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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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피해자다움
  • 2019.10.09 16:00
2008년, 강간 피해자가 별안간 거짓 증언자로 내몰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강간 피해자라고 하기에 행동이 자연스럽지 않아 의심스럽다는 제보는 결국 피해자에게 '양치기 소녀'라는 누명을 3년 동안이나 덧씌우는 결과를 낳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강간 피해자가 죄 없는 양치기 소녀가 되기까지

2008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워싱턴 주 서부의 한 10대 여성이 양치기 소년이었다고 자백했다"는 뉴스가 지역방송을 도배합니다. 뉴스의 내용을 듣자하니 이렇습니다. "얼굴을 모르는 범인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하던 여성의 주장이 허위였다고 밝혀졌다. 이 여성은 추후 허위 신고로 기소당할 가능성도 있다." 이 '양치기 소녀' 마리는 실제로 경찰로부터 기소를 당하고, 벌금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마리가 실제로 강간피해를 당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3년 이상 지난 뒤의 일입니다. 타 지역에서 연쇄 강간 사건이 벌어져 긴 추적 끝에 범인이 잡히게 되는데, 그 범인의 사진 속에 마리가 있었던 것이지요. 후일 이 일은 저널리스트인 T. 크리스천 밀러와 켄 암스트롱에게 알려져,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A False Report: A True Story of Rape in America 라는 책으로 나오게 되고, 이 책은 퓰리처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이며, 많은 비평과들과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마리의 케이스를 자세히 알게 된 사람들은 그녀가 잘못된 수사 관행의 피해자라고 말합니다.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을 알지 못하던 경찰이 마리에게 사건 직후 여러 번의 진술을 강요했고, 진술이 반복되면서 사소한 모순이 생기자 그것과 범인이 물적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는 근거로 그녀를 윽박질렀으며, 겁에 질린 마리가 결국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하게 만들었다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그 경찰이 처음부터 마리를 믿지 않았다고, 수사 의지가 없었다고, 마리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습니다. 마리가 위탁 가정 출신이고 '번듯한' 배경이 없는데다 혼자 사는 소녀여서 경찰이 그녀를 처음부터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사실 그것보다는 조금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경찰의 최초 출동 후 적어도 24시간 동안 수사는 일방향으로, 그러니까 마리의 증언과 마리의 방에 남겨져 있던 소수의 증거를 바탕으로 범인을 잡는 쪽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피해자에게 여러 번 반복 진술을 시킨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1 대체로 경찰들은 마리에게 호의적이었고, 그녀를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그녀에게 배정된 경찰들은 '올해의 경찰 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능한 사람들이었고요. 마리가 거짓 증언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방향으로 수사가 틀어진 것은 익명이기를 원하는 한 제보자가 전화를 한 후입니다. 그 제보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는 과도하게 관심을 받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강간' 이 실제 있었는지 의심된다."

넷플릭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트레일러 

수사의 방향을 뒤엎은 한 통의 제보

익명의 제보자는 마리와 함께 살았던 위탁모 페기였습니다. 페기는 정신건강 분야의 석사학위 소지자였으며, 위탁가정 아동들의 관리자이자 어린이 보호 담당 업무, 특수아동 보조 교사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배경이 페기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던 듯 합니다. 페기는 마리에게 성격장애가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평소부터 마리의 행동이 정말 과도할 때가 많았던 데다, 강간이 일어난 직후 마리가 자신에게 연락을 했을 때는 통화 상 마리의 목소리가 마치 연극을 하듯 진실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위탁모였던 섀넌 역시 강간피해에 대한 마리의 말투 때문에 마리를 의심합니다. 마치 '방금 샌드위치 하나를 만들었어요' 라고 말하는 듯이, 남의 일처럼 아무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들을 가장 크게 동요하게 했던 것은 사건이 있었던 날 저녁 마리가 보였던 행동인데, 경찰이 침구를 증거로 가져가서 새 침구를 사러 간 마리가 원래 쓰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침구를 사겠다고 고집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강간이 있었다면 그 디자인의 침구는 '나쁜 기억'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하니 피하고 싶을 텐데도, 쓰던 침구를 고집했다는 것이 위탁모들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평소 아는 사이였던 패기와 섀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의심을 확증시켜 갔고, 결국 경찰에 제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마리의 전 보호자였던 이 두 사람의 제보는 수사관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수사 방향이 틀어집니다.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에둘러 전달하며 마리를 불러 실제로 강간이 있었는지 물은 것이지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증언을 거짓이라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마리는 충격을 받아 진술을 번복하게 됩니다. 

넷플릭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중, 경찰에게 신문을 받는 마리의 모습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여기에서 비난해야 할 것은 경찰이 아니라 위탁모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탁모들의 마음에도 마리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마리에 대해 걱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마리의 행동이 너무도 이상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보고해야만 한다는 의무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 커다란 과실은 누가 누군가를 일부러 음해하고 증오한 데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위탁모들이나 경찰이 '피해자다움'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믿어 왔기 때문에 벌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과 편견이란 너무도 강력한 것이어서, 마리의 케이스에서 보이듯 정신건강 관련 전문가도, 아이를 오랫동안 돌보아 왔던 어머니도, 경찰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곧잘 생각합니다. 정말로 피해자라면, 정말로 강간 피해를 당했다면 울면서 자신의 피해를 호소해야 하지 않을까? 피해 정도와 피해 직후 느끼는 고통이 비례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피해를 부끄러워 숨기려고 하지 않을까? 피해 사실에 대해 말할 때는 고통스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사건과 관련된 일을 피하려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온 사람의 눈에는 마리와 같은 사람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피해 사실에 대해 차분하게 말하다니, 범행 당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침구를 사려고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런데 그럴 수 있습니다.

정형화된 피해자는 없다

비록 성폭력 피해가 대체로 심리적 고통을 야기하기는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며, 그런 고통을 감내하거나 표현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피해자가 피해 이후 이런 행동이나 감정을 보인다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지갑을 도둑맞은 사람의 반응이 천차만별일 수 있듯 성폭력 피해자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피해 직후에 아주 이상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잘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정형화된 피해자는 없고, 피해 후에는 '이런 행동이 반드시 나타난다'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성폭력 수사기관과 재판부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알고 있어야 하는 사실입니다. 마리의 경우, 결국 자신이 강간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진술을 번복하게 만든 것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 한 번씩, 자기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위해 돌아봐주었으면 합니다. 편견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편견의 미혹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나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지. 내가 마리를 봤다면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지. mind

1 잘 알려져 있듯, 반복진술은 피해자의 트라우마 증상을 가중시킬 수 있고, 마리의 경우처럼 진술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진술이 수사와 재판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폭력지원센터인 해바라기센터에서는 수사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2차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피해자의 진술 녹화를 실시하고, 각 분야의 전문가(경찰관, 간호사, 심리치료사, 사회복지사 등)가 원스톱 서비스를 지원합니다. 

임민경 범죄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 임상심리전문가
독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하였고, 현재는 임상심리전문가로서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언제나 누군가의 애독자이자 무언가의 애호가이며, 트위터 그만두어야 한다고 매일 말하지만 그만두지 못하는 트위터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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