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예술, 비밀은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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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예술, 비밀은 단순하다
  • 2019.10.24 14:25
들라크루와의 '인민을 이끄는 자유'라는 작품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한국의 자기가 중국 것에 비해 보다 훨씬 자연스러워 보이는 걸까? 미술심리학자 지상현 교수가 그 비밀을 말해 준다.

대비의 효과

심리학자 다니엘 벌린D. E. Berlyne은 각성수준의 증가와 뒤이은 감소가 쾌감중추를 자극한다고 했다. 쾌감중추 존재에 대한 논란이 있으니 “쾌감중추를 자극한다”는 말 대신 “즐거움을 준다”고 표현을 바꿔도 상관없다. 벌린의 주장대로라면 예술감상의 즐거움에서는 ‘대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비만큼 감상자의 각성수준을 높이는 확실한 방법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예컨대 연극이나 영화에는 극단적으로 착한 자와 악한 자, 부자와 가난뱅이,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가 등장해 대비의 구도를 만드는 것이 다반사다. 일상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인물들도 드물지만 있다 해도 같은 생활공간에 있기는 더욱 어렵다.

극단적 대비가 극이나 영화 속 갈등을 고조시키면 감상자들의 각성수준도 증가한다. 그러나 극이 종반으로 가면서 권선징악이나 개과천선이 이루어져 해피엔딩이 이루어지고 감상자들의 각성수준은 원상회복된다. 벌린이 말하는 전형적인 각성수준의 증가와 감소가 만든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미술감상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밝기대비, 형태대비, 방향대비, 색상대비 등이 각성수준을 높이는 핵심 요인들이다.

Eugène Delacroix  (1798–1863), 'The Lion Hunt', 1855, Oil on canvas, 57 * 74 cm,Nationalmuseum, Sweden.
Eugène Delacroix (1798–1863), 'The Lion Hunt', 1855, Oil on canvas, 57 * 74 cm,Nationalmuseum, Sweden.

낭만기 미술의 거장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보자. '사자사냥' 속에 표현된 사자와 말 그리고 말을 탄 사냥꾼의 역동적 자세와 방향은 서로 대담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여신' 속에는 강한 밝기대비와 널브러진 시신을 넘어 전진하는 여신과 시위대의 방향대비가 일품이다.

Eugene Delacroix (1798–1863),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Oil on canvas, 260 Ⅹ 325 cm, Louvre Museum, Paris. 
노란 점선속의 빨간 선들은 그 아래의 누워있던 선들이 서서히 일어서는 형국이다. 보라색 타원 속의 영역은 밝은 배경과 짙은 배경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톤 영역이다.

그림 속 대비는 각성수준을 높인다. 쉽게 말해 이런 그림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인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면 강렬한 대비의 경계에 중간 밝기의 완충지대가 있고 서 있는 시위대의 자세나 옷자락 등에는 수평 방향의 시신과 닮은 방향의 총이나 띠와 같은 요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대비가 만든 각성수준이 조금 낮아지는 순간이다.

시대마다 다른 대비의 유형

미술사를 보면 시대마다 화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대비의 유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고전기에는 밝기대비가 강하고 낭만기에는 밝기대비와 더불어 방향대비가 두드러진다. 인상주의가 시작되면 색상대비, 특히 노랑과 파랑의 대비가 자주 등장하다가 이후 후기 인상파의 고갱이나 야수파 등에서 보듯 빨강과 초록의 대비가 빈번해진다. 이런 이유로 미술사를 대비의 유형을 기준으로 기술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런대 이런 생각은 곧 난관에 부딪히는데, 현대미술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새로운 대비가 나올 게 없어진 점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와 현대의 경계에 있던 구스타프 크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운이 좋은 화가다. 몇 남지 않은 새로운 대비를 찾아 작품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텁텁한 유화의 질감을 일본제 금분의 반짝임과 대비시킨 것이다. 그러나 모든 화가들이 그런 행운을 누릴 수는 없었다. 많은 미술가들이 새로운 길들을 찾아 나섰는데 일부 화가와 입체미술가들은 새로운 대비유형을 찾아내기 위한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안도 다다오가 독특한 이유

바로 '인지적 대비'의 세계다. 기존의 대비가 색상 대비, 밝기 대비 등 감각적 대비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인지적 대비는 우리의 경험, 지식과 추론이 폭넓게 개입된 대비를 말한다. 인지적 대비를 구현하는 데에는 염료만 사용하는 화가보다 다양한 소재를 이용할 수 있는 공예가나 건축가가 유리하다.

예컨대 건축가 안도 다다오Tadao Ando, 1941년생는 노출 콘크리트 양식을 개발했는데 그의 노출 콘크리트 건축물은 대개 넓은 면적의 유리창을 갖고 있다. 그의 건축은 노출 콘크리트가 아닌 노출 콘크리트와 유리의 대비에서 특유의 맛이 나온다. 노출 콘크리트의 무겁고 거칠고 억센 성질과 상대적으로 가볍고 매끈하며 부서지기 쉬운 성질 간의 대비라는 말이다. 이런 대비는 충분히 인지적이라고 할 수 있고 현대 건축, 공예, 조각 등 입체미술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 예술의 인지적 대비

그런데 이런 현대미술의 주요 특징인 인지적 대비가 우리 옛 미술품에서 발견된다. 아래 그림 속 네모난 삼단함(왼쪽)은 조선 말에 제작된 것으로 양가집 부엌에서 소금, 고춧가루 등을 담아 보관하던 용기다. 현대적 미를 물씬 발산하는 이 삼단함은 아쉽게도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도쿄 메구로에 있는 야나기 민예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야나기 민예관의 도록에서 빠지지 않는 자랑거리다.

'흐트러짐과 단정함의 대비'

이 삼단함은 현대 브랜드 디자인에서나 등장하는 인지적 대비를 보여준다. 바로 '흐트러짐과 단정함의 대비'다. 삼단함은 직육면체의 형태이지만 분명 백자의 일종이다. 가마 속 1300도가 넘는 고열을 견뎌내고 탄생한 물건이다. 가마 속 고열은 토기의 형태를 녹여 변형시키기도 할 정도인데 변형을 피하려면 원형이 유리하다. 그런데 이 삼단함은 직육면체다. 열에 의한 확장과 축소가 6면을 따라 고르게 일어나자면 흙을 빚을 때 매우 세심해야 했을 것이다. 뚜껑 네 귀퉁이의 접힌 모서리도 반듯하고 균일하다. 매우 세심하게 다듬은 용기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세심하게 만든 함에 회회청을 매우 거칠게 칠했다. 여기서 옛 미술품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인지적 대비가 생겨난다. '단정함 대 흐트러짐' 혹은 '작위 대 비작위'의 대비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유형의 대비는 중국과 일본 어디를 보아도 발견할 수 없다.

오른쪽 것은 청대의 자기인데 동일한 회회청을 세심하게 다듬은 형태에 맞게 꼼꼼하게 칠했다. 이런 방식이 옛 미술에서는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이런 작위 대 비작위의 대비는 조선 초와 중기에 생산된 수많은 분청사기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조선 중기 귀얄문 편병(아래 사진의 왼쪽)에는 원뿔이 뚫고 나온 듯한 정원의 몸통에 백토를 귀얄로 거칠게 칠했다. 여기서도 '작위 대 비작위'의 대비를 볼 수 있다. 청대의 자기 중에 이와 비슷하게 비작위적인 패턴을 구현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변窯變자기(오른쪽)가 대표적인데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의 모양이 곡선적이어서 우리의 분청자기나 삼단함에서 보는 기하학적 간결함이 없다. 그만큼 단정한 느낌이 약해 요변한 패턴과 강한 대비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Casual'한 우리 예술

한중일 가운데 유독 우리에게서만 발견되는 이 인지적 대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과문한 내가 단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사고의 유연성이다. 기하학적 균제미에 집착했던 일본의 정확성, 미술품에 어마어마한 노력과 시간을 들였던 중국의 강박과 달리 은유적 표현을 즐기고 놀이 하듯이 자기를 굽고 집을 짓던 조상들의 사고는 참으로 유연했다. 애초에 일본 미술을 전공하다 한국미술에 빠져 아들까지 한국미술사학자로 길러낸 존 코벨Jon Carter Covell박사는 우리 미술을 ‘Casual’이라는 단어로 함축했다. 우리말로 옮긴다면 ‘비작위’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그녀는 일본 미술을 ‘작위적'Contrive, 중국을 ‘통제'Control라고 특징지었다. 모르고 보면 엉성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유희와 유연함 그리고 천연주의가 넘쳐나는 것이 우리 미술이다. 옛미술을 통해 짚어 본 우리의 모습이다. mind

지상현 한성대 융복합디자인학부 교수 지각심리 Ph.D.
홍익대 미술대학과 연세대 대학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회화양식style이 결정하는 감성적 효과에 관한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는 한중일의 문화를 교차비교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삼국 미술양식의 차이를 규명하고 이 차이를 결정하는 감성적 기질의 차이를 추정하는 일이다. 관련 저서로는 <한국인의 마음>(사회평론)과 <한중일의 미의식>(아트북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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