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가족이면 그래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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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가족이면 그래도 되나
  • 2019.10.24 14:20
'아들/딸 같아서' 그랬다는 주장에는 가족을 핑계로 갑질이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에게는 그래도 된다는 얘기일까.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의 원인을 한국인의 문화적 타인의식에서 찾아보자.

그들의 변명

아들 같아서 그랬다는 군 장성 내외의 공관병 갑질, 손녀같아서 그랬다는 국회의원의 캐디 성추행가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갑질이 이슈다. 그들은 정말로 집에서 아들에게 전자팔찌를 채우고 딸의 몸을 함부로 더듬는 것일까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런 변명을 하는 것일까? 공관병 갑질 사건 이후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한국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문제일까

제 가족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이들의 입에서 아들이, 딸이, 가족이란 말이 언급된다. 이들의 행위는 결코 일반적인 한국 가족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한국문화와 관련 있는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갑질'이다.

왜 가족을 들먹이는가

갑질이란 자신의 지위나 권위를 바탕으로 상대방이 원치 않은 일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이 갑질을 정당화하는 방식인데, 여기서 갑질로 문제가 된 인물들이 들고 나오는 변명이 '가족'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들의 행위 이면에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어떤 일이든 용인받을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변명으로 가족을 들먹이는 것이다.

갑질러들의 '가족 운운'은 한국인들의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는 사회의 형태를 게마인샤프트Gemeinshaft와 게젤샤프트Gesellshaft로 분류하고 있는데, '공동사회'라는 뜻의 게먀인샤프트는 혈연과 정 등의 정서적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가족, 촌락 등의 집단을 의미하며, '이익사회'로 옮길 수 있는 게젤샤프트는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맺어진 회사, 정당 등을 뜻한다.

드물게 남아 있는 1930년대 가족 그림이다. 한국 화가로 처음 유럽에 유학한 배운성이 자신을 돌봐준 백인기 가족의 초상화를 남겼다. 왼쪽 두루마기의 인물이 작가다. 서양화법과 한국 가족의 분위기가 묘한 불일치, 혹은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배운성(1900~1978), '가족도', 1935, 140ⅹ200 cm,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공동사회 vs. 이익사회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의 인간관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족과 회사의 인간관계가 다른 것처럼. 게마인샤프트 내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훨씬 많이 이해하고 또 서로 의지한다그러나 게젤샤프트 내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얻게 되는 이익에 상응하는 행동만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관계를 요약하는 말이 '계약'이다.

오랜 시간동안 한국인들은 게마인샤프트를 기반으로 살아왔다. 우리가 살았던 지역공동체는 한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친족들로 구성돼 있는 소위 집성촌集姓村이었다. 길을 걷다가, 논밭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한 가족이었던 것이다다시말해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타인을 '가족'으로 인식하려는 문화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이러한 타인 인식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더이상 농사도 짓지 않고 집성촌을 이루어 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가족 내의 관계를 계약을 통한 공적관계에서까지 기대한다이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부르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은 직접적인 친인척 관계가 아니더라도 친족호칭으로 타인을 지칭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 아가씨 등등이 그것이다.

식당의 이모님들

식당에서 일하는 나이든 여성을 어떻게 부르는가이모는 어머니의 동성형제다. 가족도 매우 가까운 가족이다. 그 분을 이모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이모와 나 사이에는 암묵적인 가족관계가 형성된다. 조카는 이모에게 3인분 같은 2인분을 달라며 어리광(?)을 부리고 이모는 조카에게 반찬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가족의 정이다멋없는 심리학 용어로 '정서적 지지'라고 불러도 좋다. 전통적 가족이 사라지고 사람 사이의 따뜻함을 느끼기 어렵게 된 현대사회에서 가족처럼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개인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대단한 자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불편해 하는 오지랖도 바로 이런 관계에서 비롯된다더 이상 남이 아닌 관계가 되었으니 당연히 공유해야 할 영역이 넓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짜 가족처럼 말이다. '남이 아니니까' '남 일 같지 않아서' '동생 같아서' '아들/딸 같아서' 라는 표현은 여기에서 나온다.

물론 두 사람의 (유사)가족관계가 서로 합의된 것이라면 오지랖이 문제될 것은 별로 없다. 우리 주변에는 손아랫사람은 진짜 동생처럼, 아들/딸처럼 윗사람에게 의지하고 손윗사람은 진짜 형/누나처럼, 부모처럼 아랫사람을 챙겨주고 돌봐주는 바람직한 관계도 많이 있다.

거, 좀 알고 가족 같이 합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 '가족'으로 합의되지 않은 경우다. 병사와 상관은 국방의 의무라는 업무를 매개로 형성된 관계이고, 캐디와 손님은 서비스를 주고받는 계약적 관계다. 회사의 상사와 부하의 관계도 마찬가지. 상대가 원하지 않은 관계를 자신의 우월한 지위로 강요하는 것은 갑질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고 해서 아무 일이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부자유친, 장유유서 등 유교적 규범이 강조한 것은 자신의 위치에 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 하라는 것이지 부모와 연장자의 말에는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갑질은 유교적 전통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권위주의 문화의 잔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혼란은 한국인들이 예전부터 가져왔던 인간관계를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서도 적용하면서 생기는 현상인 듯 하다. 상호이익에 따른 계약이라는 게젤샤프트적인 관계가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전통적 가치와 잘못 전해져 내려온 인습, 새 시대의 가치가 뒤섞이면서 여러 분야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상대에 대한 배려 없는 무조건적인 권위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상대의 의무만 요구하는 일도 가족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자신의 가족에게 하지 않는 행동을 다른 이들에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mind

한민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 사회및문화심리 Ph.D.
토종 문화심리학자(멸종위기종),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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