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린 시절이 기억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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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린 시절이 기억나는 이유
  • 2019.11.02 10:00
아주 어렸을 때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그런데 대체로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에 비해 유아기 기억상실증 정도가 좀 약하다고 한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당신 생애 최초의 기억

여러분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어린 나이의 기억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 기억은 어떠한 경험이었나?

보통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되면 대체로 언급되는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경험은 만 3세에서 4세 정도가 일반적이다. 지금까지의 유아기 기억상실에 관한 연구들을 종합하면 대체로 서양인들의 경우 평균적으로 약 3.5,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동양인들의 경우 약 4세 정도에 자신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회상하는 편이다.

어린 시절 천사의 얼굴을 한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영국 고전주의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의 작품이다. Joshua Reynolds (1723–1792), 'Heads of Angels: Miss Frances Gordon,' 1786~1787, Oil on canvas, 76.2 * 63.5 cm, Tate Museum, UK.
어린 시절 천사의 얼굴을 한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영국 고전주의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의 작품이다. Joshua Reynolds (1723–1792), 'Heads of Angels: Miss Frances Gordon,' 1786~1787, Oil on canvas, 76.2 * 63.5 cm, Tate Museum, UK.

그럼 왜 그 전의 일은 생각이 나지 않을까? 기억 연구들이 성인을 대상으로 된 것이라면 가장 어렸을 때의 경험이란 최소한 20년 전의 일이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어저께 있었던 일도 생각이 안 나는데, 하물며 20년 전 일을 어떻게 생각해 내나! 하지만 20대의 성인도 2살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10대 역시도 2살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게다가 20대는 20년 전인 2살 때의 일을 기억할 수 없지만, 60대는 40년전인 20대 때의 사건을 명확하게 기억한다면 더더욱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실 그에 대한 답변은 과거부터 많이 제안되어 왔다. 심리학 역사의 초창기에는 프로이트Freud나 샤흐텔Schachtel과 같은 정신분석학적 설명양식이 주를 이루었지만, 최근에는 주로 생물학적인 요소, 예를 들어 편도체나 해마의 성숙이 유아기 기억상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되고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마의 생물학적 성숙이 4세 이후나 되면서 본격화되기 때문에 그 이전의 기억은 잘 저장이 되지도, 또 잘 인출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아직 모든 것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만약 해마의 성숙이 유아 기억상실증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사실 우리가 왜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지는 쉽게 납득이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다시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라. “대체로 서양인들의 경우 평균적으로 약 3.5,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동양인들의 경우 약 4세 정도에 자신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회상하는 편이다”.

유아 기억상실증의 문화적 차이

만약 해마의 성숙이 정말로 원인이라면 이 문화적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서양 아이들이 동양 아이들에 비해 신체적 성숙이 약간 빠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해마의 발달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코넬대학교의 중국계 발달심리학자인 Qi Wang교수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의 행동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또한 이 부모의 행동에 문화를 관통하는 가치, 즉 문화적 코드가 영향을 미친다는 점 역시 이러한 특성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대체로 어린 시절의 경험에 대한 기억은 정서적으로 매우 충만한 기억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성인도 마찬가지로, 정서적으로 충만한 사건일수록 기억이 더 잘된다. 이러한 현상에 기인하여, Wang교수는 미국 부모들이 중국 부모들에 비해 아이들과 과거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이의 정서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가설은 경험적 연구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한 연구에서 과거의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사건에 대해 미국 부모와 아이, 그리고 중국 부모와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대화하는 지를 관찰하였다(Wang, 2001). 미국 부모들은 아이의 과거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때 아이가 어떻게 느꼈는지, 그 감정과 정서를 다시 언급하고 확인시키는 대화를 중국인 부모보다 훨씬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친구와 싸우고 화가 났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그때 네 감정이 어땠는지, 그리고 그 감정 때문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주로 언급하였다. 반면 중국인 부모들은 아이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 그래서 결국 싸움을 한 친구와 어떤 식으로 관계회복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로 교훈적인 언급이 훨씬 많았다.

기억형성에 기여하는 문화적 가치

왜 미국 부모와 중국 부모들의 경우 같은 사건에 있어서도 다른 측면을 주로 언급할까?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그럴듯하게 제안되는 가설은 문화적 가치, 즉 개인의 독립을 강조하는 서양의 가치와 집단구성원간의 화합을 강조하는 동양의 가치가 양육행동에 반영된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 개인주의적 서양문화에서는 양육 시에도 자연스럽게 개인의 감정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언급이 많고, 반면 집단주의적 동양문화에서는 상대와의 화합이나 문제해결에 중점을 두는 대화가 많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 미국인 부모는 중국 부모에 비해 자녀가 두려움을 느꼈을 때 그 자녀의 감정을 달래주려는 대화를 훨씬 오래 하는 편이었다. 반면 중국인의 경우 자녀가 분노를 표현했을 때 그 분노를 해결하려는 대화를 미국부모보다 더 오래했다. 분노가 대체로 대인관계의 화합과 밀접하게 관련된 정서라는 점에서 보면 이러한 문화간 차이가 납득이 된다.

위의 가설이 실제로 작용한다고 가정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에 비해 더 어렸을 때를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정서의 표현이라는 문화적 가치가 동양보다는 서양에서 더 용납이 되고, 또 더 많이 대화의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이란 그 경험 자체 보다는 얼마나 반복적으로 특정 경험이 재해석과 재구성 기회를 가졌느냐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렇다면 똑같이 정서적으로 충만한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그 경험을 부모-자녀간 대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해석할 기회를 가졌던 서양 아이들이 이후에도 그 사건을 기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이러한 예는 문화적 가치라는 것이 단순히 성인들의 행동이나 믿음 뿐만 아니라 영유아 인지발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Wang교수의 이러한 주장이 언제나 지지되고 있지는 못하다. 예를 들어 개인주의 문화권이라 하더라도 뉴질랜드 남성들은 중국 남성에 비해 딱히 더 어렸을 때를 잘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화적 가치가 양육을 매개하여 아동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과거사 기억의 산출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들 이상한 주장은 아닐 것이다.

사실 3살 때의 사건을 기억하느냐, 혹은 4살 때의 사건을 기억하느냐 자체는 인생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차이를 만들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에서 언급했듯, 어렸을 때의 기억이란 객관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아마도 다양하게 재구성된 개인적 스토리일 가능성이 높으며, 또 어렸을 때 사건을 잘 기억한다고 해서 지금의 인지기능이 좋거나 하지도 않다. 하지만 당장 이익이 없다 하더라도 누구는 3살 때를 기억하는데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면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시대적 문화차이를 잊지 말 것

이미 성인이 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다 치고, 혹시 지금 영유아를 키우거나 앞으로 키울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 보다 정서적으로 충만한 대화를 더 많이 한다면 그 아이가 커서도 어렸을 때를 더 잘 기억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다. 아니, 사실 지금은 굳이 그렇게 노력할 필요도 없다. 이미 휴대전화를 통해서 너무나 쉽게 경험을 저장할 수 있고, 또 쉽게 재생할 수 있다.

지금의 40-50대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부모와의 대화, 혹은 빛바랜 사진 몇 장을 통해 힘들게 구성된 것인데 반해, 지금의 아기들은 실시간으로 녹화되는 수많은 동영상매체에 의해 비교할 수도 없이 풍부한 정보를 제공받고 있다 (유원지나 워터파크에서 아이를 찍기 위한 부모님들의 눈물겨운(?) 행동들을 보라!). 아마도 지금의 아이들이 성인이 된다면 현재까지도 일관되게 보고되고 있는 유아기억상실에 있어서의 문화차이는 사라지지 않을까 감히 예상을 해본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젊은 심리학도가 있다면 이 가능성을 잘 기억해 보도록. 그리고 앞으로 20년 쯤 후에 한번 연구를 해보시길. mind

 

 <참고문헌>

Wang, Q., & Gülgöz, S. (2019). New perspectives on childhood memory: introduction to the special issue.

김근영 서강대 심리학과 교수 발달심리학 Ph.D
연세대 심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Vanderbilt 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두명의 쌍둥이 딸들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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