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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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가을
  • 2019.11.03 02:11
이곳에서는, 아무 얘기나 써 보고자 합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느낌으로,) 참 이상한 가을이 있습니다.
보통 격년으로 오는 기분인데, 그나마 모두가 수월하게 넘기는 가을이 있으면 그 다음에는 모두에게 지독한 가을이 있는 식입니다.

올해가 하필이면 그 이상한 가을.

일조량 감소에 따라 세토로닌* 분비도 줄어든다는 것이 그나마 상식이 된 덕분에,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에 맞서고자 나름의 자구책들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들판에 황망히 서게 될 지언정 일단은 필사적으로 도토리를 쟁여주는 다람쥐처럼 분주히 마음의 월동 준비를 시작합니다. 일조량! 일조량이 줄어들 거야! 준비다! 어쩐지 온도의 변화와는 상관이 덜 했던 듯도 하여 올해처럼 날씨가 따뜻하면 따뜻한대로 묘한 우울과 잔잔한 절망이 깃들지요.

파리 북쪽 외곽도시 아르장퇴유에서 지냈던 클라우드 모네는 그 곳의 가을을 수많은 그림으로 남겼다. 강물에 어른거리는 단풍이 인상적이다. Claude Monet (1840-1926), 'Autumn Effect at Argenteuil', 1873, @The Samuel Courtauld Trust,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파리 북쪽 외곽도시 아르장퇴유에서 지냈던 클라우드 모네는 그 곳의 가을을 수많은 그림으로 남겼다. 강물에 어른거리는 단풍이 인상적이다. Claude Monet (1840-1926), 'Autumn Effect at Argenteuil', 1873, @The Samuel Courtauld Trust,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자못 비장한 각오와 산만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예측과는 다른 일들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이곳-저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은 다급해집니다. 한없이 취약하던 어느 날 감정적 스트레스에 준비없이 맞닥뜨렸던 그때로 돌아가, 그때 써 먹었음직 한 방법들을 주먹구구식으로 대입합니다. 도토리의 위치를 못 찾는 것은 둘째치고 도토리를 묻는다고 온 산을 헤매며 여러 노력을 했던 기억부터 사라진듯, 이전의 마음의 습관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학교에 있다보니 어쩔 수 없이 빈번히 사례로 들게되는) 학생들의 경우, 잠시 물리적 거리를 두고 지내던 원가족과 다시 한 번 언짢은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 하는 추석을 지나, 공부를 하든 하지않든 거대한 사회적 압력으로 다가오는 시험 기간에 이르면 각자 멘탈력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니 마음의 병에 취약해지기도 쉽습니다. 다른 이들도 각자의 생을 짊어지느라 어떻게든 버티고 있음을 자꾸 잊고 딱 개복치 수준의 참을성과 관용만 남아 세상에 대해 자꾸 화가 치미는 것도 우리의 마음을 빈한막심하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회피avoidance는 가장 괜찮은 방법이었고, 과제든, 진학이든, 취업이든, 만남이든, 이별이든, 모든 결정을 뒤로 미루고 짐짓 늑장을 부리는 것은 가성비 좋으면서 눈에 가장 덜 띄는 회피의 수단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광고카피를 만든 사람은 새로운 행동의 개시를 독려하고자 했겠지만, 사회적 철수social withdrawal와 미루기procrastination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 문구는 삶의 진리와도 같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자.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계절에 맞서는 일은 나이가 들어서도 계절이 반복되어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가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만큼 그럴듯한 일은 없어 보입니다.

이 와중에 개인의 삶을 함부로 말하고 다루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미디어에서 접하며 인간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다보면 더욱 한없이 아래로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유명인이 삶을 그만두게 된 날로부터, 누구에게도 그 권한을 위임받지 않았으면서 그의 사망에 기인한 요인들과 생전 성격을 멋대로 추정하고 '이랬을 것입니다 저랬을 것입니다'하며 자신의 통찰력을 광고하고 싶은 사람들의 근거없는 가짜 심리부검 레포트가 계속해서 이어진 올해의 가을은 모두에게 그야말로 한없이 난폭했습니다.

이런 해의 가을이면 강의에 가장 에너지가 많이 들어갑니다. 한 명 한 명 일부러 눈을 맞추어 표정을 살핍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어디있어요? 물어 얼굴을 봐야 안심이 됩니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이면 수업 내용을 전달할 때보다 출석을 부를 때에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괜찮아요? 잘 지내지요?'


수업시간이면 괜히 다급해져 어떻게든 내용에 일관된 범위에서 자꾸 잔소리를 신소리처럼 던집니다. 가볍게 살아요. 경박하게. 하찮게. 구구절절하게 대 서사시 수준으로 살면서 너무 거대해진 자아를 이고 지고 사느라 자꾸 삶을 놓치지 말고, 지금 이 문을 열고 나가다 생을 달리하면 일순간 어이없이 끝날 자기만의 비장함은 그만 두고,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머물러 쉽고 얄팍하게 지내요, 같이.
학생들은 그럴 때면 까르르 웃어줍니다. 소리는 탄산처럼 가볍게 강의실 천장으로 솟구쳐오릅니다. 그 아름다운 짧은 순간들을 저도 계속 기억합니다. 이것에 제가 제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가벼움으로 공명하는 그 때.

그리고, 더이상 출석부에는 없는 학생들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언젠가의 가을과 겨울을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보냈던 얼굴들.

- 괜찮아요? 잘 지내지요?  mind

*세로토닌: 기분과 욕구, 기억을 일정 수준 유지시켜주는 뇌 내 신경전달물질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대한뇌기능매핑학회 대의원 및 학술위원, 한국인지과학회 총무이사. 정신병리 및 심리치료의 효과를 임상과학 및 뇌신경학적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연구를 지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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