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사라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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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사라진다는 것
  • 2019.11.22 18:17

어제 한 TV드라마가 종영하면서 '행간'이 검색어 1위에 오르는 기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한 배우의 대사 중 '너는 행간이 없잖아'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었죠. 이때문에 행간이 없다는 표현이 무슨 뜻이냐는 그룹과 행간을 왜 검색해보고 있냐는 그룹이 잠시 나뉘기도 했었죠.

몇주전 마인드지의 발행인이신 최영진 교수님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던 중 '그분이, 몇 해 전 자진하셨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전화를 끊고나서는 한참동안 '자진하셨다'는 표현을 들은 것이 실로 몇 년만인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자살'이라는 단어는 심리학자들에게는 그저 '자살' 혹은 '자살로 인한 사망*'일 뿐이었으니까요.

오늘은 또 다른 교수님께서 '혹시 집에 애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또 다시 그 '애사'라는 단어를 듣거나 써 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너는 사람이 단순하잖아' 라든지 '자살' 혹은 '나쁜 일' 처럼 보다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그 대상을 드러내는 단어들보다 수년만에 듣게된 '행간이 없다', '자진', '애사' 라는 표현들은 어쩐지 그 일의 관계자나 청자에게 묘한 보호막을 제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말의 실용적 기능을 최대한 빨리 익혀야 했던 학위과정 중에는 그러한 단어들을 품을 새가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직접적인 임상장면을 떠난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제게 아이가 몇 살이에요? 물으면 여전히 '6세 남아요'하고 답하는 것은, 정보에 대해서만 명료히 기술하는 것이 익숙해져있기 때문이었죠. 제가 그리 말하면 임상하는 동료들은 그렇구나 받아들이고 비임상의 지인들은 무슨 표현이 그러냐며 타박을 주기 일쑤라서 그 온도차도 참 재미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보고 '픽' 웃고 있다면 임상하는 분..).

말은 태생적으로 그 기능이 중요하기에 무엇보다 정확한 정보전달이 우선적인 덕목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SNS를 사용하게 되면서 말의 호흡은 더욱 짧아졌습니다. 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일단은 던져두기에 적합한 공간들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연구자들 입장에서는 인공지능 번역기의 등장 이래로 '지금의 번역기 수준이 알아듣는' 협소하고 경박한 수준의 단어만을 이리저리 조합하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단어나 표현을 정교하게 변주할 일은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점차 기능적인 수준의 단문만을 다듬는 과정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말의 세상이 점차 좁아지는 느낌에 아연할 때가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형태나 세대와 시대가 바뀌며 말의 형태와 기능은 자연스럽게 바뀌겠지요. 사용되지 않는 단어는 그 나름의 이유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건 좀 아쉬울 것도 같습니다. 조금 더 우아하고 세련되게sophisticated 삶의 단면들을 표현할 수 있었던 단어들이, 사라지는 줄도 모른채 사라지는 것은요. mind

*자살완수, 자살완료, suicidal completion, suicide completion, completed suicide라는 단어는 최근 쓰지 않는 추세입니다. 은연 중에 긍정적인 뉘앙스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완료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임상심리학회 홍보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대한뇌기능매핑학회 대의원 및 학술위원. 정신병리 및 심리치료의 효과를 임상과학 및 뇌신경학적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연구를 지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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