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I에 대한 소견: 나에게는 모를 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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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에 대한 소견: 나에게는 모를 권리도 있다
  • 2019.12.04 09:25

어떤 정보화 시대의 단상

페이스북을 가끔씩 하는 한 사람이 있다. 요즘 스마트폰 알람이 자주 울린다. 찾아보면 페북에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되었단다. 확인해 보면 모르는 사람이다. 알던 사람이었는데 기억을 못하는 걸까?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걸 보고 있지? 이뻐 보이기는 하네. 사진을 보니 어디 놀러가서 찍은 것 같은데 거기는 어딜까 궁금하기도 하다. 근데 어쩌라고. 나는 궁금하지 않단 말이야. 왜 이런 것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지. 그냥 확 없애버릴까 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왜 다른 SNS는 안 하냐고, 요즘 같은 정보화 세상에 그렇게 고립되어서 살면 안 된다나... 하지만 그는 뭔가 싫다.

그 사람은 원래 '깨톡'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요즘 이걸 안 하면 따로 문자나 전화로 연락을 해야 하니 셋 이상 간에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필수다. 그것이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마찬가지다. 사회생활을 위해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도 시도때도 없이 알람공격을 해 댄다. 단톡방 인원이 적으면 그나마 효율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인원이 많고 그 중 글을 자주 많이 올리는 사람이 몇 사람만 되어도 정신을 못 차린다. 처음엔 신기하기도 했지만 지친다. 내 스타일이 아니다. 어떤 단톡방은 더 이상 유지 이유가 없어 방을 나가면 누군가가 또 초대하고 나가면 또 초대하고... 피곤하다.

19세기말 파리에서 활동했던 호주 화가 루퍼트  버니의 작품이다. Rupert BUNNY (1864~1947), 'Chattering', c. 1908, oil on canvas, 60.5 × 73.3 cm,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수다를 떨고 있는 두 여인에게 TMI는 어느 정도일까? 19세기말 파리에서 활동했던 호주 화가 루퍼트 버니의 작품이다. Rupert BUNNY (1864~1947), 'Chattering', c. 1908, oil on canvas, 60.5 × 73.3 cm,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하늘에서 정보가 빗발친다

요즘 'TMI'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Too Much Information'의 약어인데 원래 영미권에서는 상대방의 지나친 성적 농담 따위에 대해 '내가 그딴 걸 왜 듣고 있어?'라는 뜻의 비꼬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TMI가 우리나라에서는 사족蛇足에 해당되는 인터넷 통용어로서 ‘too much talk’의 의미로도 쓴다. 적당한 설명은 좋다. 아니 설명은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도 상대방을 봐 가면서 해야지. 서설(서론)을 지나치게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든가 상대방이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위주로 대화를 점령해 버리는 사람은 정말 힘들다. 내가 여유가 있을 때는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다. 그런데 참을성이 1일 권장량을 넘어 한계치까지 바닥나 버린 상태에서는 나 또한 이른바 'Too Much Anger'를 보여주게 될 수도 있다.

최근 가족 모임에서 친정 어머니와 딸, 그러니까 조손 관계를 관찰한 적이 있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만난 손주의 근황이 궁금하여 이것 저것 물어보고 인생의 팁을 전수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대화가 아닌 잔소리가 되고 말았다. 그에 대한 손주의 반응은 말하자면 TLI(Too Little Information)(?)였다. 세대차이, 가족의 붕괴, 해체 등의 이유를 끌어올 것까지는 없고 가족 간에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데다가 자주 만나지 못한 탓이다. 즉 공유점이 적고 라이프 스타일이 너무 달라져 있는 것이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은 알겠지만 다르다는 이유로 소통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 여유가 없다. 조금만 길어져도 조금만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이면 참지를 못한다. 그런 내가 또 누군가에게는 참을성을 요구하며 TMI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다들 '제발 내 얘기만 들어줘'라고 아우성치는 듯하다. 상대방이 실제로 TMI를 하는 것인지 내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또는 이런저런 이유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TMI로 받아들이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잘 들여다 보면 대인관계에서 말하는 양이 1/n인 경우는 없다. 주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관계가 있고, 이야기를 주로 또는 많이 하게 되는 관계가 있다. 그러다 보면 누구에게는 TMI를 주고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TMI를 받게 되고... 이런 식으로 해서 1인당 평균적으로 말하는 양은 비슷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일상적인 관계에서의 TMI쯤은 참아줘도 사실 손해보는 것은 없을 듯 한데…

이처럼 TMI도 TLI도 그 양적 기준을 명확하게 설정하기 어렵고 만나는 상대방과 처하는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라면 결국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리라. 요즘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유로 피곤하단다. 일일이 그 피곤의 이유를 찾아내어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아니 잠깐 동안이라도 나에게 있는 모를 권리를 한 번 행사해 보는 것은 어떨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때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이라 해도, 의존적인 사람이라 해도 혼자만의 시간이나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어색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그런 시간을 좀 가져보았으면 한다. 약간의 심심하고 무료함(boredom 또는 권태로움을 느껴보자. 이럴 때야 말로 정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저절로 충전이 되며 그러다 보면 주변 사람들의 TMI가 슬슬 그리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시간을 혼자 누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자. SNS나 메신저가 필수라고 하지만 SNS를 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자. 누군가는 알 권리를 주장하지만 또 누군가는 모를 권리를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자. 이렇게 사람들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자.

김근향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너무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꿈을 심리학자로 정해버려 별다른 의심 없이 그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그 여정에서 다시 태어나면 꼭 눈에 보이는 일을 해 봐야지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심리학 대세론에 선견지명이 있었다며 스스로 뿌듯해 하며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어 본다.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 생생한 삶 속에서 심리학의 즐거움과 재미를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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