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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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 2019.12.18 15:50

불안러들은 타고난 불안러인 사람들을 잘 알아봅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불안 높으신 분들은 저를 보시고는 쉽게 같은 파장을 눈치채고 말을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불안의 싱크synchronization가 맞아서 같은 파동은 증폭되고 더 큰 파동으로 함께 단체 줄넘기를 하듯 움직이지요..

저는 여름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켜둡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아 왜 그런지 알겠어요 혹은 어 저도 그래요,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처럼 찐 불안러들이지요. 여름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려고요?라고 되묻는 분들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성정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름에 캐럴을 듣는 분들은 이미 연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벌써 일년의 반이 지나갔음을 계속해서 본인에게 주입하는 것이지요.
지금 여름이라 좋아? 이제 금방 추석이라 하고 - 금방 커피숍에서 캐럴 나오면 - '자 새해 카운트다운 시작합니다!' 할 걸!

어제는 제가 썼던 책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가 뭔가 추후 대외적 활동을 위한 발판이 아니었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쩌다보니 책이 세종도서와 예스24 올해의 책에도 선정되었습니다 ㅜㅜ 감사합니다..). 그런데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그 책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 쓰인 책입니다. 사실 제 불안의 일환으로 나온 결과물이었거든요. 여러 불안에 치받혀 뭔가 세상에 남기는 말을 적고 싶었던 것이었죠. 건강염려증(=질병불안장애)도 기여했고요. 건강염려증은 꽤 흔하기에 많이들 이게 무슨 기분인지 아시겠지만, 괜히 금방 뭔가 큰 일 날 듯 굴잖아요. 마음 속으로 쓸데없이 신변 정리를 한다던가..

오늘은 (어제 종강 이후, 말하자면) 방학 첫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그간 밀린 여러 일들을 하고 있는데 문득, 아 이렇게 방학이 끝나면 연구는 언제 하지? 하는 생각에 또 방학 하루 남긴 사람처럼 불안해졌습니다. ??..이제 방학, 첫날인데요..??

 

무능력, 결핍, 단절, 무의미, 불충분, 부족, 거절, 무시, 불확실성, 실패, 취약함, 나약함, 배제, 죽음, 모욕, 손상, 노출, 유기, 불안정, 부족함, 장애. 한두 단어만으로도 쉽게 촉발되는 불안감들.

 

다행인 것은, 이제는 불안이 나를 잠식하는 순간이 와도 그 생각들이 저의 생산성을 멈추게 하거나 혹은 저를 비참하게는 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 불안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또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지그시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낄낄대면서요.
가장 좋은 주문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였고요.

이러다보니 여름내 캐롤을 듣다가도 12월 1일에는 '1년의 12분의 1이나 남았어!' 할 수도 있고, 오늘처럼 방학 끝날처럼 광광 울다가도 '1년의 24분의 1이나 남았어!'하며, 혼자서만 속시끄러운 변덕스러운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어쨌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속도는 빨라졌으니까요. 저는 일단 이렇게라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불안은 나를 순식간에 미래의 아무 순간으로 데려다 놓습니다. 이 고약한 불안이 권하는, 원치않는 시간여행을 언젠간 거부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싱크를 맞추어 단체 불안 줄넘기를 하던 우리들은 어느순간 함께 줄넘기 줄 자체를 홱 나꿔채어 바닥에 내팽개치고 흙바닥에 뒹굴며 낄낄 웃을 수도 있겠지요.

2019년의 12월 18일이지만, 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괜찮습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대한뇌기능매핑학회 대의원 및 학술위원, 한국인지과학회 총무이사. 정신병리 및 심리치료의 효과를 임상과학 및 뇌신경학적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연구를 지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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