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소비의 전제조건, 차이역을 확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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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소비의 전제조건, 차이역을 확인하라
  • 2020.01.08 08:00
기계식 시계는 무척이나 비싸다. 그러다 보니 이 제품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신화와 오해가 가득하다. 분명 매우 저렴한 수준의 기계식 시계가 존재한다. 과연 이런 것들은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 심리학자의 시계 이야기, 그 세 번째.

값비싼 시계, 제2의 신분증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는 유일한 도구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지 오래다. 아무리 값비싼 시계를 가진 사람도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을 때는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게 된다. 시계가 필수품의 범주에서 이탈되면서 생긴 새로운 문화는, 완전히 변화된 시계의 역할이다.

시간을 확인하려는 고객이 사라진 이 시장에 불어닥친 변화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시계가 극단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주로 중저가 시장용 상품에서 이런 변화가 두드러졌다. 이 내용은 언젠가 다시 다룰 날이 있을 것이다. mind가 시계 연재를 하지 말라 권고하지 않는 한… 

또 다른 흐름은 초고가 명품 아이템으로 포지셔닝된 시계의 위치이다. 전통적인 롤렉스, 오메가, 까르띠에 같은 명품 브랜드 외에도 우리는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브랜드의 이름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시계의 가격이 웬만한 고급 수입 승용차 이상이라는 것도 이제는 상식이 되어 버렸다. 그 사람의 손목에는 이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신분을 나타내는 제 2의 신분증이 둘러진 것이다.

Tommaso Manzuoli, 1531–1571. man holding a watch’,1558, Oil on wood panel. © Science Museum.
시계는 개인적 소유가 가능해진 순간부터 부유함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Tommaso Manzuoli, 1531–1571. man holding a watch’,1558, Oil on wood panel. © Science Museum.

시계가 신분을 나타내 주는 주요한 아이템이라는 것은 남성들에게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여성들과 달리 브랜드를 명확히 특정할 수 있는 패션 아이템으로 시계를 대체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결혼이라는 민족 최대의 과소비 축제(?)를 명분삼아 롤렉스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자신에게 선물을 준다는 미명하에 자기 한 달 월급을 가볍게 뛰어넘는 명품 브랜드들의 엔트리급 시계들을 수집하느라 광분하는 영혼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계들의 공통적 특징은 기계식 무브먼트를 통해 동작된다는 점이다. 스위스의 한 유서 깊은 시골 마을에서 루페(시계 수리할때 눈에 착용하는 일종의 돋보기)를 착용한 노신사의 손에서 탄생하는, 보석과도 같은 기계식 시계만이 신분증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계의 가치를 어떻게 알게 되는가?

불행히도 우리가 기계식 시계의 가치를 알 방법은 거의 전무하다. 가치를 학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조작적 조건형성의 원리에 따라 하나하나 각 브랜드의 시계를 사보는 것일 거다. 그러다 보면 보상을 받을 때와 처벌을 받을 때가 생길 것이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무엇이 좋은 시계인지를 체험할 것이다.

문제는 그러기엔 세상에 시계가 너무도 많은데다가 시행착오를 허락할 만큼 가격이 만만치도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안적 학습도구로 모델링을 사용한다. 블로그와 커뮤니티와 유튜브에 가득한 시계 리뷰를 보면서 무엇이 좋은지를 대리학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여기서 활동하는 리뷰어들이 하는 이야기들 중 내 결정에 큰 도움을 주는 이야기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나도 이 분야에 초기 입문을 할때는 다들 무엇을 추천하는지에 집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세계에 뻔한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세계 시계 1위는 파텍필립이고 2위는 오데마 피게고, 역시 전통의 명기는 롤렉스고... 하나같이 무슨 국제기구에서 정한 시계 순위라도 있는 양 똑같은 말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숭상해 마지 않는 ‘계급도’. 이곳도 그것이 지배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인간의 계급도 없어진 이 시대에 시계의 계급도가 웬말인가?
인간의 계급도 없어진 이 시대에 시계의 계급도가 웬말인가?

과학자의 마음으로 계급도를 돌아본다

그러나 난 이 리뷰어들의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심리학자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시계는 비싸다. 고급시계는 더더욱 비싸다. 그러다 보니 리뷰어들도 직접 사서 체험해 볼 수 있는 시계의 폭이 매우 좁다. 이 친구들 역시 없는 재산을 쥐어 짜내면서 계급도 '상'의 히트 아이템 몇 개를 간신히 구해서 우리에게 자랑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삶을 통해 검증한 진리가 아니라, 누가 만들어 준 작위적인 계급도의 세계를 우리에게 주입시킬 따름이었다. 이쯤 되면 스스로는 한번도 검증해 본 적 없는 방대한 세상의 지식을 마치 모두 이해하고 있는 양 떠들고 있는 입시 강사들과 다를바 없다. 난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 학문하는 사람, 언론인, 비평가가 필요한 이유는 모든 것을 검증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스스로 엄격하게 검증한 사실들을 전해야 하기 때문일 거다. 뜻한 바 없었지만 무슨 팔자인지 나는 이 길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누군가가 정해준 근거없는 계급도가 아니라 내 경험을 통해 검증한 시계의 가치를 전하는 여정을 시작하고야 만 것이다.

기계식 시계 가치의 절대역

지각심리학에서는 감지 가능한 가장 작은 단위의 자극을 절대역absolute threshold이라고 부른다. 시계 소비에 직접 적용될 개념은 아니지만 나는 나를 만족시킬 가장 최소의 요소를 가진 기계식 시계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 소비의 절대역인 것이다. 

발렌티노루디 VR6607 화이트와 로즈골드의 조합이 아름답다.
발렌티노 루디 VR6607. 화이트와 로즈골드의 조합이 아름답다.

그 존재는 국내기업 도우덱 인터내셔널이 판매하는 ‘발렌티노 루디Valentino Rudy’라는 브랜드의 기계식 시계였다. 충동적으로 샀던 스와치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다가 모바일 중고거래 앱에서 교환하게 된 물건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이 브랜드는 마치 이탈리아 브랜드인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전형적인 ODMOriginal Design Manufacturing: 생산자 개발방식의 브랜드이다. 그럴듯한 패션브랜드의 이름을 따와서 국내의 중소기업이 디자인을 하고 중국이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텐디, 레노마, 가이거… 셀 수도 없이 많은 브랜드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직접 내세울 수 없는 국내 시계회사들의 작품들이다. 브랜드의 가치를 깨닫고 키워내지 못한 우리나라 산업계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발렌티노 루디 하트비트 체험기

내가 손에 쥔 모델은 VR6607. 화이트 다이얼에 마치 피부색 같이 연한 로즈골드의 베젤과 로만 인덱스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제품이었다. 아주 품격 있는 디자인이라고 하는 건 분명 무리가 있지만 어디서나 눈에 띄는 화려하고 예쁜 디자인이다. 더구나 발란스휠을 노출시켜 시계의 회전을 감상할 수 있게 한 하트비트 디자인으로 인해 누가봐도 오토매틱임을 명확히 해주는 점도 이 시계의 강점이다.

싸구려티가 나지 않는 메탈밴드의 부드러운 질감도 매력을 더해주고, 저가임에도 일본 세이코사의 무브먼트를 탑재하여 핵기능(용두를 뽑았을때 시간을 멈추어 주는 기능)과 수동감기 기능을 모두 지원해 준다. 이쯤 되면 세이코의 저가 오토매틱 시계들보다도 '스펙'이 좋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시계는 아니었다. 작은 용두는 손에 잘 잡히지 않아서 잡아 뽑는데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했고, 수동감기는 허공에 다이얼을 돌리는 부실한 감각을 전해줬으며, 사파이어 코팅만 한 미네랄 글래스는 언제나 유리의 기스를 걱정해야 했다. 세이코 저가 무브먼트답게 실제 시간보다 힘차게 달려나가는 시간오차로 인해 이놈의 시간은 쿼츠무브의 동료들보다 언제나 5분 이상 앞서곤 했다. 수시로 시간 재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엔드피스 없이 체결되는 메탈밴드는 본체와의 일정한 틈을 벌리게 한다. 이게 가죽 줄일 때에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브레이슬릿이 이런 상태로 달려있으니 뭔가 크게 허전함이 밀려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절대역의 확인, 탐험의 시작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이 시계는 처분하였다. 외모를 보면 아깝다가도 안 맞는 시간을 보면 정리의 결단이 서던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분명한 수확은 20만원대 미만(정가는 48만원으로 써 있으나 이 가격에 시계를 파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이런 식의 가격정책은 브랜드의 신뢰도만 추락시킬 뿐이다)에 만족하고 착용할 기계식 시계를 발견했다는 데 있다.

이제 내 탐색의 절대적 기준이 확립되었다. 발렌티노 루디 하트비트보다 더 저렴하지만 부족함 없는 품질과 디자인을 보여주는 시계가 있다면 이는 가성비의 제왕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시계를 일종의 팔찌로 생각하지만 기계식의 감성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속칭 시알못)에게는 당연히 발렌티노 루디 혹은 그보다 낮은 가격으로 감지할 수 없는 품질을 제공하는 시계들을 추천할 것이다. 이 정도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찾고 싶은 다음 시계는 적어도 이 시계보다는 정확한 시간오차와 조작감, 품격있는 디자인이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히 이 시계보다는 낫다는 최소식별차이just noticeable difference를 줄 수 있는 제품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추가 비용을 얼마나 투자해야 하는가가 내 다음 도전과제가 될 것이다. 몇 배의 가격을 받고도 만일 이 시계와 식별할 수 없는 품질과 디자인을 보여준다면 그 제품은 내가 당당히 ‘쓰레기’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탐험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약 없는 싸움이다. 시계의 세계는 이 우주의 크기만큼이나 넓다. 물리적으로 넓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시계를 구매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내 재화를 고려하면 내가 이 우주의 끝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지만, 무척 저렴하면서도 분명히 만족할 수 있는 어떤 제품을 찾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그 정도면 족하다. mind

최승원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덕성여대 심리학과 부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학은 반드시 생물-심리-사회적 접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기에 언젠가는 심리학이란 이름보다 더 발전적인 개명이 필요하다고 믿는 심리학자. 상담센터와 정신과병원을 거쳐 대학에 와있는 이분야 진로탐험의 교과서적인 인물이나 진로상담보다는 괴팍한 연구자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람. 기분장애와 B군 성격장애가 주요연구관심분야이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떤 곳에서든 최선을 다할 멀티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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