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은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아주 어린 시절 암기했던 시 중에서 유독 아직도 일부 암송이 가능한 시가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이다. 통상 이 시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 받고자 하는 소망을 표현하는 시로 이야기를 하는데 본 저자는 다소 엉뚱한 연결을 해보았다.
김춘수 시의 심리학적 해석
며칠 전 뉴욕타임즈에 실린 ‘Go Ahead and Complain. It Might Be Good for You’라는 글을 읽다가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기사의 내용은 부정적인 감정을 쌓아두는 것은 좋지 않으니 전략적으로 잘 분출해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는 다분히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오히려 김춘수의 시를 떠올리게 한 내용은 ‘당신이 무언가를 하면 할수록 당신의 뇌에서는 더 많은 경로들이 확고하게 형성되어서 그 일을 더욱 더 많이 하게 된다’는 Grice라는 연구자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었다.
이는 우리 뇌가 가진 가소성(plasticity)이라는 특성을 설명한 것으로, 뇌과학에 약간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연구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구절들을 심리학 이론들과 연결시켜 보니 매우 잘 연결이 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뇌에 새로운 자극을 주어서 새로운 경로를 만드는 것이며 이 경로를 ‘꽃’이라고 연결하는 것이 큰 억지는 아닌 것 같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구절은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것의 의미로 연결시킬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기사에서는 불평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정적 영향만 주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친밀하게 하고 스트레스와 좌절을 잘 처리하게 해주는 순기능도 있음을 강조하였다. 내가 느끼는 현재의 부정적 감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빛깔이고 어떤 향기인지를 정확하게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우리 뇌에서는 그 빛깔과 향기에 맞는 새로운 기능적인 경로 ‘꽃’을 만들어 낼 것이다.
내면에서 막연한 부정적 감정의 덩이들이 쌓여 있으나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분화된 부정적 감정은 기존에 형성된 매우 익숙한 부정적 경로를 활성화시키면서 우울, 좌절과 무력감으로 이어지거나 충동성과 연결되어 자해 등과 같은 역기능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 감정에 이름을 불러 주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한 해를 보냈다는 안도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고 많은 일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내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들을 그냥 눌러 두지 말고 그 감정들에 눈길을 주면서 ‘이름’을 불러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된다. 내 뇌 안에서 아름다운 ‘꽃’들이 풍성해 지면서 내 삶이 조금씩 더 행복해 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mind
<참고문헌>
- Higgs, M.(2020. Jan, 6). Go Ahead and Complain. It Might Be Good for You. Retrieved from https://www.nytimes.com/2020/01/06/smarter-living/how-to-complain-.html?fbclid=IwAR3qzTJBPHpAGgcstBlYWx9_Aako0VX0-kAgPIOjmqFpYFmaLItEN8O3Gb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