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이라고 고개부터 내젓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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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이라고 고개부터 내젓지 말고
  • 2020.02.12 10:00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미국제품은 고급품의 대명사이자 상징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대에게 미국제품은 돈 내고 사기 어려운 제품에 가깝게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시계 시장에서도 미국산에 대한 악평은 자자한 편이다. 그렇다면 미국 시계는 과연 구매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Made in USA에 대한 편견

10년이 조금 되지 않은 시절의 일이다. 박사 후 과정을 미국의 한 도시에서 시작하게 된 나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교통수단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동네 한국 유학생들이 목빠지게 기다리는 젊고 어여쁜 여학생은커녕 늙수구레한 몰골(?)로 등장한 한국인 아저씨가 주변 학생들에게 교통편을 부탁하는 것은 상도에 어긋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값싼 중고차 하나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나는 또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미국에 온 이상 미국차를 타고 싶다는 나의 취향은 일본차 절대주의(신기하게도 미국 사는 교포들의 상당수는 그런 것 같다)를 신봉하는 한인교회 전도사님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분의 생각에 미국차란 인간이라면 쳐다도 보지 말아야 될 금기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분의 차를 타야 매장에 갈 수 있는 나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혼다의 쿠페를 구입하게 되었다. 이것이 미국 제품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접하게 된 첫번째 경험이었다.

편견을 넘어서는 길

시계의 세계에도 또 다른 편견의 장벽이 존재한다. 아마 좋은 시계 하나를 사고 싶다고 주변에 조언을 구한다면, 시계 좀 안다는 사람의 아마도 70퍼센트는 스위스 메이드 시계가 아닌 것은 거들떠도 보지 말라고 할 것이다. 독일시계나 일본시계에 대한 평가도 박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매니아에게 미국시계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역인가 보다. 기계식 시계의 초창기를 빛냈던 브로바, 해밀턴, 타이맥스 등이 모두 미국 브랜드라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뿌리깊은 편견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심리학은 접촉contact의 힘을 강조한다Capozza et al., 2014. 인종 간의 갈등과 편견도 결국 반복된 만남을 통해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인과성을 현실에서 검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실험실이라는 제한적 상황에서 접촉이 외집단을 보다 인간적으로 지각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확인한 경우도 존재한다Capozza et al., 2017. 그렇다면 심리학을 통해 세상을 보다 합리적인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내가 선택할 행동은 바로 접촉이었다. 두렵지만 미국시계와의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한 개가 마음에 든다면 두 번째의 구매시도, 그리고 세 번째... 이렇게만 지속된다면 나는 특정국가 제품에 대한 부정적 태도 일반화를 극복한 영웅이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Timex는 미국역사와 함께하며 지금까지 생존한 전설적 기업이다
Timex는 미국 역사와 함께하며 지금까지 생존한 전설적 기업이다.

첫 번째 도전, 그리고 대참사

문득 인터넷 신품 매물로 타이맥스 제품이 파격적인 가격에 등장하였다. 고민할 것도 없이 구매과정을 마쳤다. 구입한 제품은 정가 145천원의 타이맥스 TW2P58800, 물론 정가의 반도 안 되는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가죽밴드 색깔과의 통일성이 빛나는 옅은 브라운 계통의 다이얼 색상으로 빈티지 시계의 감성을 현대에 재현한 것이 눈에 띄는 제품이었다. 약간 거칠게 바느질된 가죽밴드의 스티치와 과잉 폴리싱된 케이스가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타이맥스만의 전매특허인 다이얼에 들어오는 인디글로 조명과 50미터 방수성능만으로 내 필요사항은 모두 충족한 것이었다. 둘레길을 통해 산을 걸으며 출근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에게는 저렴하면서도 강하고 방수성능이 있으며, 어두운 곳에서도 시간을 알 수 있는 시계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타이맥스는 내 대표 필드시계로 재탄생할 운명이었다.

타이맥스 TW2P58800. 보기에는 소박한 중저가 시계지만 버튼을 누르면 다이얼에서 빛이 발생하는 인디글로 시스템은 타이맥스의 자랑이다.
타이맥스 TW2P58800. 보기에는 소박한 중저가 시계지만 버튼을 누르면 다이얼에서 빛이 발생하는 인디글로 시스템은 타이맥스의 자랑이다.

문제는 트래킹 복장을 챙기고 타이맥스와 산길에 들어서는 첫날 발생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시계의 초침이30초에서 더 이상 상승하지 못하고 끙끙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 제품에 다른 문제가 있을 것인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상태, 배터리 방전으로 결론을 내리고 가장 가까운 시계방에서 배터리 교체를 의뢰하였다. 타이맥스는 전용 공구가 필요해 교체에 시간이 필요하단 사장님 말씀에 시계를 풀고 다시 산길로 향하며 티이맥스 필드시계의 데뷔전을 다음 날로 연기할 수밖에 었었다.

다음 날 배터리를 교체하였지만 얼마지 않아 다시 마의 30초 구간에서 초침을 올리지 못하고 움찔거리는 모양을 반복했다. 중력을 거슬러 초침을 올리기엔 무브먼트의 무언가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발길을 돌려 한 시간 거리의 서비스센터에 시계를 맡기고 거의 열흘이 다 되어 고쳐진 시계를 받아들게 되었다. 진단명은 무브먼트 불량. , 무슨 쿼츠 시계가 고장이 다 난단 말인가. 물론 수리 후에 더 이상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불신과 편견의 일반화

시계를 고칠 때까지 발품을 팔며 무더운 여름을 보낸 기억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타이맥스라는 브랜드에 대한 불신, 더 나아가 미국 브랜드에 대한 불신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보통 외국인이나 다른 인종에 대한 불신과 차별도 비슷한 과정으로 시작된다. 어렵게 만난 한두 명의 외집단 구성원에 대한 부정적 경험이 이들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확산된다. 물론 이런 부정적인 편견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내 경험을 그들 전체가 아닌 내가 만난 한 개인의 문제로 개인화하는 것이다Albarello & Rubini, 2012. 그러나 이런 인지적 작업이 타이맥스에게, 그리고 미국 제품에게 받은 나의 실망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할까? 적어도 인종편견과 관련된 문헌들을 보면 이 방법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지난 60여 년의 연구를 통해 외집단 편견의 해소에 가장 적절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심리사회적 개입은 역시 접촉인 것이다Pettigrew & Tropp, 2006. 그저 이 모델 하나가 혹은 이 제품 하나가 불량이었을 확률을 고려하여 나는 추가적 구매를 해 보아야 한다.

편견 해소, 이렇게나 어렵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이 브랜드의 시계를 다시는 사지 않기로 결정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믿고 거르는브랜드가 된 것이다. 분명 타이맥스는 존경받을 만한 기업이다. 시계 시장처럼 생존하기 어려운 격전장에서 아직까지 그 거대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명성은 보통 저렴한 가격과 상대적으로 다양한 디자인으로 쌓인 것이다. 시계 커뮤니티에서 타이맥스의 조악한 품질관리에 대한 글을 찾기는 그닥 어렵지 않다.

굳이 많은 사람들의 경험도 모델링이 가능한데 내가 추가적인 구매를 해야 할 필요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부정적 소문에도 한 번 기회를 준 것으로 충분하다. 미국계 시계 브랜드 모두에 대한 편견을 가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다른 브랜드를 체험해 볼 것이다. 그렇다고 이 브랜드를 다시 구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편견의 극복을 위해서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외집단을 열린 마음으로 만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편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 또한 외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자신들의 좋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로 세계 곳곳에서 중국인 혐오 분위기가 포착되고 있다.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친절하고 정직했던 중국인에게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집단 광기에 쉽게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낯선 이웃에게 최선을 다한 친절을 배풀어 보자. 그게 편견을 넘어 세계 평화에 다가가는 첫걸음일 것 같다쌍문동에서 최승원. mind

   <참고문헌>

  • Albarello, F., Rubini, M. (2012). Reducing dehumanisation outcomes towards Blacks: The role of multiple categorization and of human identity. European Journal of Soccial Psychology, 42. 875-882.
  • Capozza, D., Di Bernardo, G. A., & Falvo, R. (2017) Intergroup Contact and Outgroup Humanization: Is the Causal Relationship Uni- or Bidirectional? PLoS ONE 12(1): e0170554. doi:10.1371/journal.pone.0170554.
  • Capozza, D., Falvo, R., Di Bernardo, G. A., Vezzali, L., & Visintin, E. P. (2014). Intergroup contact as a strategy to improve humanness attributions: A review of studies. TPM-Testing, Psychometics, Methodology in Applied Psychology, 21. 349-362.
  • Pettigrew, T. F., & Tropp, L. R. (2006). A meta-analytic test of intergroup contact theory.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90(5), 751.
최승원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덕성여대 심리학과 부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학은 반드시 생물-심리-사회적 접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기에 언젠가는 심리학이란 이름보다 더 발전적인 개명이 필요하다고 믿는 심리학자. 상담센터와 정신과병원을 거쳐 대학에 와있는 이분야 진로탐험의 교과서적인 인물이나 진로상담보다는 괴팍한 연구자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람. 기분장애와 B군 성격장애가 주요연구관심분야이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떤 곳에서든 최선을 다할 멀티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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