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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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변주
  • 2020.02.24 10:35
살색과 녹색으로 채워진 얼굴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듣기에는 매우 이상해 보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멋있게 보인다. '색의 변주'라고 불리는 이 유화 기법 속에 숨어 있는 지각 심리학의 비밀을 알려준다.

화가들은 반사광까지 표현한다

유화를 취미로 배우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런데 몇몇 기법들은 그들이 배우기에 버겁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반사광 처리' 혹은 '색의 변주'라고 할 수 있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사실 전공자라도 설렁설렁 배우면 구사하기 어려운 기법이다. 이 기법은 인상주의 그림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가령 세잔Paul Cézanne의 『자화상1875』을 보면 파란색이 많은 배경을 뒤로 하고 있는 세잔의 이마와 눈 주위가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생뚱맞은 색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모습이 어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그 정도로 이마나 눈가의 파란 색이 자연스럽다. 아마도 이 파란 색은 배경의 파란색이 반사된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인상주의 화가들이 워낙 빛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떡여지는 대목이다.

Paul Cezanne(1839~1906), 'Self-Portrait', 1875, Oil on Canvas, 64 x 53 cm, Musée d'Orsay, Paris.

현실에서는 유심히 보지 않는 이상 쉽게 지각하기 어려운 반사광을 화가들은 빠트리지 않고 표현하려 애쓴다. 사실감 때문만이 아니다. 반사광을 표현하면 각기 따로 놀기 쉬운 그림 속 다양한 대상들이 서로 일체감을 갖게 된다. 녹색 잎으로 둘러싸인 빨간 장미 그림을 생각해 보자. 녹색과 빨강이라는 두 보색은 심리적으로 서로를 밀어내는 보색이다. 그래서 함께 쓰면 요란스럽고 자극적이다. 빨간 장미와 녹색 잎의 그림도 그럴 것이다. 장미와 잎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고 각기 따로 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반사광을 표현해 장미에 녹색을 묻히고 녹색 잎에 빨강을 묻혀 두 대상이 공통속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기법이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녹색 잎에 빨강을 묻힌다고 하자. 그 묻히려는 빨강의 밝기가 원래 칠해졌었을 잎의 녹색과 밝기가 유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빨강은 말 그대로 실수로 묻은 빨강 물감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니 이 반사광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색상에 휘둘리지 않고 정확하게 밝기를 지각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이 대목이 쉽지 않다. 빨강과 같은 장파장의 색은 단파장의 색보다 밝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반사광 표현을 넘어 화가의 예술로

이 기법을 '색의 변주'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은 반사광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대상에 새로운 맛을 준다거나 그림 속의 색감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래 그림은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황태자 시절의 일본 새 천황의 모습이다. 좌측 이마나 입 주변은 물론이고 넥타이 매듭 부분의 음영도 모두 녹색으로 맛을 내고 있다. 이 녹색은 반사광처리와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색감을 살린 것이기는 하지만 세잔의 그림과 달리 배경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반사광기법'이 아니라 '색의 변주'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 이 변주의 상상력이 초상화 기술자들의 그림과 다른 그림을 만든다.

'색의 변주'와 시각 정보 처리

'색의 변주' 기법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여러 개의 독립된 통로를 따라 처리하는 시각의 특징과 맞물려 있다. 우리 시각은 망막에 접수된 환경정보를 색채, 윤곽, 움직임과 양안 정보로 분리해 독립적으로 처리한다. 그다음 시각피질에서 이를 하나의 정보로 통합한다.

색채정보처리 통로는 밝기정보를 무시하고 색상정보만 처리하며 해상도가 낮다. 반면 윤곽정보처리통로는 밝기정보를 처리하는데 이 정보를 토대로 밝기대비가 큰 곳을 사물의 모양 파악을 위한 기초정보로 이용한다. 그래서 윤곽정보처리 통로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이 통로는 해상도도 높고 처리 속도도 빠르다. 운동과 양안정보처리 통로에서는 움직임과 공간감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처리한다.

색채의 일탈은 윤곽을 망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얼굴 부위에 피부색과 다른 색이 칠해져 있다 하여도 그 색이 원래 피부색의 밝기와 유사하다면 우리는 얼굴의 모양을 파악하는 데 하등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여기에는 색채정보 통로의 낮은 해상도도 한몫을 하는데 그림 속 두 부위 간 색채 차이가 확연하더라도 해상도가 낮아 주변 색과의 경계면을 정확하게 처리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각에 별 불편함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윤곽에 관한 높은 해상도 정보와의 통합 과정에서 낮은 해상도의 색채정보는 윤곽정보와 부딪히지 않고 윤곽과 일치하는 색이 칠해져 있는 것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화가의 끈질긴 노력이 만난 행운

이런 '색의 변주' 기법을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고안해내었을 리는 만무하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인상주의 이후부터 이 기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반사광을 표현하려다 우연 혹은 실수로 엉뚱한 부위에 엉뚱한 색이 칠해졌고 그 색이 예상외로 잘 어울려 기법으로 자리를 잡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우연 혹은 실수와 만난 사람이 한 둘이겠는가?

행운을 만나도 그것이 행운인 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대부분의 화가들도 새로운 기법의 진가를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자기 확신이 강한 소수의 화가들만이 그 우연의 미적 효과를 깨닫고 걸작을 남긴다. 이 확신은 시각의 원리에 대한 지식과는 무관하다. 화가의 경험과 자기 작품 세계에 대한 강한 소신이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미술심리학이 밝혀낸 기법에 얽힌 시각의 비밀은 유용성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강한 자기 확신이 만들어낸 걸작들을 지각원리와 연결 지어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한다는 점이다. 공허할 수 있는 추상적 비평과는 달리 객관적인 심리학적 평가에는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힘이 붙을 수밖에 없다. mind

지상현 한성대 융복합디자인학부 교수 지각심리 Ph.D.
홍익대 미술대학과 연세대 대학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회화양식style이 결정하는 감성적 효과에 관한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는 한중일의 문화를 교차비교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삼국 미술양식의 차이를 규명하고 이 차이를 결정하는 감성적 기질의 차이를 추정하는 일이다. 관련 저서로는 <한국인의 마음>(사회평론)과 <한중일의 미의식>(아트북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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