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기억상실과 생애 최초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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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기억상실과 생애 최초의 기억
  • 2020.02.15 15:12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유년기 기억상실에도 살아남은, 당신 생애 최초의 기억에 대해.

- 본 글은 서울대학교병원 매거진 <vom>의 겨울호 (1월호)의 칼럼에 실렸던 글의 원문입니다.

- 브금으로 브로콜리너마저의 '잊어야 할 일은 잊어요'도 함께 틀어놓고 읽어주시는 것도 좋겠어요 :)
 

 

유년기 기억상실

당신 생애 가장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임상 장면에서 내담자에게 한 번 쯤 확인하면 좋을 이야기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가장 어릴 때의 기억에 대한 것이다. 이때 보통 사람들은 서너살 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억을한두개 정도 회상해낸다. 초등학교때, 중고등학교때의 에피소드들 갯수에 비해면 형편없는 기억력이다.

유년기 기억상실infantile amnesia은 유년 시절, 보통 만 3.5세에서 4세까지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그 일화들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의 심리학자 패트리샤 바우어Patricia Bauer는 3세 경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실제로 해가 갈수록 아이들의 기억이 차츰 쇠퇴함을 확인하였고 이들이 8세 무렵이 되어서는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듯 보였다고 보고했다. 그는 “7세 경 뭔가 일어났다something was happening at age 7”고 확신했다.  

 

무의식적 방어기제

이러한 시점-특이적인 일화기억 회상실패에 가장 처음으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정신분석학의 선구자이며 대가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였다. 프로이트는 유년기 기억상실을 무의식 수준에서 방어기제가 작동한 결과물로 보았다. 부모의 결함에 대한 반감 혹은 부모에 대한 원초적 욕망과 같이 외부로부터 강력히 처벌받을 법한 생각을 마음에 품었다면, 개인은 이를 의식의 저편으로 보내어 억압한다는 것이다.

 

자의식과 언어의 부재

그러나 사람들이 궁금해했던 것은 왜 유년기 상당 기간의 ‘거의 대부분의 일’들을 망각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후 많은 연구자들은 인지적 시스템이 정비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유년기에는 자의식self-awareness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서술할 수 있는 언어language가 정교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독자적으로 경험한 사건들을 재구성하는 것에 당연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 설명들이 이어졌다. 즉 자기만의 이야기를 서술할 수 있는 여러 인지적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질 때까지의 기억들은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엄마 뱃속에서부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기는 어렵다. 태아가 언어체계나 의미체계에 대한 학습이 전무한 상태에서 -외부의 말소리를 실제 또렷이 듣는 것 역시 극히 어려운 일이겠으나- 사람들의 말소리를 정확한 의미로 이해하고 출생 후에까지 오래도록 그 말의 뜻을 기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상발달의 과정

또한 이러한 기억상실은 정상적인 생물학적 발달과정의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 유아의 뇌에서는 하루에 2,100개에서 2,800개의 새로운 신경단위세포인 뉴런neuron들이 생성되며,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는 이 뉴런들 간의 연결성 패턴 역시 매일 바뀌기에, 이미 생성된 기억이 흐트러지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토론토 아동병원Hospital for Sick Children Research Institute의 신경과학자 폴 프랭클랜드Paul Frankland는, 기억 과정을 담당하는 주요한 뇌 내 영역인 해마hippocampus에 새로운 뉴런들이 생성되는 신경신생neurogenesis 이 유년기 기억상실의 중요한 신경생물학적 요인이라 제안했다. 2014년 사이언스Science지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아기 쥐의 해마 뉴런 생성을 억제하면 오히려 아기 쥐가 어린 시절에 학습했던 정보를 더 잘 기억해냈고, 아기 쥐의 해마가 정상 발달 할수록 과거의 기억과 관련한 뉴런들의 활성화 패턴이 약화되고 변경되며 이전의 기억은 흐려졌던 것이다. 해마라는 뇌 내 구조는 학령기 직전까지 그 발달을 이어가기에, 이러한 기억상실의 기간과도 일치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가지치기pruning가 일어나는 시기이다. 쉽게 말하자면 출생 이후 난해하고 불규칙적인 배열로 무성하게 가지들을 뻗치고 있는 뇌 내 신경망의 방향성과 굵기 등이 정리가 되는 것이다. 정상발달하는 아동이라면, 정보 전달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뇌 내 산만한 오솔길들은 차츰 사라지고, 효과적이며 신속한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는 일반국도와 고속도로가 발달하는 시기를 겪는다. 이때 뇌 내 저장된 정보들은 급격한 변동을 겪는 것이다.

 

망각마저 기억의 형태

그렇다면 우리는 유년기 기억상실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폴 프랭클랜드가 2017년 뉴런Neuron지에 발표한 연구결과와 같이 기억의 진짜 기능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문제해결을 하고 의사결정을 하는데 필요한 인지적 기능을 최적화하는 목적을 갖는다. 세부정보를 손실없이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기억이 아니며, 우선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조망하기 위해 ‘차라리 부적절하고 불필요한 정보는 망각하는’ 그 모든 과정이 기억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하버드 대학Harvard University의 심리학자 대니엘 샥터Daniel Schacter 등 많은 연구자들은 망각마저 ‘잊기를 학습하는’ 기억의 한 형태라 주장한다. 즉 유년기 기억상실이라는 이 당혹스러운 현상은 우리의 뇌와 인지기능을 최적화하기 위해 리셋되는 현상인 것이다.

 

생애 최초의 기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하는 서너살의 기억들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겠다. ‘당신 생애 가장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내담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반 이상은 부정적인 내용의, 적어도 긍정적이지는 않은, 기억들을 보고한다. 나의 경우 가장 오래된 기억은 세 살 무렵 살던 동네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다가 비탈길 아래에 있는 전봇대로 돌진해 심하지 않은 정도로 부딪힌 기억이다. 아주 큰 사건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5만여 시간 동안, 유년기 기억상실의 당연한 통과의례에서 살아남은, 30초 간의 기억이다.

사실 임상가들이 유년기 기억을 회상하도록 하는 것은 그 기억 자체가 궁금하다기보다는, 그 기억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를 파악하려는 목적이다. 즉, 내가 이 기억을 굳이 잊지않고 부여잡고 있는 성격적 특성이 있는지, 한편으로는 이 기억이 나의 성격을 쓸데없이 꾸준히 조성하거나 현재의 문제에 기여하고 있는지 타진하기 위해서다. 즉, 기질적으로 불안이 높은 특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자전거 사고와 같이 공포스럽거나 혐오스러운 기억의 의미를 남다르게 받아들인다. ‘나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곱씹어야 할 사건’. 이 부정적 감정이 뒤엉킨 기억은 순식간에 장기기억에 저장이 되며 누군가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마다 그때의 부정적 경험을 경전을 읽듯 복기하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건 사고의 기억들이 개인의 불안 높은 성격을 꾸준히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도전적인 일은 하지 마, 늘 조심해야 해. 언제 네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아래로 곤두박질 칠 지 몰라. 언제 네가 갑자기 아파질 지 몰라.’하는 메시지들은 그날의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나의 행동과 감정과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어느 쪽이든, 생애 최초의 기억은 내가 차마 놓지 못하고있는 나의 핵심 주제를 반영할 수 있기에 상담 장면에서 이를 들여다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표면적으로는 최근의 일들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지라도, 이 이야기들의 실마리는 어쩌면 가장 처음에 형성된 기억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피암시성을 주의할 것

다만 본인은 생애 첫 기억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타인의 기억이거나 거짓 기억일 가능성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섣불리 자신의 특성을 유년 시절의 희미한 기억에 기대어 정체화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F. Loftus는 간단한 암시를 통해 실제 경험하지 않은 여러 기억들을 유아에게 심는데 성공한다. 그 내용이 얼마나 그럴 듯 한지와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자신이 실제 하지도 않은 일들을 했다고 보고했다.

이런 일들은 상담 장면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내담자의 고통스러운 유년기 기억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제 3자가 그 기억은 착각에서 기반했음을 객관적 증거로 보여주거나 실제로 그런 일들의 개연성이 썩 높지 않다고 판단되는 경우들이 종종 발생한다.

어디에서부터 잘못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필 그 기억이 내담자의 문제나 정체감을 공고화하고 있다면 임상가와 내담자는 한 발 물러서서 이 기억의 실체를 두고 작업할 필요가 있다.

 

맺는 말

유년기 기억상실은 뇌와 인지기능이 최적의 발달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해야 하는 현상이다. 뇌를 한번쯤 리셋할 필요가 있다면 분명 학령기 직전이 최적이리라. 그리고 유년기 기억상실의 터널을 벗어난 한두 가지의 나의 초기 기억들은 나의 성격특성의 산물일 수도 있고, 나의 성격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주는 주요 사건일 수 있다는 점도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이 기억들이 나를 슬프고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이 기억의 그 근거를 새삼 살필 필요가 있다.

우리 뇌는 생각보다 속기 쉬워서, 있지도 않은 일들에 혹은 ‘그 정도는 아닌’ 일들에도 나를 닦달해 댈 때가 있다. 물론 나를 그렇게도 고통스럽게 했던 생애 첫 기억이 실재했던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우리 뇌는 생각보다 속기 쉽다. 정신승리하거나 기만하는 기억을 만들어내시라 권유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과거와 나의 기억이 전적으로 나의 미래로 이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해 나의 뇌를 설득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이 지금의 나에게 여전히 그때와 같은 강도의 영향을 미친다고? 그 정도는 아닐 텐데?’ 하며.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임상심리 Ph.D.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대한뇌기능매핑학회 대의원 및 학술위원, 한국인지과학회 총무이사. 정신병리 및 심리치료의 효과를 임상과학 및 뇌신경학적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연구를 지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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