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기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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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기댈 수 있기를
  • 2020.03.30 01:00
아이가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을 다 막아줄 수는 없지만, 부모 혹은 보호자가 힘든 삶 앞에서 보여주는 익살스러운 표정, 장난스러운 행동, 따뜻한 미소 같은 것들은 아이의 삶을 단단히 지탱해주는 뿌리가 될 것이다.

끔찍하고 무섭다

최근 아동ㆍ청소년 피해자를 포함한 성범죄 및 그와 관련된 대규모 디지털 성범죄가 밝혀져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피해자들을 협박해 불법 촬영을 하고 촬영물을 인터넷 메신저 채팅방에 유포한 범인이 20대 남성이며, 그 성범죄 영상들을 관음하기 위해 해당 메신저에 동시 접속한 사람들이 무려 26만 명이라고 한다. 사람을 물건처럼 여겨 당연히 가성비를 따지고, 욕구를 추구하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에 타인의 존엄을 생각하지 않고, 여성의 인권을 무시한 채 성을 착취하고 매매하는 것을 허용하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역병 코로나보다 실은 이게 더 무섭다.

어떤 아이 엄마의 사례를 접했는데 일상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그럴듯하여 오히려 더욱 소름 끼친다. 초등학생 딸이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문화상품권으로 아이템을 사려고 판매자와 카톡을 했는데, 그 판매자가 학교와 이름을 밝히라 했고, 아이가 결국 구매를 포기하자 학교 홈페이지에 실명을 포함한 부정적인 글을 올리겠다고 협박하며 화장실에서 옷을 벗는 모습을 찍어서 보내라 했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그저 카톡 협박에 불과한 것에 매우 두려움을 느꼈다고 하는데, 다행히 엄마에게 연락해서 도움을 청했고 그 엄마가 달려와서 아찔한 사태를 막았다고 한다.

(c) Salvatore Murdocca, Artist and retired (Magic Tree House) illustrator.
(c) Salvatore Murdocca, Artist and illustrator, 2018.

아이들은 주 양육자에게 다 털어놓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많은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 혹은 다른 주 양육자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제일 무서운 일이나 힘든 일을 말하지 못한다. 어른이 되어서 심리상담을 하게 되면 그제야 더듬더듬 그 기억을 되짚으며 왜 그랬나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는데, 당시에 도움을 청하지 못했던 이유는 말해봤자 별 도움이 안 되거나 오히려 더 속상한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주 양육자가 자기 얘기를 듣고 너무 힘들어할 게 예상되거나, 내 편이 되기보다 오히려 야단칠 것이 뻔하거나, 사실 그 문제를 감당할 능력이 없거나, 혹은 아이의 문제에 별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는 결국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요행히 큰 탈 없이 지나가거나 아니면 그 문제에 짓눌려 버린다. 

아이들이 대단히 이성적으로 계산해서 의논 상대를 정하거나 상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일상생활 중 축적된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연스럽게 그리될 뿐이다. 평소 부부 싸움할 때의 엄마 표정, 자식을 대하는 아빠의 언행, 집안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해결하는 양육자의 태도 같은 것들에 대한 데이터 말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약하지만, 우울한 엄마를 더 우울하게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고, 지친 아빠를 더 지치지 않게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 엄마아빠 대신 자기를 키워준 할머니나 고모가 더 힘들지 않도록 그래서 자기를 계속 돌봐줄 수 있도록 온 힘을 쓴다.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안 무서운 거야"

잠자리에 누워 책을 읽는 딸에게 넌지시 말을 시켰다.

엄마한테 혼날 때 엄마가 화내면 무서워?

응. 

많이 무서워?

뭐 좀 무섭지.

그런데 그거는 세상에서 제일 안 무서운 거야. 알았지?

응?

무슨 말이냐 하면 엄마가 화내서 무서운 거는 세상에서 제일 안 무서운 거라고. 세상에는 무서운 게 많고 어렵고 속상한 것도 많은데, 그거 다 엄마한테 말해도 되는 거야. 엄마는 아무리 무서운 것도 다 들어주고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야. 사실 엄마는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다 말하지는 못했는데, 왜 그랬냐 하면 엄마는 형제가 많아서 할머니가 할 일이 많았고, 또 솔직히 할머니가 잘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너는 엄마한테 다 말해도 돼. 알았지?

딸은 알았다고 했는데, 실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 알았어 책 읽게 말 그만 시켜.”

정말 알아들은 걸까? 다음에 또 말해 봐야지.

그러나 나는 안다. 딸이 무섭고 어려울 때마다 엄마에게 다 말하지는 못할 거라는 것을. 자존심이 강한 아이니까 저 딴에 자존이 걸려 있는 문제는 사실 부모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해결 하려고 애쓸 수 있고, 그러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안다. 저런 얘기를 백날 하는 것보다 내가 내 삶에 의연해야 하며, 딸이 보기에 사는 게 행복하고 즐거워 보여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아이가 저 힘들 때 엄마를 믿고 기댈 수 있을 거라는 것을.

힘들어도 웃고있던 아빠, 엄마는 아이에겐 버팀목이 된다

1998년 제51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1999년 제71회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외국어영화상, 음악상을 수상한, 로베르토 베니니의 아름다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이 영화에서 주인공 귀도는 어린 아들과 함께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가는데, 아들 조수아에게 이 모든 것이 탱크가 상으로 걸린 단체 게임이라고 안심시키며 놀이인 척 연기를 한다. 그러다 아들을 숨겨놓고 아내를 찾으러 갔다가 그만 독일군에게 잡히고 만다. 독일군의 총구를 뒤로 하고 죽으러 가는 길, 걷다가 숨어 있는 아들과 눈이 마주치자 귀도는 이게 게임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아들에게 윙크를 하고 팔다리를 우스꽝스럽게 흔들면서 사라졌다. 조수아는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했을까?

언젠가 인터넷 어떤 사이트에서 어린 시절에 자주 응급실을 가고 병동에서 지내야 했던 분이 올린 글을 봤다. 어렸을 때 암이 생겨 아팠는데도 병원에 가는 게 무섭지 않고 놀러 가는 것처럼 재미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입원하는 날엔 엄마가 ‘우리 00이 병원 가면 TV도 실컷 보고 매점에서 맛있는 것도 많이 사먹자’고 하고, 응급실 침대에서 잘 때는 '놀러 온 것 같지 않냐며 재미있겠다'고 했는데, 엄마가 진짜 신나 보였다고 한다. 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는 엄마랑 병원 안에서 식물이나 곤충 관찰하며 재미있게 놀았고, 아플 때에는 엄마가 금방 지나갈 거라고 괜찮다고 해서 진짜 괜찮았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엄마는 피눈물을 흘렸을 텐데 어떻게 그랬나 모르겠고 엄마한테 정말 고맙다는 글이었다.

무서운 세상, 어려운 인생을 살며 아이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을 다 막아주고 해결해줄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훗날 돌아봤을 때 부모가 혹은 할머니나 삼촌이나 그 누군가가 그때 그 삶을 뒤로 하고 보여줬던 익살스러운 표정, 장난스러운 행동, 따뜻한 미소 같은 것들은 아마도 아이의 삶을 단단히 지탱해주는 뿌리가 될 것이다. 내가 엄마로서 아이에게 해줘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 역시, 그럼으로써 아이가 어려울 때 나를 믿고 기댈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아 본다. mind

*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아동청소년 음란물을 제작, 유포한 가해자 및 N번방에 가입하여 범죄 사건을 관전한 회원 전원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엄중한 처벌을 촉구합니다.

박혜연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 Ph.D.
대학병원 공공의료사업단에서 공직자 및 일반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관리와 정신건강 문제 예방 및 치료를 위해 일하고 있는 임상심리전문가이다. 경기도 소방심리지원단 부단장, 보건복지부 전문 카운셀러를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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