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어터진 한 달 후의 낸(Nan one month after being battered,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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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터진 한 달 후의 낸(Nan one month after being battered, 1984)
  • 2020.04.09 12:00
여성들은 좀 더 집요하게 분노해야 한다. 여전히 우리사회 곳곳에서 얻어터지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의 처절한 자기초상

렌즈를 응시하는 여자가 있다.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얼굴이다. 피가 맺힌 한 쪽 눈은 슬프고 다른 한쪽 눈은 결연하다. 이 사진을 위해 정성스럽게 발랐을 빨간 립스틱은 벌겋게 부어 오른 얼굴 위로 도드라지며 시커멓게 멍든 눈과 대비되며 더욱 강렬하게 반짝인다. 눈썹을 그렸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걸쳤다. 헝클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이마의 상처가 살짝 보이게 내린 머리카락 컬의 위치도 꽤 단정하다.

Nan Goldin, Nan one month after being battered (1984) New York. Rights and Reproduction: © 1984 Nan Goldin

이 사진은 낸 골딘Nan Goldin, 1953~ 얻어터진 한 달 후의 낸으로 작가 자신의 처절한 자기 초상이다. 낸을 구타한 가해자는 그녀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남자친구 브라이언이며 당시 낸은 왼쪽 눈을 실명할 뻔 했다. 끔찍한 폭력 후 한 달, 사진을 찍기 위해 거울을 보며 구타의 흔적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화장을 하고 옷을 챙겨 입었을 그녀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자신의 작품으로 그가 가한 폭력의 증거를 생생하게 박제하기로 한 작가의 마음을 느껴 본다. 결코, 절대, 다시는 이런 관계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통스러운 자기 결심, 행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와의 관계가 아름답게 포장이라도 될 수 있을 까 두려워 가차 없이 찍어 버린 마침표.

본 이미지가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하다면 아마 당신은 International Affect Picture System(IAPS)를 사용한 어떤 연구를 수행했거나 IAPS 의 자극 일부가 포함된 논문을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 ‘얻어터진 한 달 후의 낸IAPS 수백 장 이미지 중의 하나이다

유독 마음이 끌렸던 이미지

아주 먼 옛날 나는 정서적 노화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호기롭게 USC 정서인지 실험실에 박사 후 과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의지는 순식간에 꺾였으며 실험실 가구 비슷한 신세가 되어 몹시도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연구에 대해 ‘great’ 외치며 대화하던 랩 멤버들의 그뤠잇한 실험들은 주로 IAPS를 사용한 것들이었다.  수백 장의 사진 중 유독 마음이 끌렸던 이미지 중의하나가 얻어터진 한 달 후의 낸이었다. 피해자 기록용 사진이라고 하기엔 꾸밈이 지나친 듯 보였고 자발적으로 사진을 찍었다면 도대체 왜?..  당시엔 그저 연구용 그림 자극 중 일부라고 생각했던 구타당한 여인의 사진이 비평가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연 작가로 평가 받는 낸 골딘 자신의 초상이라는 것을 안 것은 죽음과 자살, 사별자들에 관한 예술 작품들을 무차별적으로 찾아보던 때였다.

낸은 십대 때 마음이 통하는 친구이자 삶의 본보기였던 언니 바바라를 자살로 잃었다. 당시 낸의 부모는 딸의 자살을 이웃들에게 철저하게 숨기고자 하였다. 언니의 죽음 정황에 대해 잘 알 고 있던 낸에게도 언니의 죽음을 사고로 위장하여 전달한다. 박탈된 애도의 시간들은 이후 낸이 진실을 찾아내는데 집착하고 불편한 진실일수록 노골적으로 표현해 내고야 마는 낸의 작품의 뿌리가 되었다고 보는 평론가들도 있다. 낸은 드렉퀸, 게이, 레즈비언, 마약중독자, 에이즈 환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일상, 사랑, 관계, 죽음을 가감 없이 사진에 담았다.

여성들이 분노해야 할 이유

IAPS에서 얻어터진 한달 후의 낸은 피험자로 하여금 피하고 싶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적인 정서 자극 중 하나였지만 작가의 삶의 맥락에서 이 사진은 고통스러운 관계의 단절과 새로운 삶을 선언하는 용기의 기록이다. 사진에 얽힌 사정을 몰랐을 때 나에게 이 사진은 anger, sadness 정도로 분류될 이미지였지만 카메라 렌즈 앞에 선 작가의 의지를 읽고 난 후에 이 사진은 변화를 선언하는 희망의 이미지가 되었다

다른 글과 달리 이번 글에서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주저했다.‘얻어터진 한달 후의 낸80년대와 지금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여성들은 좀 더 집요하게 분노해야 한다. 여전히 우리사회 곳곳에서 얻어터지고 있는 수많은 낸들이 있기 때문에. mind.

The International Affective Picture System (IAPS)은 플로리다 대학의 the 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 Center for Emotion and Attention에서 심리학적 실험, 주로 정서와 인지 실험 연구용으로 제작한 표준화된 이미지 세트 자극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과 장면, 손상된 신체나 에로틱한 이미지 등 특정 정서를 유발할 수 있는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다(Lang et al, 2008)* 

   <참고문헌>

  • Lang, P.J., Bradley, M.M., & Cuthbert, B.N. (2008). International affective picture System (IAPS): Affective ratings of pictures and instruction manual. Technical Report A-8. University of Florida, Gainesville, FL.
  • 귀도 코스타 저, 김우룡 역  [낸골딘열화당 사진문고, 2019 .
고선규 mindworks 대표 임상심리 Ph.D.
임상심리전문가그룹 마인드웍스 대표이자 애도상담센터 ‘메리골드’를 이끌고 있는 임상심리학자이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애도가 관심 분야이며 자살 사별자에 대한 전문적인 치료와 상담을 하고 있다. 매달 첫째 주 수요일 저녁, 자살 사별자 리더와 함께 여성 사별자를 위한 자조모임을 운영한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탐미하며 그 속에서 심리학적 이야기를 관찰하고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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