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와 그 너머_안전하게 일탈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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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와 그 너머_안전하게 일탈할 권리
  • 2020.04.11 13:00
성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여성의 일탈을 탓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청소년기의 일탈에 대해 보다 관대할 필요가 있다.

사법부의 책임을 묻는다

텔레그램을 매개로 이루어진 성착취 사건, 이른바 ‘N번방 사건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참담해하고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이루어진 행위의 잔혹함뿐 아니라 범죄 행위에 가담한 사람들의 규모에 놀라고 있다. 26만이라는 숫자는 타인의 성을 폭력으로 착취하며 이를 소비하는 문화가 사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처럼 심각한 대규모의 범죄가 일어나도록 방치한 나라의 책임, 보다 구체적으로는 성 범죄에 대해 관대하고 가벼운 처벌을 내려온 사법부의 책임을 묻고 있다.

한편 범죄 행위에 대해 오랜 기간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는 피해자가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던 상황의 탓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해자들은 전형적으로 피해자를 거짓으로 유인해 신상정보를 알아낸 다음 그의 평판과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는 정보나 사진, 영상 들을 주변에 유포하겠다고 협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미성년 피해자 중 일탈계를 운영하다 범죄의 표적이 된 사람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탈계란 신상을 노출하지 않은 채 SNS에 자신의 신체 노출 사진을 게시하거나, 조건만남 등을 시도하는 계정이다. 여성의 경우 일탈계를 운영했다는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 혹독한 비난을 받게 되기에 신상과 사진이 그들 손에 들어간 이상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N번방 사건이 이슈화되자 어떤 사람들은 피해자들의 일탈계 운영을 문제삼고, 이들이 범죄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이들이 순진하고 무고하지 않기 때문에 법으로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여성단체, 청소년단체 등에서는 성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조하고 순수함을 강조하는 시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피해자가 기대되는 전형과 행동 규범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에 초점을 맞추고 문제삼으며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가 끈질기게 이어져 왔으며 이는 피해자를 침묵하게 하는 2차 가해이다. 여성의 자유로운 행동과 표현을 제약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실제로 피해 여성이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는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는 성폭력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부모님에게 알린다는 말은 어떻게 협박이 되었을까?’라고 질문한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을 받고 고민하길 바라며, 여성 청소년이 안전하게 일탈할 권리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기의 흑역사

독립을 위한 자율성을 기르기,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관계맺기는 청소년기의 중요한 과업이다. 나와 비슷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어떨 때 편안하게 혹은 즐겁게 느끼는지, 나를 어떻게 드러내고 싶은지 확인한다.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갈등하고 화해하며 타인과의 거리를 조절하고 나의 경계를 지키는 법을 배운다. 내 몸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성적 만족과 쾌락을 위해 혼자 혹은 타인과 함께 몸을 쓰는 법을 익힌다. 아기가 걸음마를 하며 수도 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방긋 웃으며 걷기를 배우듯 그 시기의 사람들도 많이 넘어지고 부딪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에 누구나 아직도 떠올리면 밤에 이불을 차게 만드는 창피한 기억에서, ‘요즘이라면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났겠다싶은 아찔한 실수들까지 다양한 흑역사들을 적립했을 것이다.

우리가 흑역사라고 부르는 것들은 아마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 궁금하고 알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거나 성급해 저지른 크고 작은 실수들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건 나와 세상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는 무수한 시도와 실험 중 실패로 남은 기억들일 수 있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로토가 그린 잔뜩 불만에 찬 젊은 남성의 모습이다. Lorenzo Lotto  (1480–?), 'Portrait of a Young Man with a Book', 1526-1527, oil on panel, 35 * 28 cm, Sforza Castle Pinacoteca, Milan, Italy.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로토가 그린 잔뜩 불만에 찬 젊은 남성의 모습이다. Lorenzo Lotto (1480–?), 'Portrait of a Young Man with a Book', 1526-1527, oil on panel, 35 * 28 cm, Sforza Castle Pinacoteca, Milan, Italy.

위험 감수 행동의 미덕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청소년들은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을 많이 한다. 이 시기의 행동 경향이 안전보다는 위험 쪽으로 치우져 있는 것은 더 많은 경험을 하고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이후의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더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넘어지기를 두려워해서는 걷기를 배울 수 없으니까. 발달 인지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기의 뇌는 상대적으로 보상에 민감한 사회-정서 처리 체계가 활발하게 활동하며, 충동을 억제하는 인지 통제 체계는 느슨하게 작동한다. 안전을 추구하느라 배움의 기회를 놓치기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기 좋도록 연결되어 있다.

위험하거나 해로운 행동을 멈추고 행동의 장기적 결과를 고려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인지 통제 체계는 환경의 적절한 피드백을 통해 다듬어져 간다. 수많은 실수를 포함하는 경험으로부터 받은 적절한 피드백은 전전두엽의 연결을 튼튼하게 하고 행동을 조절하는 힘을 강화한다. 피드백은 나의 행동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 사회 환경이 주는 보상과 처벌의 형태로 주어진다.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의 유리함과 불리함, 안전과 위험의 지도를 학습하며 내 욕망의 한계를 관찰하고 행동을 선택하며 조정한다. 실수나 실패가 회복하기 어려운 외상으로 이어진다면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받는다. 외상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을 수 있고,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고 편안하게 느끼기 어려우며,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을 꺼리게 되거나 혹은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시킬 수 있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에 대해 제대로 된 피드백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제어하기 어려우며 합리적이거나 도덕적 판단을 하는 능력이 결여될 수 있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이라는 피의자의 말은 비겁하고 구차한 합리화에 지나치지 않지만 한편 누군가는 더 빨리 범죄를 멈추었어야 한다는 것만은 맞고 그래서 사법부를 향한 여성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n번방을 키운 사회

살아가면서 마주칠 위험을 100% 차단할 수는 없으며 이는 별로 바람직하지도 않다.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롭게 자신과 세상을 탐색하고 실험할 수 있는 기회이다. 위험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대가를 치르고 책임을 지며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번 추락하면 천길 낭떠러지인 곳에서 여성은 몸을 사리게 되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안전을 최우선으로 살다 보면 경험을 제한하게 되고, 이는 덜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으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N번방과 N번방을 키운 사회는 76명 피해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안전을 침해했을 뿐 아니라 이를 넘어 모든 여성, 특히 여성 청소년의 안전과 위험에 대한 감각을 변화시키고 건강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권리를 침해했다고 할 수 있다.

부질없고 하찮은 일일지라도

이 글에서 청소년기의 뇌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이 글을 읽는 어른들이 청소년을 대상으로서 분석하고 또 이해하기보다는 차이를 인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자신에게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없을만큼 부질없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도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몹시 간절하고 중요했음을 잊어버리는 어른들이 많은 것 같다. 삶의 시기에 따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를 수 있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일탈계'를 보다 균형있고 공정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내가 흑역사로 기억하는 일들도 그 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어리석어 보이는 시도들이 나의 건강함에 기여했음을 인정하자. 위험하고 해롭게만 느껴져 내가 하지 못했던 시도를 떠올리고 아쉬움을 느낀다면 더 좋겠다. 그 마음이 사회의 위험한 환경, 외상으로부터 회복을 어렵게 하는 환경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mind

이한별 사회적협동조합 사람마음 활동가 심리학 MA
임상심리전문가로 사회적협동조합 사람마음에서 트라우마 생존자를 위한 심리지원을 하고 있다. 느슨한 전두엽을 가지고 있지만 절차기억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좋은 습관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언니들이 멋있어 출근할 힘이 나는 언니 덕후. 사람마음의 기부 회원이 되어 주세요! https://www.traumahealingcenter.org:46084/page_oqyO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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