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피해자, 법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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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피해자, 법 앞에서
  • 2020.06.25 12:20
피해자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정의를 실현해야 할 수사와 재판과정이 피해자에게 더 고통스런 시간을 강요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형사사법시스템의 문제점을 살펴봅니다.

범죄 피해자, 법 앞에서

저는 범죄 피해 후 트라우마로 힘들어하시는 분들을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 제 직업에 대해 알게 된 분들은 가끔 다른 사람들의 범죄 피해 이야기를 듣는 게 혹시 무섭고 힘들지는 않느냐고 질문해 옵니다. 확실히 트라우마를 다루는 과정에서 잔인한 범죄의 세부사항까지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이후 잠시 동안은 전보다 조금 쉽게 불안해지고 보안에 신경을 쓰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영향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사라지는데다,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제게 마음이 짐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걱정스럽게 여기는 것은 사실 다른 부분인데, 이 일을 시작한 뒤 형사 사법 시스템에 대한 저의 태도가 꽤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피해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수사와 판결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면, 지금은 법 앞에서 여러 번 좌절하게 되는 내담자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면서 함께 분노와 막막함을 느끼고, 피해자가 사법 절차를 통해 적절한 도움과 구조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고 할까요. 단순히 적절한 판결이 내려지지 않는다, 차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범죄피해에 대한 수사 및 재판 과정 전체에서 피해자가 소외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피해자가 형사사법체계 내에서 지속적으로 좌절을 겪고, 부당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 피해자와 피해자 주변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피해자가 수사 및 재판 중 어떤 경험을 하게 되고, 추후 어떤 삶을 살아가는 가의 문제는, 과연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법체계 전반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인지, 사법 시스템의 공정함은 얼마나 신뢰해도 되는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범죄에 대한 사회의 논의가 대부분 가해자와 관련된 주제들로 치우쳐 있는 지금, 피해자의 회복이라는 주제는 일부러 더 힘주어 말해야 할 것 같은 주제로 보입니다. 피해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을 갖기 위해서요. 이를 위해 우리는 재판부나 가해자뿐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경험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망치를 들고 휘두르는 정의의 여신의 모습.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장 나티에의 작품. Jean-Marc Nattier (1685~1766), 1737, Justice punishing Injustice, 133 * 161 cm, Private Collection.
망치를 들고 휘두르는 정의의 여신의 모습.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장 나티에의 작품. Jean-Marc Nattier (1685~1766), 1737, Justice punishing Injustice, 133 * 161 cm, Private Collection.

피해자가 경험하는 수사와 재판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범죄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피해자가 범죄 후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회복되는지도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생소한 과정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드는 것이 좋을 듯한데요, 별로 즐겁지는 않은 상상이겠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느 날 강력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글을 읽으면서 가능한 한 이것이 자신이 겪은 일이라고 적극적으로 상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어느 주말 저녁 친구들과 집 근처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다 옆 자리에 있던 건장한 40대 남자 손님과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태도에 짜증이 난 당신이 큰 소리로 따지자 격분한 상대방은 갑자기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의 얼굴과 복부를 주먹으로 여러 번 때렸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놀라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했으며, 깜짝 놀란 친구들과 주변 손님들은 일단 싸움을 말린 뒤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코피를 흘리고, 얼굴에 피멍이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던 당신은 다행히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게 됐는데, 의사로부터 2-3일 정도의 입원 및 지속적 통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설명을 듣게 됩니다. 신체적인 부상에 더해, 트라우마로 인한 심리적 증상도 시작됩니다. 사건 이후 당신은 하루에 3-4시간 밖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간신히 잠이 들어도 악몽을 꾸어 소스라치게 놀라 깨며, 낮 동안에는 까닭 모를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가해자와 인상이 조금만 비슷한 사람을 보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계속되는 불안감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주의력과 집중력이 일시적으로 저하되어 들은 말을 금방 잊어버릴 때도 있지요. 그렇게 정신없는 상태에서 병원치료를 받고 있으려니, 사건을 담당하게 된 형사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피해 진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 년에 이르는 일련의 형사소송절차는 많은 경우 이런 방식으로 시작되고는 합니다. 이 상황에서 많은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자신의 범죄에 알맞은 벌(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만큼)을 받기를, 또 피해자에게 알맞은 피해보상을 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당연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후의 법적 절차가 원만히 진행되어야 하는데요. 그런데 범죄피해자 앞에 있는 법이라는 문의 문지기는 정말이지 만만치 않습니다. 그 문을 지나가려는 사람이 피해 당사자라 하더라도요.

우선, 그 문 앞에 선 피해자의 상태는 근대국가에서 가정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시민의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는 데 첫 번째 곤란이 있습니다. 범죄로 인한 트라우마는 자율신경계를 과활성화시켜 주변 자극에 예민해지게 하고, 감정조절을 어렵게 하니까요. 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생소한 법의 체계에 떠밀리다시피 들어가게 된 피해자들은 많은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몰라 혼란을 겪으며,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처지와 현 상황에 대한 혼란과 막막함 때문에, 혹은 트라우마 증상 때문에 경찰이나 검찰 앞에서 평소에는 하지 않던 여러 가지 행동들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상태에서 하게 된 여러 행동은 사건을 담당한 공무원이나 법조인들의 방어적인 태도를 이끌어낼 수 있고, 담당자들은 피해자가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이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피해자들은 담당자들로부터 최대한의 도움을 받기 어렵지요. 피해자의 이러한 불안정한 상태는 수사-재판과정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엄밀히 말해 이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피해자들이 일반적으로 겪을 수 있는 이러한 심리적 동요가 수사 및 재판 절차에서 잘 고려되지 않는 점은 문제라 하겠습니다.

자, 다시 앞서 이야기했던 사건으로 돌아가 봅시다. 당신은 간신히 자신을 추슬러 비교적 차분한 상태로 경찰조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사건을 담당한 형사는 세심한 편이어서, 사건 진행 세부 사항을 잘 안내해 줍니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당신은 범인이 불구속상태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심지어 범인은 집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인데도요. 혹시라도 범인이 해코지를 하거나 다시 접근해오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난 당신은 경찰에게 가해자가 잡히지 않아 불안하다고 호소합니다. 그러자 경찰은 당신에게 원할 경우 신변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하며, 위급상황에서 경찰에 긴급신고를 할 수 있는 스마트워치를 제공해 줍니다. 조금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가해자가 달려드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는 경찰이 오기 전에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 잠시 부모님 집에 가 있기로 하고, 어서 사건이 진행되기를 기다립니다. 한 달 가량이 지나자 사건은 검찰로 송치되었으며, 이후 재판이 시작됩니다. 자, 재판에서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피해자 없는 형사재판

많은 경우 형사소송절차에서의 피해자가 겪는 괴로움은, 형사소송절차 내에서의 피해자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대부분의 국가에서 범죄자에 대한 재판은 피해자vs. 가해자의 형식이 아니라 국가vs. 가해자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요, 이에 따라 피해자는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피해를 겪었다고 해도 사건의 주체가 아니라 증인의 위치에 서게 되고, 여러 가지 모순적인 요구와 욕구들 사이에서 복잡한 의사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자신이 피해자인 사건에서 주체가 아니라 증인이 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핵심적인 문제를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말하는 것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주체는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말하기 싫을 때 침묵할 수 있으나, 증인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할 기회를 찾기 어려우며, 말하기를 원치 않을 때에도 말해야 하는 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증인은 자신이 원할 때가 아니라 재판부가 원할 때 말해야 하고, 발언을 원치 않아도 재판부가 명령하면 말해야 하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피해자로서 자신의 경험이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게 되며, 작게는 재판부, 크게는 사회 전체에 대한 원망과 불신을 키우게 되기 쉽습니다. 다행히 2007년 개정된 형사소송법에서는 피해자가 말하고자 할 때는 말할 수 있도록 피해의 정도 및 결과, 피고인(가해자)의 처벌에 대한 의견, 그 밖에 당해 사건에 관한 의견을 진술할 기회를 명시했지만 실제 형사소송 실무의 세계에는 피해자에게 이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사람도, 이를 적극 활용하는 사람도 매우 적습니다

드물게, 피해자가 말하기를 원할 때와 재판부가 듣기를 원할 때가 교묘하게 맞아 떨어져 일이 잘 흘러가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요. 그런데 그 때는 발언의 내용이 문제가 됩니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증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가해자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한 발언에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재판 과정 중 감정에 치우친 말을 하면 발언을 제지당하거나 심할 경우 법정 밖으로 퇴출되는 경우가 있는데(법의 입장에서 볼 때 증인의 사적 감정은 가해자의 유무죄나 잘못의 정도를 결정하는 데 불필요한 발언이니까요), 이것이 아무리 정당한 절차라 해도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상처로 남기 쉽지요.

고통스런 증인심문

무엇보다, 피해자는 증언을 하게 되면 가해자 변호인의 증인신문 과정을 필히 거치게 됩니다재판부의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고도 필수적인 절차입니다. 증인(=피해자)이 유죄를 밝히기 위한 발언을 했으니 당연히 재판을 받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증언한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비록 사건을 담당한 판사가 가해자(혹은 변호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심문 내용을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종종 변호사들은 심문과정에서 피해 사실 자체를 의심하거나, 피해자의 평소 성격 및 대인관계, 행동 등을 거론하며 피해자가 사건발생에 일부 책임이 있음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사실이든 아니든 이러한 비난을 받게 된 피해자들은 억울함과 분함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지요. 증인심문을 받아야 했던 저의 내담자 중 한 분은, 증인지원관으로부터 증인이 된다는 것은 법정에 혼자 서서 총알을 맞는 것과도 같다, 누구나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고 합니다. 그 표현이 그 순간 자신의 심정을 잘 설명하는 말이었다고요. 이러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증인지원제도가 존재하며, 법정에서 가해자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도록 비대면신청을 한다거나, 가족 등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증언할 수 있도록 신뢰관계동석 신청 등을 할 수 있습니다만, 이러한 요청을 승인하는 것도 판사의 재량이라 요청이 거절될 수 있으며, 언제나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범정에서 말하는 것과 관련된 이런 다양한 위험 때문에, 많은 피해자들은 직접 증언을 하기보다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것과 같이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자신의 심정을 전달하거나, 어려움이 커 탄원서 작성조차  어려울 경우에는 자신의 사건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피해자가 법정을 향해, 국가를 향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데에는 여러 겹의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어떨까요.

많은 사람들은 피해자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니만큼 자신의 처지를 널리 알리고 국가에도 호소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며, 실제로 그러기를 원하는 피해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피해자에게 있어 사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사건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대면하고, 자신이 사건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 사건 이후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걸 뜻합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사건과 관련된 자극을 접할 때 사건과 관련된 기억, 느낌, 감각들이 침습적으로 떠오르면서 고통을 겪게 되는데, 수사와 재판 과정은 거의 전체가 사건과 관련된 자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어떤 피해자에게는 피해의 기억이 매우 수치스럽고 덮어두고 싶은 기억이며, 가능하면 그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사건특성상 목격자가 없고 은밀한 곳에서 사건이 발생하는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의 증언이 거의 유일한 증거로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 피해자의 증언이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되는데요,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그 날의 경험을 심리적으로 안전하지 못한 공간에서 상세히 기술하는 것이 피해자의 트라우마 증상을 악화시킬 위험이 크다는 것은 여러 피해자 대상 연구와 경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피해자는 되도록이면 진술을 피하고 싶어하지만, 사건을 빨리 종결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지 않았더라도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지요. 이런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해바라기센터에서는 진술을 녹화하여 여러 번 진술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거나, 전문적인 진술조사기법을 활용하여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진한 점이 많습니다.

게다가 피해자의 증언에 대한 꼭 필요한 검증절차조차 피해자에게는 고통스럽고 버겁게 작용할 수 있다는 문제점도 남아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 판사가 유명 연예인의 성범죄피해를 재판하면서 피해자가 찍힌 불법카메라영상을 열람한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된 적이 있는데요. 어떠한 맥락에서 영상 확인이 필요했는지, 그 확인 절차가 정말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법조인들의 역할이겠습니다만, 필요했든 아니든 간에 그 영상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했던 피해자는 공판 과정에서 상당한 괴로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수사와 재판 과정에 있어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100% 신뢰할 수만은 없는 일이며, 3자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러 증거를 수집하고, 주장을 검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국가와 사법시스템으로부터 두 번 고통을 당했다고 느끼게 되고, 전반적인 사회에 대한 신뢰도 잃게 되지요.

지금까지 피해자가 수사와 재판을 받으면서 겪는 어려움을 길게 적어 보았습니다. 사실 이 중에는 수사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절차와 관련된 것도 있으며, 현행법상 크게 바꾸기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럴 때, 수사와 재판 담당자는 단지 국가가 정한 법률에 따라 정당한 절차를 행했을 뿐이고 특별히 잘못을 범한 것은 없으니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면 될까요? 재판과정에서 받은 고통이 재판이 끝난 뒤에도 오랜 기간 이어지는 것은 피해자 본인의 역량 탓일까요? 의료적 수술을 받을 때 고통을 겪는 것이 비록 피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후 재활과정에 정성을 기울이면 회복할 수 있듯이, 피해자 역시 수사와 재판에서 피치 못할 고통을 겪더라도 이를 회복할 수 있는 체계적 절차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피해자의 회복을 이야기한다는 것

‘n번방이나 살인사건과 같은 강력범죄가 언론에 보도될 때면 사람들은 가해자들이 사형이나 무기징역 같은 강한 벌을 받기를 바라며, 만약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몇 년 되지 않는 판결을 받으면 재판부의 불공정성에 대해 불만을 터뜨립니다. 이와 같은 일반적 인식은 죄 지은 만큼 벌 받아 마땅하다는 응보적 정의관에 입각한 것인데, 최근에는 이러한 정의관이 범죄 예방과는 실질적 관련이 없다는 입장과, 낮은 형벌은 실제로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를 위험을 높인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논의는 매우 중요하겠지요. 가해자가 적절한 벌을 받아야 피해자가 최소한의 안전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사법시스템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다만 이 과정에서 피해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습니다. 범죄에 대한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가해자가 누구고 어떤 특징이 있으며 그래서 몇 년의 판결을 받았는지 위주로 집중 보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피해자의 경우, 가해자가 이렇게나 큰 피해를 입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피해자가 겪는 고통을 강조하여 보도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으며 그마저도 대중의 관심이 시들해지면 피해회복은 오롯이 피해자만의 몫으로 남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해자의 역설

최근, 일본에서 있었던 실제 살인사건과, 이후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칼럼을 읽었습니다. (기사는 이곳 참조)  고교생 참수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는데, 피해자와 가해자는 같은 학교 학생이었으며 가해자는 피해자가 평소 자신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등산용 칼로 친구를 살해하고 매장한 두 범죄를 은폐하려던 사건입니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가해자는 소년원에서 3년을 복역한 뒤 출소해 변호사가 되었고, 도쿄에서 성공한 삶을 살아갔다는 내용입니다. 가해자의 성공적 사회복귀와 재범 방지라는 측면에서 이것은 일본 사법시스템의 성공사례 중 하나로 보입니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은 지속적으로 정신적 치료를 받으며 살아갔으며 가업이 기울어 경제적으로도 궁핍해졌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괴롭혔다는 이유로 학교폭력 가해자의 집안이라는 따가운 시선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해자 측이 유족에게 지불하기로 했던 피해보상금은 언젠가부터 끊겨 있는 상태였지요. 칼럼의 글쓴이는 이렇게 엇갈린 피해자 유족과 가해자의 인생이 이 사실을 알게 된 많은 일본인들에게 공분을 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가해자의 갱생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피해자 회복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세태를 비판합니다. 안타깝지만 이와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러 강력범죄 사건 이후 피해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갔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요. 피해자 개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지 논의가 가능함에도, ‘회복은 비교적 관심 밖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피해자가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전반적인 형사사법체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해결책을 생각해내기는 어려우며,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미흡한 부분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럴 듯한 해결책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의 세상을 우리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판결만 내려지면 끝인 걸까?’ 라는 질문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삶은 이어지며, 피해자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는 판결도 그저 과정 중 일부일 뿐이니까요. mind. 

임민경 범죄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 임상심리전문가
독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하였고, 현재는 임상심리전문가로서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언제나 누군가의 애독자이자 무언가의 애호가이며, 트위터 그만두어야 한다고 매일 말하지만 그만두지 못하는 트위터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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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2020-06-25 19:03:00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