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상태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존심,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 2019.07.13 10:15
자존심에 대해 많은 오해들이 존재한다. 자존심은 나쁜 것이고 자존감은 좋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대단히 잘못된 소리다. 한국인에게 자존심이란 최후까지 지켜야 할 존엄이다. 왜 그럴까?

얼치기 전문가들의 개념적 오용

치유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심리학적 용어를 적극 사용한다. 그러나 현재 통용되는 심리학적 개념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상담소나 병원을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전문가보다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얼치기 전문가들이 많고, 인터넷과 1인 매체라는 기술의 진보로 인해 검증되지 않은 심리학 관련 이야기들이 유행처럼 오가면서 이러한 분위기가 생기는 것 같다. 학술적 정의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정신의학적 용어를 함부로 사용하는가 하면 충분한 학술적, 임상적 근거없이 여러 개념을 혼용하는 경우도 많다.

친구나 지인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따뜻한 말 한마디 주고받는 일상의 힐링이 아닌, 정신의학과 심리학적 개념을 이용한 치유는 고도의 훈련과 임상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일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짧은 글과 영상에서 잠시의 안식을 얻는 것도 좋겠지만 정보의 바다에서 가치있는 정보를 걸러내는 안목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임상이나 상담 전문가는 아니지만 문화심리학자로서, 현재 통용되는 개념 중에 심각하게 오염된 것이 있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바로 '자존심'과 '자존감'이다. 언제부턴가 인터넷 곳곳에 '자존심은 버려야 할 나쁜 것이고 자존감은 키워야 할 좋은 것'이라는 명제가 눈에 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잘못된 소리다. 그것도 대단히.

한국인에게 자존심이란

자존심自尊心은 옛날부터 한국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해 온 문화적 개념이며, 자존감self-esteem은 심리학에서 널리 통용되는 용어다. 로젠버그Rogenberg, 1965가 정의하고 오랫동안 많은 연구를 통해 다듬어진 학술적 개념이 자존감이다. 그러나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이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보편적 경향성인 이 '자존감'을 경험하고 드러내는 방식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사실,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자존심’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자존감을 경험해 왔다. 자존심은 자존감을 경험하는 한 유형인 것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자존감을 경험하고 드러내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즉, 자존심과 자존감을 비교하는 것은 비교 대상이 아닌 동일 범주의 개념을 비교하는 오류이다. 이렇다보니 자존심은 나쁘고 자존감은 좋다는 주장은 마치 '짜장면은 싫은데 중국음식은 좋아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한국의 문화적 개념인 자존심과 비교가능한 것은 영어의 'pride'나 일본어의 '곤조根性'같은 문화적 개념 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pride나 곤조와 같은 일상적 개념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거의 없다. 심리학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잘못된 범주를 비교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다는 주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맥락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자존심과 자존감을 혼동하는 이들은 보편적 심리를 경험하는 문화적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지만 문화에 따라 벽돌집, 흙집, 판자집, 이글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은 집이 있듯이, 사람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보편적인 심성(자존감)이 있는데 그것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적으로 다른 것(한국인의 경우 자존심)이다.

문화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자존심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실제로 살인사건의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나를 무시했다'는 자존심의 상처에서 발로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분에 넘치는 허세를 부리거나 말도 안되는 객기를 부리는 일도 있다. 자존심을 지키려다가 더 큰 것을 잃거나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가 손상되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과잉한 자존심 지키기를 일상에서 접하다보니 '자존심은 나쁜 것'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형성되어 왔던 것이다.

윤두서尹斗緖,1668~1715. '자화상'숙종 36년,1710년. 20.5x38.5cm. 고산윤선도전시관 소장. 국보240호. 예리한 눈동자와 다부진 입, 방사하는 수염에서 강한 결기를 느껴진다. 한국인이 지키고자 했던 자존심을 매우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이유

한국인들이 자존심 때문에 부정적인 일까지 하게 되는 이유는 그만큼 자존심이 갖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 자존심은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야 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자 살아가야 할 이유다.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을 지켜야겠다는 동기가 있으니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태도까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적 성숙이나 여러 상황적 조건에 따른 편차가 존재한다. 연구에 따르면, 자존심 손상 경험에 대응하는 유형은 ‘회피’, ‘적대적 회복’, ‘타협적 회복’ 형으로 나타났다. 자존심을 부정적 방식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사회적 맥락을 거스르지 않고 성숙하게 표현하는 이들도 분명 있다는 이야기다.

자존심은 한국인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준다. 사는 게 힘들고 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 붙잡을 자존심이 한 가닥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붙잡고 어려움을 이겨낸다.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더 나은 결과를 향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자기탄력성self-resilience이란 개념과 유사한 맥락이다. 분명 세상에는 돈도 안 되고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지만 자기 자리를 지키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지탱하는 것은 '내가 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자존심일 것이다. 돈이 안 벌려도 내가 가진 기술을 이어가겠다는 장인의 자존심, 초가삼간에 살면서도 부당한 권력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선비의 자존심. 감옥에 갈 지라도 펜을 굽히지 않는 언론인의 자존심. 평생을 시간강사로 떠돌지언정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지키는 학자의 자존심. 어쩌면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드는 이들은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지럽다면 선비들이, 언론인들이, 학자들이 자존심을 내팽개쳤기 때문은 아닐까? 자, 아직도 자존심은 나쁘고 자존감은 좋다고 생각하시는가.

우리 사회에는 한국적인 어떤 것은 대개 부정적일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자존심과 자존감에 대한 논란도 상당 부분 이러한 분위기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이해는 현실 이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치유자들이 만나고 이야기해야하는 이들은 대부분 한국사람들이다. 내담자들이 하는 말의 뜻을 문화적 맥락에 따라 정확히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바람직한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mind

한민 심리학 작가 사회및문화심리 Ph.D.
토종 문화심리학자(멸종위기종),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씁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