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 억압한다고 해결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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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 억압한다고 해결될까요?
  • 2019.07.17 12:00
정서지능이 높다는 것은 그것을 잘 조절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정서를 부정하거나 억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실제 정서를 잘 조절하는 사람이 더 적응적이고 기능적이다.

『어바웃 타임』About Time이라는 영화가 있다. 2013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한 집안의 남자들에게만 유전되는 특별한 능력, 즉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메디다. 주인공 팀은 성년이 되어 아버지에게 이 비밀스런 능력을 전수받게 된다. 이제 팀은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어두운 곳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정신을 집중하면 실수하기 직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팀은 여자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이 능력을 활용해 온갖 실수를 되돌리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데, 혈기왕성한 20대답게 팀의 실수는 대부분 감정조절의 실패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와는 별개로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같은 장면에서 낮은 정서지능으로 행동할 때(실수하는 팀)와, 높은 정서지능으로 행동할 때(시간을 되돌려 다시 행동하는 팀)의 서로 다른 결과를 코믹하게 보여주는 좋은 시청각 교재라 할 수 있다. 정서지능이란 ‘정서를 인식하고 활용, 이해, 조절하여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성취하는 능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1 따라서 정서는 '풍부한-메마른’의 차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유능-무능’의 차원으로 구별하게 된다. 

『어바웃타임』에서 주인공 팀과 아버지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주먹을 불끈쥐고 눈을 감고 있다. 

정서의 적응적 기능

우리는 종종 감정 때문에 실수하고 감정 때문에 괴롭다. 감정에 휘둘려 원치 않는 행동을 해버리고는 후회하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이성만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면 실수하지 않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여 감정을 억압하려 애쓴다. 또, 감정이 아예 없다면 괴로울 일도 없을 것으로 믿고 감정을 아예 들여다보지 않고 무시한다. ‘제발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혹은, ‘이게 울 일이야?’와 같은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고 또 해왔을까? 넘어져 우는 아이에게 ‘괜찮아! 괜찮아! 안 아파! 안 아파!’라고 달래는 부모는 자신이 정서 억압의 사회화 과정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정서가 이렇게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면 인류의 기나긴 진화의 역사 속에서 도태되었어야 마땅하다. 인류에게 정서가 남아있다는 것은 정서가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어떤 순기능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는데, 이러한 주제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 연구는 다윈C. Darwin이 진행했다. 그는 인간과 동물의 다양한 정서표현과 관련된 연구에서 "정서는 근본적으로 적응적이고 환경의 요구에 적합한 방법으로 행동을 조직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2 즉, 우리가 어떤 정서를 경험하게 되면 그 정서가 보내는 메시지에 따라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주요 정서의 메시지와 이에 따라 동기화되는 행동들의 목록이다.3

정서

메시지

동기화 행동

두려움

도망쳐, 위험해!

부정적 결과를 피하기 위해 곧바로 행동에 옮긴다.

부당하다!

부당한 일에 맞서 싸우자

슬픔

도와줘, 나 상처 받았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한다.

혐오

그것 먹지 마, 독약이야!

당신이 어떤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관심

주위를 살펴보자.

탐색하고 학습할 수 있도록 자극한다.

놀람

조심해, 주의를 집중해!

예상치 못한 중요한 무언가에 주의를 돌린다.

수용

안전하게 집단 속에 머무르자.

나는 당신을 좋아해. 당신은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야.

즐거움

다같이 협력하자. 다시 해보자.

그 일을 계속한다.

정서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

최근 심리학자들은 정서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긍정 정서는 개인의 인지적 조망을 확장시켜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여 개인의 심리적 자산으로 축적될 수 있다는 확장 및 축적 이론4이나, 개별 정서 우울은 분석적 반추analytical rumination를 촉진하여 문제의 원인, 해결필요측면, 가능한 해결책, 손익평가 등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한다5는 연구 등이 발표되었다. 다윈이 19세기 말에 화두로 던졌던 정서의 기능이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정서는 적응적인 행동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적응적 사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다.

만약 시험에 합격한 학생이 행복감을 향유하기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 자신을 더 다잡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단점에 더욱 집중한다면, 미래를 위한 심리적 자산을 축적할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건 때문에 일시적으로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되잖아. 힘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무시한다면 그는 분석적 반추를 하지 못하여 같은 상황에 대한 취약성을 그대로 유지하게 될 것이다. 즉, 정서는 본래 적응적 기능을 가졌으나 이는 개인이 정서가 보내는 메시지를 잘 알아차리고 상황에서의 목적에 맞게 활용할 때만 그렇게 작동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서는 억압이 아닌 조절의 문제

다시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의 삽화로 돌아가 보자. 해변에서 책을 읽고 있던 팀에게 일광욕 중이던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 둘이 등에 썬크림을 발라달라고 요청한다. 제안이 너무 반가운 팀은 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달려갔지만 썬크림 튜브를 너무 세게 눌러 크림을 사방에 튀게 만드는 실수를 하고 만다. 가문의 비법대로 시간을 되돌린 팀은 이번에는 아가씨들의 제안에 ‘잠깐만, 이것 좀 마저 읽고’라고 말해 시간을 벌고 호흡을 조절한 뒤 천천히 다가가 능숙하게 썬크림을 발라주어 아가씨들의 호감을 산다. 이것이 정서조절이고 '정서적으로 똑똑한'emotionally intelligent 행동이다. 아가씨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그 장면에서의 목표라면 팀은 과제(썬크림 발라주기)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흥분을 침착으로 전환하는 정서조절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제 더 이상 정서를 비합리적이고, 억압되어야 하며, 무시해도 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정서는 기능적이고, 활용 및 조절을 통해 삶을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자원이라는 관점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좋은 소식 하나는, 정서지능은 개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가 보내는 메시지를 외면하지 않고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은 정서적으로 유능해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다.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이 순간 불안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 다음 단계로는 정서와 과제수행, 사고 등의 관계를 알고 정서의 원인과 원인과 발전과정을 이해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구체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불안이 계속되면 발표를 잘 할 수 없을 테니 일단 신체적 반응부터 조절해보자.’)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는 목적달성에 필요한 정서상태로 만들거나, 유지하거나, 바꾸거나, 없애는 내적 연습을 하면 된다. mind

   <참고문헌>

  1. Salovey, P. & Mayer, J. D. (1990). Emotional intelligence. Imagination, Cognition, and Personality, 9, 185-211.
  2. Darwin, C. R. (1872).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London: John Murray. 1st edition.
  3. Caruso, D.R., & Salovey, P. (2004). The emotionally intelligent manager. San Francisco: Jossey-Bass.
  4. Fredrickson, B. L. (2001). The Role of Positive Emotions in Positive Psychology: The Broaden-and-Build Theory of Positive Emotions. American Psychologist: Special Issue, 56, 218-226.
  5. Andrews, P. W., & Thomson, J. A., Jr. (2009). The bright side of being blue: Depression as an adaptation for analyzing complex problems. Psychological Review, 116(3), 620-654.
이희경 피비솔 대표 사회심리 Ph.D.
'건강한 사람의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코칭에 심리학 이론을 접목시키는 노력을 20년째 하고 있다. 국내 코칭심리학의 탄생에 일조했고 현재 한국코칭심리학회장을 맡고 있는데 소망이 있다면 더 많은 심리학자들이 코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코칭에서 만나는 다양한 개인들을 관찰하며 인간의 마인드 즉, 인지, 정서, 동기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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