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침몰: 발달과 고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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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침몰: 발달과 고착
  • 2019.08.12 15:58
영화 일본침몰에서 일본이라는 사회의 심리사회발달단계를 확인하면 할수록 그 강박의 세계가 더 명료히 드러난다.
2006년 개봉 당시 영화 <일본침몰> 공식 포스터

우리가 성장한다는 건 뭘까?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할까?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세상과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는 질문의 내용이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우리 인생은 8개의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개개인의 발달과정 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나 문화의 진화과정에도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일본 문화의 심리를 이 에릭슨의 8단계 질문에 대입해서 설명해보려고 한다. 최소한 이 영화 <일본침몰>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인생의 초반 3단계 질문들과 관계가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신뢰 vs 불신

우리가 처음 세상에 태어난 직후부터 한동안 집착하는 질문은 내가 얼마나 세상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 에릭슨은 신뢰 대 불신의 문제라고 이름 붙였다. 이때 신뢰감의 내용이란 이런 것들이다. 내가 울면 누군가 와서 나를 돌봐줄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웃어주면 그 사람도 나에게 웃어줄 것이다... 이 질문을 일본이라는 한 나라에 대입하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일단 일본은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쌓는데 불리한 동네다. 우선 지진이 있다. 일본에서는 작은 지진은 일상적이고 가끔씩은 진짜 엄청난 대지진이 일어난다. 게다가 태풍도 있다. 태평양에서 아시아로 향하는 태풍은 대부분 일본을 실컷 두드린 다음 힘이 빠져서 동해상에서 소멸한다.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그러고도 힘이 남은 일부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는 매미나 사라 같은 태풍이 거의 매년 찾아온다는 얘기다. 이런 환경에서 살다보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자연이 단번에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일본침몰>이라는 제목이 일본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는 <한국침몰>이라는 제목을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일본침몰은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험한 지역에서 살아야 하는 게 꼭 나쁜 일 만은 아니다. 신뢰와 불신은 동전의 양면이다. 다시 말해 불신을 모르는 사람은 신뢰도 모른다. 만약 세상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영역이 분명해지면, 나머지 영역에서는 확실하게 믿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따른다. 일본이 거의 강박증에 가깝게 재난대비 시스템을 구성한 덕분에 그렇게 많은 자연재해를 겪으면서도 인명피해는 별로 발생하지 않는 것이 그런 예다. 전반적으로 규칙을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일본 문화의 특성도 이와 무관치 않다.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게 이들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규칙을 지키지 않더라도 죽을 일은 없다. 오히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더 유리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규칙은 고마운 보호막이 아니라 귀찮은 간섭으로 취급받는다.

자아통제 vs  수치심 

우리가 답해야 하는 두 번째 질문은 내가 얼마나 내 몸을 통제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개인의 발달단계에서는 이 질문은 배변훈련의 문제다. 기저귀를 벗으려면 내가 언제 화장실에 가고 싶은지를 알 수 있어야 하고, 화장실에 가기 전에는 배변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만약 그 통제에 실패하면, 남들 앞에서 오줌싸개 똥싸개라는 놀림이 닥쳐온다. 그래서 이 단계의 질문은 내가 내 몸을 통제할 것이냐 아니면 창피를 당할 것이냐는 문제가 된다. 이를 자율성 대 수치심 단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일본 문화에서 이 질문은 자제심의 문제로 나타난. 일본의 자연환경은 포악할 뿐만 아니라 인색하다. 우리나라였다면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어쩔 수 없이 먹던 재료들이 일본에서는 당당히 중요한 식재료로 사용되는 것도 이런 척박한 자연환경과 무관치 않다. 이는 와비라는 일본특유의 미학에서도 엿볼 수 있다. 와비란 보통 다도에서 쓰는 말인데, ‘가난함이나 부족함 가운데에서도 만족할 거리를 찾아내려는 태도라고 한다. 혹시 <맛의 달인>이라는 일본만화를 보신 분이라면 그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와 갖은 양념을 넣어서 국밥과 찌개를 만드는 우리와는 달리, 일본의 요리는 대부분 기본재료 그 자체를 잘 다듬고 익혀서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끌어내는 방식이다. 단적으로 우리는 멸치를 푹 우려내서 멸치국물을 만들지만, 일본은 가다랭이포를 끓는 물에 슬쩍 담갔다가 꺼내어 국물을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 재료의 맛이 진하기 때문에 그 배경이 되는 국물도 진해야 하지만, 일본 요리에 그렇게 진한 국물을 쓰면 원재료의 맛이 아예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풍성한 재료를 풍성하게 조리해 내는 게 우리 음식이고, 빈약한 재료를 정성들여 예쁘게 꾸며 올리는 것이 일본음식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주도성 vs 죄책감

세상에 대한 기본적 신뢰감도 얻고 자기 몸을 통제할 줄도 알게 되면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 세상을 탐색하고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찾아보기 시작한다. 여기 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사고를 치게 되고 처벌을 받는다.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어디가까지가 내게 허용된 영역이고, 어디 부터는 금지되어 있는지를 배운다. 규칙을 따르지 않고 금지를 어기면 나쁜 놈이라는 생각도 여기서 시작된다. 이게 주도성 대 죄책감의 문제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때 엄청난 주도성을 발휘한 적이 있다. 2차 대전 때 일본은 청나라도 이기고, 러시아도 이기고, 미국에게도 큰 타격을 입히고, 아시아 전역을 점령했었다. 문제는 그게 도를 지나쳐 결국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폭탄을 맞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도를 넘은 주도성의 처벌을 확실하게 받은 셈이다. 이 영화에서는 침몰하는 일본 국민들을 세계 각국에 대피시키려는데 그 나라들이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약 실제로 일본이 가라앉는다면, 전 세계가 일본을 외면할까? 물론 요즘 일본이 하는 짓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일본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 같은 걸 고려하면 협상의 여지는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본은 철저하게 버림받는 존재로만 비춰진다. 원작자가 일본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이런 설정을 제시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이 일본 관객들에게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는 건 심리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첫 번째는 다른 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보여줄 태도를 반영한다는 점. 자기들이 딴 나라의 난민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심정인 것처럼, 다른 나라들도 우리를 그렇게 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러났다는 얘기다. 두 번째는 일본이 국제 사회에 가지고 있는 자책감이다. ‘우리나라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아무도 환영하지 않아.’ 라는 믿음이 나타난 셈이다.

 

영화 <일본침몰>을 보며 지진과 해일, 태풍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일본 사람들이 측은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일본을 불쌍히 여길 처지는 아니다. 우리는 천재지변이 별로 없는 대신에 사람들이 직접 재난을 일으키는 동네이지 않은가. 천재지변이 드물다는 것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 드문 태풍이 한번 제대로 오면 일본보다 훨씬 크게 타격을 입으니 말이다. <일본침몰>과 우리영화 <괴물>을 비교하면 늘 나오는 말이 일본에서는 나름대로 재난으로부터 국민들을 지키려는 공권력의 역할이 부각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시스템은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주인공 가족들만이 외롭게 싸운다는 차이가 있다는 거다. 시스템에 의존하고 규칙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일본 사람들이 더 안쓰러운지, 아니면 시스템을 믿지 못하고 자력구제의 원칙에 매달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안쓰러운지는 모를 일이다. mind

 

장근영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발달심리 Ph.D.
연세대 심리학과 졸업, 온라인 게임이용자 한일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종시 소재 국책연구기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 중. 심리학자, 글쟁이, 그림쟁이, 영상 중독자, 밀리터리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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