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그 먹먹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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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 그 먹먹함이란
  • 2019.08.28 15:30
옛 시절의 인연은 다시 올 수 있는 것일까? 박혜연 박사는 아이돌 가수 핑클의 이야기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시절인연의 섬세한 의미를 들려준다.

4인 4색의 여성들

1998년에 'Blue Rain'이라는 1집 앨범으로 데뷔하여 2005년에 그룹 이름의 마지막 앨범을 낸 4인조 여성 아이돌 그룹 핑클은, 그간 해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딱히 같이 활동을 하지도 않은 채 자연스럽게 소속사와의 계약 관계가 끝났다. 그들이 십 년 이상 각자의 길을 걷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행보를 지켜봤다.

이효리가 '텐 미닛'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하여 엄청난 인기를 누리다가 돌연 제주도에 자리잡고 ‘효리네 민박’이라는 민박집을 운영하기도 했고, 옥주현이 요가를 열심히 하는가 싶더니 결국 큰 뮤지컬 무대에서 주연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성유리가 연기력 논란 속에서도 드라마의 여주인공 역할을 거듭하며 연기자로 성장하다가 힐링캠프 MC를 맡아 본인의 자리를 꽉 채웠으며, 이진은 드라마와 영화의 조연으로 고전하던 끝에 일일연속극 ‘빛나는 로맨스’의 주연을 맡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15%를 웃도는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네 명은 <무한도전>의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무대도 비껴가며 예능 프로그램에조차 한번을 같이 하지 않아서 불화설을 자초했다. 어느 방송에선가 이효리가 “(다른 멤버들에게) 왜 쉽게 연락하지 못할까. 나도 잘 모르겠다”며 눈물짓는 모습을 보이도 했다. 드러날 정도의 큰 갈등은 아니더라도 이들의 마음 속에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있구나, 하긴 어린 시절 오랜 시간을 함께 했으니 그게 좋기만 하진 않았겠지, 뭐 그런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핑클이 다시 모였다

그러다 JTBC에서 7월 중순부터 <캠핑클럽>이라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핑클 네 멤버가 캠핑카를 타고 직접 번갈아 운전을 해서 진안 용담섬 바위, 경주 화랑의 언덕, 울진 구산 해수욕장 등 풍광 좋은 장소를 찾아 다니며 캠핑하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어떤 것을 보게 될지 예상 가능했다. 멋진 풍경과 그 속에서 우왕좌왕 캠핑하며 밥해 먹고 자고 노는 모습, 아침에 자다가 깬 꾸미지 않은 모습 같은 것들을 보여주겠구나, 그러다 자연스럽게 묵은 갈등이 꺼내져서 노련한 방송인들이지만 어느새 솔직하게 눈물 지으며 속내를 얘기하는 기회를 시청자들과 공유하겠구나, 그 와중에 핑클이 사용하는 캠핑 용품이나 옷, 화장품 등의 소지품들이 완판 되겠지.

예상대로 멋진 풍경이 펼쳐졌고, 캠핑 장비 지름신이 오다가 가다가 했고, 우리가 십대의 모습부터 알고 있는 네 명의 미녀들이 삼사십대가 된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3회. 캠핑카가 경주 화랑의 언덕에 자리잡은 첫날 밤, 불 앞에서 뭔가를 한 잔씩 마시며 담소하는 장면. 이효리가 그저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핑클 활동을 마치고) 혼자 활동하면서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신이 나고 너무 재미있었다. 음악이며 옷이며 모두 내 맘대로였다." 그렇게 웃으며 얘기하던 그가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때 너희들을 끌어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땐 너희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미안하다." 고 하며.

그 장면에서 카메라는 당연히 다른 멤버들의 표정도 같이 잡았는데, 그때 성유리와 옥주현의 눈가에 흐르던 눈물은 구슬 같이 맺혔다가 또르르 흐르거나 예쁘게 훌쩍이는 눈물이 아니었다. 더 이상 어리다고 할 수는 없이 나이든 여자의 얼굴에서 피부 밑 어딘가에 고여있던 것 같은 물이 눈가 주름 사이로 베어 나오는 듯하다가 다시 스미는 것 같은 그런 눈물.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이들이 너른 잔디밭의 일부가 되어갈 때, 천재적인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 선우정아의 노래 ‘그러려니’의 전주인 피아노 연주가 흐르기 시작했다.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끊어진 연에 미련은 없더라도 그리운 마음은 막지 못해.

잘 지내니, 문득 떠오른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겠지, 대답을 들을 순 없지만 쓸쓸히.

그러려니.

시절인연

시절인연時節因緣은 중국 승려 운서주굉雲棲株宏,1535~1615이 편찬한 『선관책진』禪關策進 중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자연히 부딪혀 깨쳐서 소리가 나듯 척척 들어맞으며 곧장 깨어나 나가게 된다"라는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인연은 때가 맞아야 이루어진다는 뜻이겠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를 따르는 업보의 종류를 시기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현생에 과업을 지어서 그 대가를 현생에 받는 순현업順現業, 전생에 지은 과업으로 인해 금생이나 내생에 대가를 받는 순생업順生業, 선업이나 죄업의 대가를 여러 생에 걸쳐 받는 순후업順後業을 통칭하여 삼시업三時業이라고 한다. 인연이 시절을 만나려면 이와 같은 과거와 현재의 업과 보의 때가 모두 맞아야 하므로, 그리하여 이제서야 만나게 된 인연은 우연이 아니고 그야말로 때를 만나 도래한 것이겠다.   

이처럼 시절인연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으니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거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 듯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 말이 좀 다르게 다가온다. 그 시절의 인연. 즉, 그 시절이었으니 가능했던 인연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물 흐르듯이 살다 보면 한 때 지극한 마음으로 맺었던 인연도 자연히 멀어지거나 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 시절이 끝나면 당시에 맺은 인연이 끝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관계를 유지 혹은 지속하는 것

사회심리학자들은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을 네 가지로 정의한다 . 첫 번째 정의는 관계를 말 그대로 포기하지 않거나 끝내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정의는 관계를 특정 상태로 유지하는 것으로, 내가 우리 동네 빵집 사장님과 빵을 살 때에만 웃으며 인사하는 관계를 그 이상 발전 시키지도 않거니와 인사조차 안 하는 관계로 바꾸지도 않는 것을 뜻한다. 세 번째는 관계를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어서, 자타공인 절친과 계속 서로 절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관계를 개선하거나 복구하는 것으로, 크게 싸운 후 절교 했던 친구에게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에 이처럼 다양한 형태가 있다면, 우리가 관계를 포기하거나 끝내는 결정을 하기 위한 고민을 덜 해도 되겠다. 그 관계를 어떤 상태로 유지할지 좀 더 유연하게 정할 수 있겠고, 마음의 여유가 있거나 체력이 허락하는 한 내가 원하는 식으로 관리하며 지속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어쩌면 핑클은 십 년이 넘도록 ‘해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오랫동안 그 관계를 처분하지 않고 갖고 있기를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지금은 새로운 시절을 만나 서로 인연을 지속하는 새로운 기회를 얻은 것일 수도 있다. 

그 시절 우리가 몰랐던 것들

초등학교를 다닐 때(사실은 국민학교였다) 외동딸인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의 집은 큰 아파트 단지 내에 따로 조성된 타운하우스였고, 그 집 이층에 친구 방이 있었다. 친구의 엄마는 딸을 쫓아다니며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그런 분이었고, 그 집엔 매일 친구만의 우유와 요구르트가 배달되었다. 네 남매 중 둘째 딸로 자라며 이층집커녕 내 방도 없는 처지였던 나는, 어린 나이에 미처 부러운 마음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채로 그 친구네 집에 밥 먹듯이 놀러 갔다.

어느 날의 등교 길. 맥락도 기억나지 않는 얘기 중에 그 친구는 내게 너는 말라서 좋겠다고 했고, 나는 그 대답으로 너는 통통하니까 얼마나 좋냐고 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사실 곱슬머리에 피부가 하얗고 통통해서 정말 귀여웠는데, 사실 어렴풋이 기억난다. 친구가 빼빼 마른 나를 부럽다 할 때 내가 떠올린 그 아이의 요구르트와 그걸 먹이려고 쫓아다니는 그 애 엄마, 그리고 막연한 부러움과 질투의 감정. 그리고 친구는 울어버렸다. 

라파엘 전파 화가 밀레이가 나뭇꾼의 딸과 시골 지주의 아들 간의 순진무구한 사랑을 그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결말은 비극적이었다. 그들의 인연도 딱 정도였던 셈이다.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The Woodman's Daughter, 1851,  캔버스에 오일, 89 *  65 cm, 런던 Guildhall Art Gallery  소장.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화가 존 밀레이가 나뭇꾼의 딸과 시골 지주의 아들 간의 순진무구한 사랑을 그렸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시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탄에 이르게 되자 여자는 미치고 만다. 그들의 인연도 딱 그 정도였던 셈이다.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나뭇꾼의 딸', 1851, 캔버스에 오일, 89 ⅹ 65 cm, 런던 Guildhall Art Gallery 소장.

우리는 모른다. 내가 저이에게 상처 주고 있는 것을 잘 모르고, 저이가 나에게 왜 상처를 주는 지도잘 모르고, 내가 상처를 받는 게 맞는지도 헷갈린다. 서로 처한 상황이 다르고 당시의 마음 형편이 제각각 이었을 뿐인데, 의도치 않은 말이 가시가 되고 때로는 칼날이 된다. 그러는 사이에 서로 따져 묻기 어렵고 확인하기 어려운 생각과 마음이 쌓여서 관계가 멀어진다.

둘도 없던 학창 시절의 친구와 진로가 갈리면서 공연히 멀어지는 것처럼, 한 시절의 인연이 끝나거나 멀어질 때에는 사실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당연한 이유들이 있다. 그 시절을 지나 물어볼 기회, 설명할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우리는 대개의 멀어진 관계에서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다. 많은 시간을 지내며 살아가던 어느 지점에 어렴풋이 이해하게 될 뿐이다. 그 때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그 친구는 그래서 그랬나 보다, 그래 서로 형편이 달랐구나. 

"내가 미안할 때가 많아."

캠핑클럽 4회. 경주 화랑의 언덕에서의 두 번째 밤을 지내고 새벽에 일출을 보다가 이효리가 이진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받아주고 이해하냐고. 이진은 대답한다. "아니야. 나도 불편할 때가 많았어. 그런데 좋을 때가 훨씬 더 많고. 그리고 항상 돌이켜보면 내가 미안할 때가 많아.” 늘 멤버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고, 서로 알게 모르게 상처 주는 게 많았을 거라고. 물어볼 기회, 설명하고 들을 기회가 생기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다시 모인 핑클의 캠핑클럽은 우리가 잘 몰랐던 멋있는 캠핑 장소와 '잇템' 이상의 감동적인 정보를 준다. 인연의 시절은 다시 올 수 있다는 것, 그 시절의 인연이 다른 시절에 만나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나와 한 시절을 공유한 오랜 친구는 참 좋다는 것. mind

    <참고문헌>

  • Dindia, K., & Canary, D. J. (1993). Definitions and theoretical perspectives on maintaining relationships. Journal of Social and Personal Relationship, 10, 163-173.
박혜연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 Ph.D.
대학병원 공공의료사업단에서 공직자 및 일반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관리와 정신건강 문제 예방 및 치료를 위해 일하고 있는 임상심리전문가이다. 경기도 소방심리지원단 부단장, 보건복지부 전문 카운셀러를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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