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이 엄마의 수상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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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이 엄마의 수상 소감
  • 2019.11.28 12:00
누구나 다 역경을 딛고 마침내 성공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줄곧 인터뷰어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내내 관객이나 독자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인터뷰이 또는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던 사람에게도 다른 역할들이 기다리고 있다.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동백이가 끝났다

모처럼 정 붙이고 보던 KBS2 TV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끝났다. 마지막 회 시청률이 20%를 넘었다고 한다. 범죄 스릴러물의 골격에 로맨스 요소까지 탄탄히 갖추어 이야기의 전개가 매 회 흥미진진한데다가, 미혼모, 부모 없는 아이, 편부모 가정 등 사회적 마이너리티를 품는 시선이 단편적이지 않고 극 전체를 관통하는 드라마였다. 특정 성의 섹시함을 소비하지도 않고, 미천한 아가씨가 백마 탄 왕자님과 가부장제의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돈봉투로 싸대기를 맞는 일도 없고, 근친상간인 듯 아닌 듯한 로맨스의 줄을 타며 막장으로 치닫지도 않으니, 간만에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었다.

동백이 엄마, 배우 이정은

일곱 살에 엄마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입양과 파양을 거쳐 어른이 되고 미혼모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동백이가 있다. 동백이의 엄마는 가난과 역경 속에서 딸을 고아원에 맡기고는, 다시 찾으러 갔다가 입양 보냈다는 얘기를 듣는다. 잘 사는 줄만 알고 찾지 않다가 파양된 것을 알고 다시 찾아가지만, 먼 발치에서 지켜만 본다. 그러다가 신장병으로 죽을 날을 받아놓고 치매인 척 하며 딸의 삶으로 들어온다. 그 신산한 삶을 사는 엄마를 맡은 배우는 요즘 대세 조연 이정은이다.

연극판에서 오래 연기와 연출을 했다더니, 그 연기가 참 훌륭해서 몰입하기에 거슬리는 게 없었다. ‘(오갈 데가 없어서) 딱 한 번 너를 안고 서울역에서 잤고 다음날 너를 버렸다’고 말하는 장면은 어찌나 절절한지 두 번 보면 두 번 다 틀림없이 울게 된다. 그 밤에 한데에 누워 어린 딸을 얼마나 틈 없이 깊게 품었을까 상상이 되어 눈물을 막을 방법이 없다. 게다가 이 배우는 온 몸으로 연기를 한다. 다낭성 신장 질환을 앓으며 처음 동백이를 찾아왔을 때나 투석 받기 위해 병원에 들어가 있을 때에는 그야말로 손가락, 손목까지 땡땡 부어있더니, 신장 이식 수술을 마치고 회복한 마지막 회에서는 얼굴 붓기가 쪽 빠져 있었다.

그동안 한번을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 같은데 어디서 어떻게 저런 내공을 쌓았을까, 저 사람에게 연기란 뭘까, 연기자라는 것은 어떤 일일까, 궁금해졌다.

<동백꽃 필 무렵> 마지막 회가 방영된 날, 동백이 엄마가 청룡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호명되어 상을 받으러 무대에 올라가는 이정은 배우는 위풍당당했다. 검은색 긴 바지 정장을 입고 머리를 올백으로 깔끔하게 넘긴 모습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수상 소감마저 시작부터 “요즘 너무 늦게 이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같다는 말을 듣는데, 스스로는 이만한 얼굴이나 이만한 몸매가 될 때까지 그 시간이 분명히 필요했다고 생각한다”며 세상없이 쿨시크했다.

그런데 그렇게 쿨시크하던 그가 곧이어 사실은 두려웠다는 소회를 밝히며 눈물을 비쳤다.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에 다녀온 후 너무 주목받게 되니까 겁이 났다며, 자만할까 두려워서 다른 작품에 몰입하려고 노력하며 서울을 떠나 있었다고, 그런데 이 상을 받고 보니 며칠 쉬어도 되겠다고 했다. 관심과 인정을 받아 자만할 것을 걱정했다면 상을 받고는 더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자만할까봐 겁이 나서 일을 열심히 했는데 상을 받고 보니 며칠 쉬어도 되겠다니, 보통은 자만하지 않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하지 않나. 엉뚱한 전개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이 찡하다.

자만이라는 말

‘자만’ 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다른 뜻이 있다. 스스로 흡족하게 여긴다는 뜻(自滿)과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 있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며 뽐낸다는 뜻(自慢)이다. 전자의 ‘자만’에서 ‘만(滿)’은 가득하다, 차다, 가득 차있다는 뜻이고, 후자의 ‘자만’에서 ‘만(慢)’은 거만하다, 게으르다, 거칠다는 뜻이다. 배우 이정은은 관심과 인정을 받으며 스스로 거만하고 게을러질까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상을 받고 보니 며칠 쉬어도 되겠다는 것은, 열심히 하는 것을 며칠 쉬겠다는 말이 아니라 자만할까 두려운 마음을 며칠 쉬겠다는 말인가?

마침 2003년 <한겨레21>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었다. 인터뷰이는 이정은, 인터뷰어는 역시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인 오지혜였다. 당시 이정은은 동료들과 십시일반하여 극단을 만들고 작품을 연출하여 공연했나 보다. 아마도 전작은 망했던 모양이고. 그럭저럭 예상 가능한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쭉 읽어 내려가다 어떤 문단을 만나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솔직히 연출로서의 기량보다 배우로서의 기량이 훨씬 뛰어난 그녀가 굳이 이런 프로젝트를 저지른 진짜 동기가 궁금했다. 배우로 안 팔리니까 연출로 전향을 하려는 거냐는 나의 속보이는 질문에 그녀는 포비 같은 눈을 깜박거리며 대답한다. 뭐가 되려고 뭔가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단다.”

일단 이 부분에서 버퍼링 상태가 되었다. 뭐가 되려고 뭔가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니!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말을 두 마디 이상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다음으로 받는 질문이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 아닌가! 비슷한 연배의 서로 사정 다 알만한 동료 배우가 슬쩍 눙치듯 묻는, 솔직히 이 바닥에서 이름 있는 배우가 되는 게 어려울 것 같으니까 살짝 방향 바꿔서 연출가로 대접받고 싶은 거 아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다니, 어쩔 수 없이 우문을 해야 했던 인터뷰어 오지혜는 더할 나위 없는 시원한 대답을 듣고 속으로 박수를 쳤을 것 같다. 이어지는 내용은 더 기가 막히다.

“그저 더 나이 먹기 전에 같은 고민을 하는 동료들과 ‘진짜 연기’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싶었을 뿐이란다. 진짜 연기라는 게 정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물으니 물론 아니란다. 그러나 ‘자아’가 깎여져서 솔직함만 남게 됐을 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지 않겠느냐는 거다. 그 소통의 그 대상이 옆 사람이건 관객이건 말이다.”

내 초라한 자아의 거대한 방어막이자 겉포장지가 어쩔 수 없이 깎여 나가고 찢어져 민낯을 가릴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걸 드러내는 일은 실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대개는 민낯이 드러날까 숨기 바쁠 텐데 그걸 드러내 그 솔직함을 소통의 도구로 삼겠다고 한다. 본인의 본업인 연기라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이 인터뷰 기사를 읽고 나니,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을 받고 보니 자만할까 두려워하길 며칠 쉬어도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아마 그 며칠은 자만(自慢)의 두려움에서 비껴선 자만(自滿)의 시간이리라. 그렇다면 이 배우는 설사 청룡영화제 상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늘 살던 대로 살며 진짜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자만할까 두려워하고, 스스로 만족했다가, 또 두려워하고 또 고민할 것이었다.

역경을 포기하지 않고

누구나 꿈꾼다. 역경을 딛고 끝내 포기하지 않은 결과, 결국 성공하는 것을. 애쓰고 애써서 원하는 것을 얻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를. 수상자나 인터뷰이가 되는 빛나는 순간을 맞이하기를.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생각으로 버텨왔는지, 지금의 성취가 어떤 의미이고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그러나 누구나 다 인터뷰어 앞에 앉거나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줄곧 인터뷰어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내내 관객이나 독자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인터뷰이 또는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던 사람에게도 다른 역할들이 기다리고 있다.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어느 한 단면 언저리에서 잠시 구경할 뿐이다. 누구에게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가 있지는 않는 것처럼, 한번 빛났다고 해서 다음 국면이 없는 것은 아니고, 삶은 지지부진 지속된다. 미취학 어린 시절에 미적분을 풀던 신동도 나이가 들면 미적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삶을 살아 내며 중년이 되듯이.

나 서 있는 데서 발을 붙이고 둘러보면

그 때 그 시절에 마침내 성공을 했건 못 했건, 문득 힘들었던 그 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이제는 다 지나와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제서야 알게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일 거다. 당시에 친구와 나누던 대화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그 때 그 커피가 얼마나 맛이 좋았는지, 늘 고개 숙인 채 지나쳤던 그 곳의 사시사철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같은 것들. <동백꽃 필 무렵>의 마지막 회에서 동백이는 집 마당에 앉아, 관절염 없고 저녁 잠 없을 때 부지런히 놀아야 한다며 아끼지 말고 야금야금 행복한 걸 다 찾아 먹어야 한다는 엄마에게 말한다. 행복은 쫓는 게 아니라 음미하는 거라고. 나 서 있는 데서 발을 붙이고 둘러보면 세상이 꽃밭이라고. 이 드라마의 작가는 현재 임상춘이라는 필명을 쓰는데 다음 작품에서는 또 다른 이름을 쓸 거라고 한다. 아버지가 자식 자랑을 하고 싶어하는데 열심히 말리고 있단다. 아마도 뭐가 되기 위해 뭔가를 하지는 않는 사람인 것 같다. mind

박혜연 분당서울대병원 공공의료사업단 임상심리 Ph.D.
대학병원 공공의료사업단에서 공직자 및 일반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관리와 정신건강 문제 예방 및 치료를 위해 일하고 있는 임상심리전문가이다. 경기도 소방심리지원단 부단장, 보건복지부 전문 카운셀러를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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