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심리학자의 코스프레 (feat. '원피스'의 고잉 메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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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심리학자의 코스프레 (feat. '원피스'의 고잉 메리호)
  • 2020.02.17 12:00
만화를 좋아하는최훈 교수가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원피스에 나오는 고잉메리호가 운하를 타고 올라가 리버스 마운틴 정상으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이 실험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어디서 만화 같은 불량 도서를 읽고 있냐? 모두 압수야!

고등학교 시절 우리 반 어느 녀석이 학교에 만화책을 가져 왔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그리고 가지고 온 만화를 모두 빼앗겼다. 학교에 만화책을 가지고 오다니, 어찌 보면 압수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만화 같은 불량 도서’라는 말에 괜히 욱한 마음이 생겼다. 갑자기 나의 입술이 움직였다. “선생님! 만화는 불량 도서가 아니에요! 저는 ‘테르미도르’를 통해서 프랑스 혁명사를 배웠고,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통해 그리스-로마 신화를 배웠고, ‘각시탈’을 통해서 민족의 혼을...” 선생님의 싸늘한 눈빛. 그때 나는 그냥 조용히 말을 뭉갰다. 만화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핸드폰도, 인터넷도, 컴퓨터도 없었던 그 시절. 지금과 비교해보면 그때 뭐 하고 놀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놀았다. 과외조차 금지되었던 시절이니 딱히 놀 거리는 없었어도, 놀 시간은 많았다 ^^;; 어떤 친구들은 수업 끝나고 운동장에서 축구나 농구를 열심히 하며 놀았고, 어떤 친구들은 오락실로 달려갔으며, 어떤 성숙한 친구들은 당구장과 같은 당시 어른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곳으로 몰래 달려가기도 했다. 나의 선택은 만화였다.

코스프레를 즐기는 교수

대학생이 되고, 대학원생이 되고, 유학생이 되고,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된 지금까지도 만화에 대한 나의 사랑은 여전하다. 만화를 좋아하다 보니 이런저런 부가적인 것들에도 관심이 생기게 된다. 그중 하나는 ‘코스프레’이다.

할로윈에서 조커로 분장했던 모습. 지도 교수 잘못만난 우리 대학원생들은 할리퀸이 되었었다.
할로윈에서 조커로 분장했던 모습. 지도 교수 잘못만난 우리 대학원생들은 할리퀸이 되었었다.

코스프레는 만화나 게임에 나오는 등장인물로 분장하는 것을 말한다. 코스프레라는 말 자체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어서 일본 문화라고만 알고 있지만, 사실 코스프레는 영어로 costume play로 영국에서 죽은 영웅들을 추모하는 예식에 그 기원이 있으며, 미국에서 만화의 등장인물로 분장하는 형태로 발전된 일종의 분장 놀이이다. (코스프레는 costume play를 일본식으로 합성한 말이기 때문에 일본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엉뚱한 일을 즐기는 나의 경우, 현재 근무하고 있는 대학에서 지도 학생들과 함께 하는 할로윈 파티에서 코스프레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명색이 지각 심리학을 전공하는 심리학과 교수로 왠지 얼굴에 분칠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사실 얼굴 분장도 일종의 착시 현상으로 볼 수 있으니, 전공과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조금은 다른 종류의 코스프레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아끼는 캐릭터 중 하나를 골랐다. 바로 일본 만화 ‘원피스’의 고잉 메리호.

원피스 해적들이 타고 다녔던 고잉 메리호의 멋진 모습이다. 작은 범선이지만 그만큼 기동력이 뛰어났고 4대 함포를 장착하고 있어 교전도 가능했다. 

원피스는 1997 7월에 연재를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연재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총 4 6천만 부가 팔린, 일본 만화 역사에서도 기록될 만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작품이다. 해적왕을 꿈꾸는 루피가 동료들과 함께 위대한 항로에 들어가서 갖은 모험을 하게 되는 내용으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매력적이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고잉 메리호’로 주인공인 루피 일당이 타고 다녔던 배이다. 안타깝게도 44권에서 최후를 맞는다. 

연구실에서 재현한 고잉 메리호

고잉 메리호와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내가 코스프레를 하고자 했던 장면은 위대한 항로로 진입하는 장면이다. 위대한 항로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리버스 마운틴이라는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산에 운하가 있는데, 이를 통해서 배가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나도 우리 실험실의 대학원생 동지들과 함께 만들어 보았다. 산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잉 메리호의 모습을. 그 결과는 아래처럼 성공적이었다.

연구실에서 재현한 고잉 메리호와 리버스 마운틴. 

고잉 메리호에 바퀴만 달았을 뿐, 동력을 만들어내는 아무 기계적 장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잉 메리호는 산 정상으로 향하는 운하를 거슬러 가뿐하게 올라갔다. 짝짝짝.

사실 이 코스프레는 일종의 착시이다. 실제로 고잉 메리호는 오르막길을 오르지 않았다.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로 꺾여져 있어 오르막길처럼 보이는 내리막길로 내려갔을 뿐이다

고잉메리호와 리버스 마운틴의 실재 재연 모습.
고잉메리호와 리버스 마운틴의 실재 재연 모습.

사실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은 실제 세상과 동일하지 않다. 고잉 메리호의 예처럼 실제 내리막길이 오르막길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도깨비 도로’이다. 도깨비 도로는 아무리 봐도 오르막길인 것 같은 길에서 차를 중립 기어로 하면 그냥 차가 오르막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로이다.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도깨비 도로를 다뤘는데, 결론은 그 길은 사실 오르막길이 아니라 내리막길이었다는 것이다. , 오르막으로 보이는 내리막길이라는 것이다. 도깨비 도로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주변 환경의 영향 때문이다. 도로 주변에 있는 나무와 풀들이 바람이나 아니면 물길의 영향으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기울인 채로 자라게 되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내리막길인 도로가 마치 오르막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착시의 원인

고잉 메리호 착시는 주변의 물체에 의해 유도된 착시가 아니라는 점에서 위의 설명에 해당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 눈에는 저렇게 이상하고 기묘하게 생긴 내리막길이 곧게 뻗은 오르막길로 보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밋밋한(?)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3차원의 입체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 맺힌 세상은 어떨까? 우리의 평면적인 눈에는 그냥 2차원의 평면적인 이미지가 맺힐 뿐이다. 현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3차원의 정보는 우리 눈에서는 일단 소실되어 버린다. 3차원의 세상이 2차원으로 찌그러(?)지는 과정에서 모호성이 생긴다. , 서로 상이한 두 개의 물체라도 우리의 눈에는 동일한 이미지로 맺힐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쉬운 예를 들면, A라는 물체는 정사각형이고, B라는 물체는 사다리꼴이라고 하자. 하지만, 정사각형 A 3차원의 입체 공간에서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어느 순간 사다리꼴인 B와 동일한 형태로 우리 눈에 보일 수 있다.

고잉 메리호의 착시에서 실제 고잉 메리호가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옆으로 심하게 휘어진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이 길을 어떤 특정한 높이와 각도에서 보면 곧게 뻗어있는 오르막길과 똑같은 형태로 우리의 눈에 맺히게 된다. 그래서 사실, 이 고잉 메리호 착시 제작에서 가장 힘든 작업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카메라를 열심히 돌려가며 곧게 뻗은 오르막길로 보이는 시점view point을 찾는 과정이었다.

경험한 대로 믿어버리기

이처럼 우리의 눈에 맺힌 이미지는 모호성을 가진다. 상이한 물체가 동일한 형태로 맺히기 때문에, 눈에 맺힌 이미지의 원래 주인공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야 하는 일명 ‘역투사 문제inverse projection problem’가 발생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경험했던 경우를 바탕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고잉 메리호 착시의 경우에서는 같은 형태로 우리 눈에 맺혔던 대부분의 상황이 곧게 뻗은 오르막길이었기 때문에 오르막길이라고 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고잉 메리호 착시는 카메라로 촬영했을 때에만 잘 발생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눈은 3차원을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3차원의 세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지각하고, 문제없이 살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눈이 2개이기 때문이다. 2개의 눈은 보통 6cm 정도 떨어져 있어서, 두 눈에 맺힌 이미지가 조금은 달라진다. 따라서, 서로 다른 2개의 물체가 동일한 형태로 맺히게 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게 발생하게 되고, 실제로 고잉 메리호 착시 모형을 보게 된다면 여간해서는 곧게 뻗은 오르막길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저런 착시를 보며 우리가 눈이 정확하지 않다고 너무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생각보다 우리의 눈은 세상을 보는데 부족하지 않으니까! mind

* PS. 혹시 원피스의 감동과 함께 착시를 보고 싶다면 다음의 페이지를 방문해 보시길. https://www.youtube.com/watch?v=NUbCUuoCulo&t=3s 

최훈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 인지심리 Ph.D.
연세대 심리학과에서 학, 석사를 마치고, Yale University에서 심리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이후 Boston University와 Brown University에서 박사 후 연구원 과정을 거쳐 현재 한림대 심리학과에 교수로 재직 중 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만화, 아이돌, 스포츠를 지각 심리학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 평생 덕질을 하듯 연구하며 사는 것을 소망하는 심리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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