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그 잊혀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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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 잊혀진 기억
  • 2019.07.11 10:31
우리들은 자신에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 내용은 거의 모른다. 그래서 어린 시절은 기억이 없는 기억 혹은 잊혀진 기억이다. 왜 그럴까?
Edouard Vuillard_First steps 1895-1900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 1864~1940. '걸음마First Step'. 35.5 x 51.4 cm. 1890. 개인소장. 

얼마 전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 큰 아이를 등, 하교시키는 일로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집 바로 앞의 놀이터에 친구들과 같이 내보내 놓고도 마음이 조마조마한데, 과연 이 녀석을 언제쯤 학교에 혼자 보낼 수 있을지 아내와 나는 그저 막막하고 두렵기만 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 누가 기억할까

문득 나는 어떻게 부모님의 도움 없이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뾰족한 옷핀으로 이름표와 콧물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찬바람 부는 운동장 한 가운데 다른 아이들과 서 있었던 기억은 있는데 도무지 그 이후 등, 하교 길이 어땠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몇 일 안 가서 어머니와 전화 통화 중 문득 생각이 나서 여쭈어 보았다, “어머니,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언제까지 학교에 데려다 주시고 데려오셨어요? 학교가 가깝지 않았는데 힘드시지 않았어요? 제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혹시 어머니는 기억나시는지 해서요…….”. 어머니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글쎄다, 뭐 너희 형, 누나가 있어서 아마 같이 보내거나 했을 텐데, 나도 어떻게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네. 아마 처음 몇 일은 데려다 줬겠지 뭐…...”.

물론 40년이 넘은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어머니는 당시 어른이셨으니 적어도 분명히 기억하고 계시리란 내 짐작은 완전히 빗나간 셈이다. ‘그래 오래된 일이니까…….’하면서 대부분 얼버무리고 넘길 일이지만, 기억을 연구하는 나로서는 엉뚱한 궁금증이 생겼다. 왜냐하면 내 경우 우리 아이들이 기어 다니고 걸음마를 연습하던 고작 몇 년 전 일들이 대부분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이들이 한 두 살 때 촬영해 둔 동영상과 사진들을 가끔 들여다 볼 때면 심지어는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소하단 느낌까지 들 때가 있다. 물론 영상과 사진 속의 애들이 반갑고 사랑스러운 건 지금이나 그 때나 마찬가지다.

완벽한 망각의 세계

물론 우리가 과거의 일을 대부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복잡 다양한 하위 체계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말로 줄줄이 읊을 수 있는 명시적 기억과 소위 몸에 배어있다고 할 수 있는 암묵적 수준의 기억 등이 있다. 또 여기에 속한 다양한 기억유형 등등 이론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한 학기 내내 강의를 해도 모자랄 판이다. 이 중 많은 것들이 분명하고 적절한 기억 단서가 주어지지 않으면 사실상 명시적으로 회상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의 영유아기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한 망각infantile amnesia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언어 및 인지, 발달심리학적 해석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쥐를 대상으로 한 동물 실험에서 오히려 해당 기억들이 적어도 신경세포 수준hippocampal cells에서는 남아있다고 보고한 연구도 있다.

엉뚱하긴 하지만, 부모의 경우에도 아이들의 성장 과정 동안 본인들의 육아 경험에 대한 완벽에 가까운 망각을 보고한 연구 사례가 있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호기심에 관련된 몇 가지 주제어로 학술 논문들을 검색해 보았지만 내 직관이 예측하는 부모의 ‘양육기억 상실(parenting amnesia)’과 같은 현상을 보고한 연구들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수 년 전 내 아이들에 대해 어찌 보면 무책임하고 부끄러울 정도의 나의 망각 증상에 대한 원인은 무엇일까?

기억 못하는 이유

인간의 기억에 대한 연구들은 적어도 개인의 망각은 기억 정보의 완벽한 상실보다는 유사한 기억 정보들로부터의 간섭 및 이러한 간섭을 억제하고 해당 기억 정보를 제대로 끄집어 내기 위한 적절한 단서의 부재에 의해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장기기억 형성에 있어서 규칙적인 반복 학습과 숙면의 영향력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이처럼 정상적이고 적절한 학습 과정을 거쳐 형성된 기억은 사실상 영구적으로 기억저장소에 남게 된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큰 애와 작은 애 출산 이후 아내와 내가 아이들과 보낸 하루하루는 누구나 공감하듯이 거의 전쟁에 가깝다.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는 아이 엄마도 그렇거니와 학교 일을 마치고 저녁시간의 육아 부담을 나눠야 하는 내 입장까지, 그야말로 하루하루 변화무쌍한 문제들을 해결하다 보면 머리 속에 무슨 기억을 남겨 둘 겨를이 없었다.

기억 연구자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상황은 평생 동안 선명하게 회상할 수 있는 명시적 기억을 생성하기에는 너무나도 가당치 않은 여건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던 행복하거나 힘들었던 감정만 아련히 남은 채 소소한 기억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망각이 주는 혜택

그렇다고 이러한 망각이 마냥 아쉬운 것만은 아니다. 어찌 보면 이런 세세한 것들을 기억 저편에 묻어두는 것이 오히려 아이들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과정에서 경험했던 극단적인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에 대해 초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시시콜콜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은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이 마냥 사랑스럽지만은 않을 것 같다.

결국 부모로서 아이의 어린 시절에 대한 육아 과정의 기억을 어느 정도 잃어버리는 것은 오히려 아이가 성장해 가는 현재 시점에 집중하고 심리적으로 늘 발달하고 있는 아이에 대한 편견이 없도록 방지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추측도 해보고 싶다.

또한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의 세세한 기억들이 모조리 남아있다면 과연 그 아이가 성장한 이후에 쉽게 내 곁을 떠나게 하기도 어려울 듯싶다. 그 수 많은 기억들을 그대로 새겨둔 채로 성인이 되어 떠나려는 아이를 붙잡고 싶어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기억들을 어느 정도 잃어 버리는 것이 독립하는 자식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내려놓는데 오히려 큰 도움이 될 듯도 싶다.

기억하고 싶은 것들

물론 아이들을 키우면서 얻게 되는 소소한 기억들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막내인 내가 쓰던 무명 기저귀를 한 동안 버리시지 못하고 몇 장을 고이 간직해 두셨다던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어머니의 이런 집착은 아이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셨기 때문인 듯 한데, 다행이 요즘은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졌다. 물론 가끔 시간이 날 때나 들여다 보게 되겠지만 과거와 달리 선명한 영상과 사진으로 아이들의 어릴 적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다는 것은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육아의 추억을 보완해 줄 현대 문명의 큰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늘 인상을 쓰던 예전의 나와 달리 요즘은 아이들과 나를 촬영하려는 아내의 스마트폰 뒷 모습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언젠가는 기억조차 아련해질 아이들과의 추억을 조금이라도 보전하려는 아내의 노력을 보면서 오히려 그저 고맙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기어 다니고 걸음마를 하던 시절의 기록이라곤 백일, 돌 사진 한 장뿐인 어머니가 심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퇴근하고 서둘러 전화라도 한 통 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mind

현주석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인지심리 Ph.D.
인지심리학의 주제 중 시각작업기억과 주의에 관한 주제로 박사 학위를 하고, 현재 중앙대 심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인지심리학에 대한 공부를 기초로 인간의 장, 단기 기억과 사고 및 선택적 주의 현상 연구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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