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타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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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타인의 삶
  • 2019.07.10 09:30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타인의 삶'(2006)은 동독시절 저항인사를 감시하던 비밀경찰의 심리적 변화를 통해 친밀감의 조건을 그려내고 있다.
플로리안 헨겔 폰 도너스마르크Floriab Henkel von Donnersmarck 감독의 '타인의 삶'(2006).

프로이트 vs. 에릭슨

여기 어릴 적부터 친했던 소위 말하는 불알친구와 어른이 되어서 새로 사귄 친한 친구가 있다고 하자. 누가 더 친한 친구인가? 그리고 어느 친구가 진짜 나를 이해하고 믿어줄 수 있는 친구일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누구를 고를 것인가?

프로이트Freud와 에릭슨Erikson은 둘 다 비슷한 학문적 배경(에릭슨은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에게서 학문적인 기초를 닦았다)을 공유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마 정 반대의 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점에 대해 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생각한 어른의 조건은 도덕성(양심)과 기술(능력)이다. 어른이 별건가? 법과 양심에 따라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게 바로 어른 아닌가. 하지만 에릭슨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우리가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양심과 능력도 필요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 즉 자기정체성Identity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자기정체성이 이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프로이트가 보는 인간은 자기의 본능적인 욕구와 그 본능의 정반대인 도덕적인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만 하면 되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에릭슨이 보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과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해가면서 성장하는 존재였다. 나는 세상을 믿을 수 있는가, 나는 내 몸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가, 내게 주어진 환경 중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인가, 나는 남들보다 우월한가 열등한가 등등이 바로 그런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정체성의 문제다.

이는 개인의 생각이나 선택이 중요하지 않았던 전근대 사회 프로이트가 살았던 19세기 오스트리아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는 근대 사회(에릭슨이 살았던 20세기 미국)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개인Individaul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구분하다'divide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듯, 개인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남과 구분된 자신을 자각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회가 근대사회냐 전근대사회냐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적 사회에서는 내가 내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 내 삶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내 선택에 따라서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다(최소한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내 길을 선택하려면 일단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기 위한 조건

이렇듯 어른이 되기 위한 조건에 대한 두 사람의 차이는 친밀감의 조건에 대한 정반대의 의견으로 이어진다. 맨 처음 질문에 대해 프로이트라면 불알친구야말로 변치 않는 가장 근원적인 친구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나와 가장 오래 같이 있었고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릭슨의 대답은 다르다.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든 친구관계나 사회관계는 모래성과 같다. 철들기 전부터 사귄 불알친구는 자기정체성이 정립되기 이전에 뭘 모르고 사귄 친구이므로 어른이 되어보면 실제 나와는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누구인지 확인한 이후에 스스로 선택해서 사귄 어른 친구들이야말로 진정한 내 정체성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진짜 친구인 것이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철든 이후부터 세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유지해온 사람이다. 그 신념의 내용은, 인간은 믿지 못할 존재이므로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조사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사람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환경에 놓아두느냐에 따라서 최소한 그의 겉모습은 통제할 수 있다. 따라서 엄격하고 정교한 감시와 통제만이 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이런 그의 신념은 그를 외로운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우선 주변에 자기와 말이 통하는 친구가 없다. 누가 그런 극단적 불신주의를 이해하겠는가. 친밀감은 상대를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남을 믿지 말자는 것이 신념인 사람이 친구를 사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그의 주변에는 가짜들뿐이다. ‘일단 출세만 시켜주면 그때부터 충성 하겠다는 대학 동창이나, 여자배우에게 치근덕거리기 위한 방편으로 국가권력을 이용하는 권력자나, 혹은 아예 명확한 신념을 가질 능력조차 없는 멍청이들만 있을 뿐, 그처럼 확고한 신념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가진 친구는 없다. 그가 충성하는 사회 시스템조차 그의 냉철한 분석과 취조능력은 인정하지만 그 이상은 받아주지 않는다. 덕분에 그는 출세하지 못하고 대학에서 불신의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로 남는다. 그러던 그가 한 커플을 발견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챤 코흐)와 게덱(크리스타-마리아 질란트) 커플.

그는 이 커플을 보는 순간부터 의심한다. 대부분의 의심이 그렇듯 특별한 이유는 없다. 아마도 그저 이들이 남들과는 달리 생기가 넘친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커플의 감시 임무를 맡아 이전에 해왔던 것처럼 철두철미한 밀착감시를 시작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점차 이 커플에 몰입하더니 결국에는 이 커플을 감시하기는커녕 자기의 전 경력을 걸면서까지 보호하기에 이른다.

영화 <타인의 삶>의 줄거리다. 그의 이름은 비밀경찰 비즐러(울리히 뮈흐), 그리고 그가 감시한 커플은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챤 코흐)와 게덱(크리스타-마리아 질란트)이다. 어떻게 보자면 아주 전형적인 설정이다.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냉소적인 남자가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을 만나 신뢰와 헌신을 배우는 이야기. 저 멀리 <카사블랑카> 시절부터 헐리웃 영화에서 늘 사용하던 소재가 아닌가. 이런 관점으로 영화를 보자면 비즐러의 변신이 무척 뜬금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명색이 비밀경찰이니 도청이나 감시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쉽게 마음이 녹아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작에 변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친밀감의 원리

커플을 감시하는 비밀경찰 비즐러(울리히 뮈흐)

하지만 에릭슨이 말한 친밀감의 원리를 생각해보면, 이 변화는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이다. 우선 비즐러와 드라이만 커플은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 그 신념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방법만 다를 뿐, 둘 다 자기가 살아가는 나라를 믿고 사랑한다. 그 신념이 너무도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이용만 당한다는 점에서도 이 둘은 비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둘은 자기 정체성이 뚜렷한 전문가들이다.

이렇게 보자면 이 영화는 냉소적인 남자가 신뢰와 헌신을 배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외롭게 지내던 한 어른이 평생에 한번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친구를 우연히 만나 그에게 최선을 다하는 이야기다. 비록 단 한 번의 대화도 없이 일방적으로 맺어진 기이한 친구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만약 비즐러에게 자신의 신념을 이해해 줄 비밀경찰 동료가 단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의외로 긴 결말을 통해 비즐러가 친구를 고르는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절제된 몇 마디가 주는 길고 강렬한 감정의 근원은 바로 그 진정한 친밀감의 힘이다. mind

장근영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발달심리 Ph.D.
연세대 심리학과 졸업, 온라인 게임이용자 한일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종시 소재 국책연구기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 중. 심리학자, 글쟁이, 그림쟁이, 영상 중독자, 밀리터리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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