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변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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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변주 6
  • 2020.04.02 10:00
꽤 꼼꼼하게 그린 음식점 그림이 어색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홍도의 풍속화나 피카소의 모자상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음식점 그림이 어색한 이유

지난 번 글에서 독립된 세 개의 시각정보통로, 즉 색상, 모양(밝기), 깊이 및 양안정보 통로의 특성 때문에 색의 변주라는 기법이 가능하다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 이것 외에도 동일한 시각특성 때문에 생겨난 기법들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더 소개한다면 윤곽선과 색면色面을 일치시키지 않는 기법이다. 줄여서 색면 불일치 기법이라고 하자. 이 기법이 발산하는 세련미 또한 여간 아니다.

성북동에는 맛있는 토속 음식점 들이 몇 군데 있다. 이런 식당들은 토속음식점답게 지붕에 기와를 얹고 맷돌이나 방아와 같은 민속품을 식당 안팎에 배치해 놓는다. 실내 벽도 빠트리지 않고 황토를 발라 토속적인 느낌을 더한다. 그런 토속점 가운데 한 군데에서는 황토 벽 위에 사진과 같은 풍속화까지 그려 놓았다. 그런데 이 풍속화는 우리가 도록을 통해 익히 보아왔던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와는 뭔지 모르게 가볍고 어색하다.

한 마디로 말해 단원이나 혜원의 그림이 풍기는 풍취를 느낄 수가 없다. 분명 이 풍속화는 현대적인 소묘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린 것이다. 그래서 그림의 원근법이나 인물들의 해부학적 특징 등이 단원이나 혜원의 그림보다 더 정확하다. 그런 만큼 어색함은 없어야 한다. 혹자는 대중식당에 그려진 그림이니 그 수준에 맞는 만큼만 공을 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려진 대상의 묘사를 보면 대충 그린 그림은 아니다.

김홍도 풍속화의 매력

원인은 단원과 혜원의 그림에서 풍기는 유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단원의 그림은 유연성, 여유로움, 자연스러움이 뛰어나다. 그런데 이 식당의 풍속화는 그런 맛이 없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보자. 아래 그림은 단원의 <씨름>이고 그 우측은 <씨름>을 포함한 그의 여러 그림들에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이 그림들을 보면 단원은 얼굴, 팔, 다리 등을 그릴 때 윤곽선과 그 속을 채운 살색을 정확히 일치시키지 않았다. 가령 씨름꾼의 얼굴이나 팔을 보면 살색이 윤곽선 못 미쳐 끝나는 경우가 많다.

단원은 윤곽선과 색면을 일치시키려 굳이 애쓰지 않았다. 살색이 필요한 부위에 더도 덜도 아닌 필요한 만큼만 살색을 대충 묻혔다. 그런데도 보는 이들은 이 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이런 양식의 그림은 자연스러움에 더해 알게 모르게 감상자들에게 간결한 느낌, 편안한 느낌을 준다. 반면 토속 식당의 그림은 저고리의 흰색이 윤곽선과 거의 일치하게 칠해져 있다. 사실 이 그림에는 윤곽선이 필요 없다. 저고리의 흰색과 황토색 벽 사이에 밝기대비가 커 그 부분에서 이미 윤곽정보가 충분히 드러난다. 큰 밝기대비와 윤곽선이 모두 있는 것은 모양정보의 과잉인 셈이다. 이런 점이 단원의 그림에서와 같은 여유로운 감성을 앗아간 것이다. 단원의 간결함과 편안함은 피카소의 그림에서도 만날 수 있다.

피카소의 <모자상>

단원보다 약 200년 정도 후에 태어난 피카소가 1922년에 그린 <모자상>이다. 피카소가 큐비즘 스타일을 접고 네오클래식 양식을 선보일 때의 그림이다. 그래서 <모자상>은 큐비즘 양식과 달리 간결하지만 사실적인 양식으로 그려졌다. 그 간결함은 마치 단원의 그림에서 만났던 것과 거의 같은 기법에서 나온다. 엄마의 쉐터나 머릿결, 아이의 머릿결과 파란 상의의 색들이 윤곽선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런 여유와 자유로움은 단원의 그림에서처럼 그대로 보는 이의 마음에 전해진다.

Pablo Picasso,  'Mother and Child', 1922, Lithograph, Baltimore Museum of Art.
Pablo Picasso, 'Mother and Child', 1922, Lithograph, Baltimore Museum of Art.

이야기를 정리하자. 대개 사람들은 색을 칠할 때 윤곽선을 벗어나지 않으려 조심한다. 우리는 그래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단원이나 피카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유연하고 여유로운 인상을 풍긴다. 어찌된 일일까? 흑백의 모자상을 보자.

채색의 비밀

아기 옷의 파란 색이나 엄마의 스웨터 색과 배경의 엷은 녹색 사이에 밝기차이가 거의 없다. 엄마의 머릿결 색이 좀 진하기는 하지만 배경색에 이르는 동안 급격한 밝기변화는 거의 없다. 이 점이 토속음식점 황토벽에 그려진 풍속화와 다른 점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모자가 입은 옷의 파란색과 짙은 갈색에서 모양정보가 거의 추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양정보는 급격한 밝기차이에서 나온다고 지난 번 글에서 이야기 했다. 옷이나 머릿결과 관련된 모양정보는 가늘고 짙은 색으로 그려진 간단한 스케치 외에는 나올 곳이 없다. 다시 말해 색을 대충 칠했어도 짙고 가는 윤곽 스케치와 충돌을 일으킬 또 다른 모양정보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색함이나 불편함을 느낄 리 없다.

이 기법의 핵심은 색을 배경색의 밝기와 유사하게 칠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다소 소홀한 점이 있는 사례를 보자. 아래 그림은 89년인가 국내 미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팜플렛 속 일러스트레이션이다. 친구이기도 한 작가는 독특한 양식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당시 국내 디자이너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이 그림은 피카소나 단원의 그림과 전혀 다른 느낌을 주지만 핵심기법은 동일하다. 짙고 가는 윤곽선과 색면의 불일치! 당시로서는 매우 세련되고 독특한 기법의 그림이었지만 몇 군데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좌상단과 우하단에 있는 양반의 갓이다. 흑백으로 변환된 그림을 대부분은 피카소의 그림과 비슷하게 배경색과 밝기차이가 적은 색을 칠했다. 그러나 갓에 칠해진 짙은 색면은 배경과 밝기대비가 강하다. 이 부분에서는 가는 선으로 그려진 갓의 모양과 밝기대비가 강한 색의 가장자리가 만든 모양이 충돌을 일으킨다. 모양정보는 한 곳에서만 나와야 한다.

미술기법의 배후에 있는 원리를 이해하는 일은 이런 점에서도 유용하다. 기법을 빨리 정확하게 익히게 하고 예상치 못한 실수를 줄이게 하니까. mind

지상현 한성대 융복합디자인학부 교수 지각심리 Ph.D.
홍익대 미술대학과 연세대 대학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회화양식style이 결정하는 감성적 효과에 관한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는 한중일의 문화를 교차비교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삼국 미술양식의 차이를 규명하고 이 차이를 결정하는 감성적 기질의 차이를 추정하는 일이다. 관련 저서로는 <한국인의 마음>(사회평론)과 <한중일의 미의식>(아트북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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