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해, 혹은 고통에 대하여
상태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해, 혹은 고통에 대하여
  • 2019.07.12 08:00
청소년의 자해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자해 문화를 애써 무시하려 했던 사회적 분위기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 비로소 자해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논의가 시작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자해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

#1 중학생 지민이(가명)는 인스타그램에 간헐적으로 팔목 안쪽을 칼로 여러 차례 그어서 바코드 같은 모양이 된 것을 사진 찍어 올린다. “이제 다시 시작” 이라는 글과 함께 보이는 0.5-1cm 간격으로 빨간 피가 잔뜩 맺혀 있는 5-6cm의 직선들. “예쁘다”, “수고했어” 라는 댓글이 달려 있다. 지민이는 상처가 아무는 동안에 얼굴이나 전신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스스럼이 없는 모습이다.

#2 성별을 알 수 없는 한 자해러(자해하는 사람)의 사진들은 들여다보는 데에 용기가 필요하다. 이 친구는 아예 사혈(피를 몸 밖으로 빼는 것)을 한다. 몸 어딘가에 상처를 낸 다음 피를 모아서 종이컵에 담아 사진을 찍어 올린다. 사진 속 종이컵 반 정도 되는 높이까지 붉은 피가 담겨 있는데, 이번엔 지난번보다 좀더 많이 뽑아봤단다. 피 젤리를 만들려고 했는데 어렵겠다는 멘트는 심지어 꽤 시크해 보인다.

자,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지금 마음 상태가 어떤가. 결코 편치 않을 것이다. 피하고 싶거나, 남의 일이라 여기고 무심히 넘기고 싶을 수도 있다. 최근 청소년과 20대 젊은이들의 자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사회적 관심과 우려가 증가하고 있다. 교육부가 작년 초에 전국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7만여 명의 학생들이 ‘자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7%가 넘는 숫자이다. 그러나 자해 학생에 대한 학교의 조치를 피하기 위해 솔직하게 응답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을 것이므로, 7%라는 것은 실제보다 훨씬 적은 수치일 가능성이 크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자신의 귀를 자른 지 한달만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을 남겼다. 그에게 그림은 치유의 길이었다. 1889년 1월의 일이다. 캔버스 유화, 60.5× 50 cm, 1889, 영국 코토울드미술관 소장. 

자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장의 분위기는 더욱 심각하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나 임상심리전문가 등 많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자해 문제로 찾아오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청소년 자해의 심각성을 ‘심리사회적 재난’ 수준으로 판단할 정도다. 작년 9월 여러 관련 단체가 모여 “자해 대유행, 대한민국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심포지엄을 개최한 이유이다.

그러나 사실 청소년들의 자해 행동은 최근에 특히 사회적인 주목을 받는 것일 뿐,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부터 학계에서는 청소년이나 성인기 초기의 자해 행동은 발생 비율이 꽤 높다고 보고되어 왔다. 2013년 미국 정신의학회가 발간된 『정신질단 및 통계편람 5판』에는 자살 의도 없이 반복되는 자해행동이 독립적인 진단의 가능성이 있는 정신과적 문제로 등재되었다. 2005년에서 2011년 사이에 약 20개국에서 발표된 52개 연구를 분석하면 자해 청소년의 비율은 18%나 된다Muehlenkamp, Claes, Havertape, & Planer, 2012. 우리나라 역시 아직 체계적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난 14년 간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의 자리를 지켜온 암울한 현실을 고려할 때, 자해 청소년의 비율은 더 높으면 높지 낮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자해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것은 SNS을 통해 자해 사례가 크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대에 들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즉각적으로 사진이나 글을 올릴 수 있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 사용이 활성화 사용되면서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청소년 자해 행동이 사회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자해 대유행’이란 표현이 등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러다 보니 SNS에서 자해를 방조하는 콘텐츠의 유통을 규제하자는 목소리가 나와서 ‘자해를 자극적으로 묘사하거나 미화하는 콘텐츠의 유통을 금지’하는 내용의 법률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동시에 사회가 아동, 청소년들의 정서적 보살핌을 소홀하게 여긴 것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우리를 보고 호들갑을 떨지 말고 

그러나 자해 청소년들은 그 어떤 노력에 앞서 대부분 ‘이해해달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해하는 것을 나쁘게만 보지 말고 그냥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힘든 것을 몰라주면 모르는 거예요.”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호들갑 떨면서 성가시게 하는 것이 제일 싫어요.”

몸 아픈 것이 마음 아픈 것보다 낫다며 자해하는 아이들의 육성이다.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람은 본래 타인의 고통이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을 때에만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를 정서적 공감이라고 한다.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뇌과학자들은 우리의 뇌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인지적으로 이해할 때 활성화되는 인지적 공감의 회로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Cox, Uddin, Di Martino, Castellanos, Milham, & Kelly, 2011. 우리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타인의 고통이라도 의지와 노력을 통해 인지적인 공감에 도달할 수 있고, 정확한 인식과 이해를 통한 인지적 공감은 고통을 받고 있는 타인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 ‘인식이 곧 위로라는 것’이다.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 받는다는 것은 이해 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 문학평론가 신형철

Self-Portrait, September 1889. Musée d'Orsay, Paris(oil on canvas, 60.× 54.0 cm)
자해를 할 정도의 광기를 드러냈지만 고흐는 그림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탐구했다. 캔버스 유화, 60.0× 54.0cm, 1889, 오르세미술관 소장. 

자해를 '하는' 이유

자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해 행동의 동기와 기능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자해의 이유와 기능을 크게 4가지로 정리한다Nock & Prinstein, 2004.

  • 본인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거나 정서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
  • 분노나 불안감 같은 부정적인 정서 상태를 완화시키기 위해.
  •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나 지지를 얻기 위해.
  • 사회적으로 자신의 의무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지금 이 상태로는 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자해는 심리적 한계상황에서 일어난다. 말로 하기 어렵거나 소용없다고 느낄 때 감행된다. 과학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자해 행위는 심리적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 고통은 다른 고통으로 인해 줄어드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실험 연구에서 신체적 고통이 두려움을 감소시켰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다. 한 실험에 따르면 차가운 얼음물로 인해 신체적 고통을 느끼면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독거미를 지켜 보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무런 신체적 고통 없이 독거미만 보고 있었던 사람들에 비해 심리적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적었다Hollin & Derbyshire, 2009. 이 밖에도 신체적 고통이 동반될 때 죄책감, 발표 불안 등의 부정적인 심리 상태가 완화된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다.

자해 행동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 심리적 고통을 감소시키는 현상은 아마도 엔도르핀과 같은 내인성 아편물질과 연관된 것 같다. 이 물질은 고통과 정서의 조절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자해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내인성 아편물질 수준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낮으며Stanely etc. 2010, 자해 행동을 할 경우 내인성 아편물질이 분비된다는 것이다Symons etc. 2004. 따라서 고통을 조절하는 내인성 아편물질이 부족한 이들은 자해를 통해 이를 분비함으로써 고통을 감소시킨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왜 하필 자해 행동일까? 엔도르핀과 같은 내인성 아편물질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시원하게 달릴 때, 친구들과 수다 떨며 웃을 때에도 분비되는데 말이다. 자해하는 이들에겐 아플 때 다른 아픔을 자초하는 것으로 아픔을 감소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사실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가 어렵고 운동을 하러 나서기도 어렵다. 하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같이 한바탕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없다면 더욱 힘들어진다. 심리적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자해 행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사실 일상적인 활동의 즐거움을 잃은 것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을 해봐야 한다.

동물도 다르지 않다

자해 행동은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인간과 유사하여 심리학 실험실에서 가장 좋은 실험 동물로 꼽히는 레서스 원숭이들의 경우, 실험실 우리에 갇혀 있을 때 14%가 스스로를 무는 자해행동을 한다Jorgensen, Kinsey, & Novak, 1998. 우리에 갇혀 있는 원숭이들의 자해 행동은 주로 정서적으로 매우 힘들지만 어찌 해볼 수는 없는 상황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애정을 나누던 무리와 헤어졌을 때, 성적 관계를 맺고 있는 파트너와 헤어졌을 때, 우리가 바뀌는 등 큰 변화로 인해 일상생활에 혼란이 생겼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위협적인 대상과 함께 있을 때, 또는 우리에 혼자 갇혀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간 동물원 관리자나 동물 실험 연구자들은 동물들의 자해 행동을 멈추게 하기 위해 이런저런 환경적 변화를 시도해보았다. 그런데 퍼즐에서 땅콩을 꺼내게 하는 장치와 같이 일반적으로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장치를 제공해도 자해 행동의 빈도는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단순히 환경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큰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Reinhardt &Rossell, 2001. 갇힌 우리 안에서 사랑하는 대상과의 이별, 고립된 생활, 큰 생활의 변화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던 원숭이들이 끝내 자해 행동을 한다는 것, 그 원숭이들이 단순히 환경을 바꿔주는 것으로 자해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자해 행동은 끔찍한 심리적 고통을 느끼는 동안 그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자해를 드러내는 이유

심리적 고통이 극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자해 청소년들이 SNS을 통해 자해 사진이나 글을 올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SNS에 업로드된 자해 게시물에 대한 피드백은 크게 두 종류다. ‘힘내라’는 지지 또는 ‘멋지다’는 인정과 같은 긍정적인 반응, 아니면 ‘관종’(관심종자,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라는 비난이다. 두 종류의 피드백을 모두 찬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독일의 한 연구에 따르면, 2016년 봄의 4주 간 인스타그램에서 발견된 비자살적 자해 행동과 관련된 해시태그가 붙은 게시물은 무려 6,721개의 계정에서 32,182건으로 집계되었다Brown etc. 2018. 6천여개의 계정이 4주간 평균 약 5개의 자해 게시물을 올린 것이다. 이렇게 많은 계정에서 이렇게 자주 자해 게시물이 전시되는 상황에서, 관심을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해를 하는 청소년들이 관종이라 비난하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많은 전문가들이 자해 청소년들을 향해 관종이라는 편견을 갖지 않을 것과 그런 언급 자체를 피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자신의 자해 행동을 SNS에 올린다고 하더라도 그 청소년이 오로지 사회적 관심을 받기 위해서 자해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해 행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여 자해 청소년들의 일부가 관심을 끌기 위한 자해를 하고 있다면 그들은 비난이나 무관심을 받아 마땅한 걸까.

왕따를 당하고 있거나 가족들로부터 충분한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청소년이 자해 행동을 한 후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 정서적 지지를 받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자신의 게시물에 “과감한 행동이 멋지다”는 댓글을 다는 또래도 있고, “괜찮다”, “힘내라”고 격려하는 인생 선배들도 있을 수 있겠다. 반복되는 자해 게시물 업로드로 인해 시시각각 ‘좋아요’ 하는 하트 알람이 울리고 팔로우가 늘어난다면 어떨까? SNS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공감하겠지만, 내가 올린 사진이나 글에 대한 ‘좋아요’ 알람, 관심글 지정, 댓글, 리트윗 등은 게시물을 올리고 계정을 관리하는 나에게 큰 즐거움, 즉 보상reward이 된다.

우리가 온라인 SNS 활동을 하면서 얻는 사회적 보상은 돈이나 음식에 준하는 가치가 있다. 이미 많은 연구에서 칭찬이나 명성을 얻는 것 등의 사회적 보상이 돈이나 음식 같은 직접적인 보상과 동일한 신경회로를 공유한다는 것이 밝혀졌다Lin, Adolph, & Rangel, 2012. 특히 청소년기에는 또래로부터의 피드백이 아동기나 성인기에 비해 큰 보상으로 작용하며, 또래에게 받아들여질 때 아동기나 성인기에 비해 뇌신경활성화가 크게 일어난다Guyer, Choate, Pine, & Nelson, 2012. 또한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나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은 높은 자존감, 학교 생활 적응, 높은 자기 가치와 연결된다Vanhalst, Luyckx, Scholte, Engels, &Goossens, 2013.

심리적 고통으로 인해 자해 행동을 하는 청소년이 있고 그가 일상의 다른 즐거움이나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회적 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SNS상에서의 인정만큼 매력적인 것이 있을까. 어떤 자해 계정에 만 명의 팔로우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의 자해를 제지하기 위해 어떤 대안적인 보상이 있을 수 있을까. 가정이나 학교에서 삶의 의미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해 청소년들에게, SNS 계정에 자해 행동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존재감을 발견하는 해방구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고흐는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정신과 의사인 가세박사(Dr. Gachet)를 찾았다. 그가 죽는 해 남긴 가세 박사의 초상화는 가세박사와의 우정을 나타내는 것이며,  마지막까지 과학적 방법으로 자신의 광기를 치유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흐는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정신과 의사인 가세박사Dr. Gachet를 찾았다. 그가 죽는 해 남긴 가세박사의 초상화는 가세박사와의 우정을 나타내는 것이며, 마지막까지 과학적 방법으로 자신의 광기를 치유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캔버스 유화, 68 x 57cm, 1890,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자해하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흔히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전시할 때 그 고통의 정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관심 받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싶으면, 저이가 정말 힘든 것이 맞나 의심하고, 짐짓 그 고통을 무시함으로써 고통을 전시하는 행동을 반복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스스로를 해하는 극적인 행동이라면 원하는 관심을 제공함으로써 자해 행동이 강화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며, 짐짓 무시하며 관찰해야 하나 아니면 그 행동을 벌을 줌으로써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진다.

그러나 이 중 어떤 것도 적절한 대처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뇌에서 의사결정 과정을 거친다. 우리의 뇌는 해야 할 행동과 한 행동의 보상적 가치를 계산하고 처벌적 결과를 따져서 매우 합리적으로 둘을 비교한 후 마침내 행동을 결정한다. 따라서 일견 어떤 사람의 행동이 쓸데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그에게 가치가 있다면 그는 그 행동을 계속 선택할 것이다. 자해 행동을 하는 청소년들 각각은 어떤 것을 긍정적 보상으로 느끼고 가치를 부여할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비로소 사랑하는 친구, 자녀, 제자에게 도움이 될만한 대처 방식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피할 일은, 자해 행동 그 자체에만 일시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미 보상을 통해 강화된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도록 소거시키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해당 행동을 하지 않아도 보상을 주는 방법이고contingency degradation 다른 하나는 해당 행동을 할 필요가 없는, 즉 더 이상 보상이 아쉽지 않은 상태를 만들어주는 방법이다outcome devaluation. 예를 들어, 실험실 케이지 안의 쥐에게 버튼을 누를 때마다 규칙적으로 단물을 제공했다면, 그 쥐는 단물을 먹고 싶을 때마다 버튼을 누르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대표적인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이다. 레버를 눌러서 단물을 먹는 것을 학습시킨 후, 이번엔 쥐가 버튼을 누르지 않게 하기 위해선 위의 두 가지 방법을 쓰면 된다. 즉,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단물을 주거나, 단물을 미리 실컷 먹게 해서 배부르게 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버튼을 누르나 누르지 않으나 단물을 보상받을 수 있으므로 버튼을 굳이 누를 필요가 없어지며, 후자의 경우 단물을 실컷 먹고 배부른 쥐에게 단물은 별로 가치가 없기 때문에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어진다. 더 이상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는 쥐는 나중에 배고플 때나 단 게 필요할 때에도 버튼 누르는 걸 잊어버리게 된다.

강화학습 이론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자해 행동을 전시하는 청소년들이 결국 얻고자 하는 관심이 자해 행동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한 관심이라면, 우리는 그들이 그 행동을 하나 하지 않으나 일관적인 관심과 지지, 인정을 쏟고, 그 애정 어린 관심으로 포만감이 들어 더 이상 허기를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 어쩌면 심리적으로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모습을 수수방관해온 것에 대한 사과가 선행되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mind

[자해 청소년을 대하는 어른들을 위한 조언]

  1. 짐짓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한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2. 자해는 아이가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고 정서적인 지지가 부족할 때 나타납니다. 아마도 하루 이틀 사이의 어려움으로 그러는 건 아닐 겁니다. 오랫동안 힘들었을 거예요.
  3. 뭐가 부족해서 그러냐는 질문은 네가 부족한 게 있을 리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질책입니다. 마음속으로도 하지 마십시오.
  4. 뭐가 문제냐는 질문은 네가 생각하는 문제는 문제라고 볼 수 없다는 무시와 무관심의 증거입니다.
  5. 어떤 게 힘드냐고 물어보면 바로 대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힘든 게 뭔지, 힘들 때 기분이 어떤지 알아차리고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든 일, 기분, 감정에 대해 자주 물어보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 시간을 쓰고 노력을 들이셔야 합니다.
  6. 무섭고 힘드실 겁니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진 마십시오. 아이를 대할 때에는 본인의 감정을 잘 컨트롤하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대해야 합니다. 내 감정이 우선시 되어 아이에게 내 힘든 감정까지 감당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절대.
  7. 혼자 하기 어렵습니다. 정신건강 전문가와의 개인 상담을 추천합니다.
박혜연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 Ph.D.
대학병원 공공의료사업단에서 공직자 및 일반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관리와 정신건강 문제 예방 및 치료를 위해 일하고 있는 임상심리전문가이다. 경기도 소방심리지원단 부단장, 보건복지부 전문 카운셀러를 역임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Hkj232 2020-01-13 01:47:37
정말 좋은글 감사합니다

ㅇㅇ 2019-07-26 20:19:52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