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은 왜 그리고 어떻게 개인에게 등을 돌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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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은 왜 그리고 어떻게 개인에게 등을 돌리는가
  • 2020.08.20 11:48
트라우마 생존자 수기 《김지은입니다》가 발간되었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권력형 성범죄가 발생하며 이를 둘러싼 조직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난 7 9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실종신고 7시간 만에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비서실 직원 성추행 혐의로 그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된 다음 날 일어난 일이다지난 4월에는 오거돈 부산시장이 직원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사퇴했다그에 앞서서는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그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비서 김지은 씨의 폭로 직후 지사직을 내려놓았으며 현재 유죄로 실형이 확정되어 수감 중이다여당의 광역 단체장이자 유력 대권주자로 손꼽히는 이들에게 잇따라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었다특히 박원순 시장 개인은 여성운동에 큰 획을 그은 시민운동가이자 성 평등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온 행정가이기도 했다평생의 행보와 모순되는 그의 마지막은 시민사회에 더 큰 충격을 주었고 남은 사람들에게 그 죽음을 소화하는 숙제를 남겼다고발과 고발을 둘러싼 사회 그리고 조직의 대응을 살펴보면 각각의 사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조직과 시스템의 문제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이 드러난다.

권력형 성범죄와 조직의 반응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생존자 김지은 씨의 수기 김지은입니다(봄알람, 2020)는 어떤 맥락에서 권력형 성범죄가 발생하며 이를 둘러싼 조직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생생하게 증언한다해당 사건의 판결에 관건이 된 핵심 키워드는 ‘(업무상위력이었다위력은 물리력이나 언어적 협박을 통한 강제 없이도 행사되는 힘이다김지은 씨는 ‘저는 지사님이랑 합의를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지사님은 제 상사이시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그런 사이입니다.’라는 말로 위력을 표현했다김지은 씨에게 안희정 전 지사는 권력을 가진 개인이기도 했지만그가 속한 조직의 지도자이기도 했다그들이 속한 조직의 맥락이 위력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책에서는 ‘피해자 김지은만큼이나 ‘노동자 김지은이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어진다노동자 김지은이 처한 노동 환경을 살펴보면 조직의 문화와 가치수행비서라는 역할에 따라 규정된 행동 규범이 폭력이 일어나고 유지되는 데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배반 트라우마 이론

트라우마에 관한 심리학 연구들에 따르면 개인이 신뢰하는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난 폭력이 더 깊고 해로운 후유증을 남긴다고 한다이러한 폭력은 신뢰에 대한 위반을 수반하기 때문이다부모나 교사 등 내가 의지하는 혹은 나에게 보호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폭력을 가할 때 피해를 입은 개인의 일차적 반응은 그러한 일이 일어났고 그게 폭력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가해자가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그 순간 칼로 자르듯이 그와 나의 관계가 가해자-피해자로 정리될 수는 없다두려움과 분노뿐 아니라 사랑과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동시에 가지는 것은 안전을 위해 내가 의존하는 대상이 나를 해치는 모순되는 상황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중요한 관계를 잃을 수 있기에 차라리 없던 일처럼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그러나 애써 무시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생존을 위한 적응은 대가를 치른다실제 경험과 나의 이해에 괴리가 생기며 자아의 통합을 상실하게 된다자신의 내적 경험을 있는 그대로 믿기가 어렵고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타인은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기에 타인 또한 믿기 어렵다. ‘배반 트라우마 이론의 핵심이다Freyd, 1998.

 ‘조직의 배반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일어난 폭력에 대한 배반 트라우마 이론을 확장한 개념이다개인이 소속되거나 관계하는 조직이나 집단의 맥락에서 ‘배반이 일어나며이는 트라우마 반응을 악화시킨다Smith & Freyd, 2014.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조직이나 집단과도 관계를 형성하며 그중 일부는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어떤 조직은 나의 정체성과 소속감삶의 의미와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으며(직장종교 공동체 등삶의 과정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의료 기관교육 기관사법 기관 등). 개인은 이런 기관을 신뢰하거나 의지한다이러한 신뢰와 의지의 대상인 조직이 이를 위반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 조직의 배반이 일어나며이는 개인의 트라우마 후유증을 악화한다고 알려져 있다대표적으로는 조직 내에서 폭력이 발생했을 때조직이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려는 시도가 피해자에게 배반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René Magritte. The Menaced Assassin. Brussels, 1927. Oil on canvas, 59 1/4″ × 6′ 4 7/8″ (150.4 × 195.2 cm). The Museumof Modern Art. Kay Sage Tanguy Fund. © 2013 Charly Herscovici, Brussels/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René Magritte (1898~1967). 'The Menaced Assassin'. 1927. Oil on canvas, 150.4 × 195.2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침묵의 공모

 개인 간에 일어나는 배반 트라우마에서 개인이 적응을 위해 학대에 눈감기를 택하듯이조직의 배반에서도 가해자와 방관자들은 폭력을 보고도 못 본체한다진실은 조직의 안녕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폭력을 숨기는 시도들이 피해자에게 2차 가해로 작용한다침묵의 공모 속에 폭력은 거듭 재발하고특히 약자와 소수자에게 위험한 환경이 조성된다피해자 자신조차도 이러한 배반을 인식하지 못하거나인식하더라도 눈을 감아버린다이는 진실 드러내기가 자신과 조직의 관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생계와 생활의 안정이든소속감과 자부심이든가치와 신념이든 삶의 중요한 목표를 조직 안에서 추구하고 실현해온 개인이라면 누구나 조직이 나의 안녕을 해칠 때 갈등할 수밖에 없고 폭력을 애써 외면하고자 시도할 수 있다. 1심 재판부는 김지은 씨에게 정조보다 무엇이 중요했는지 물었다노동자로서 또 개인으로서 여성에게는 정조라는 시대착오적 허상의 가치보다 중요한 게 너무나 많다.

 조직의 배반이 일어나는 조건

김지은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일했던 안희정 캠프그리고 충남도청은 이러한 조직의 배반이 일어나기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연구자들은 조직의 배반이 쉽게 일어나는 조직 특성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제시한다첫째성원이 되기 위한 자격 요건이다조직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분명하며폐쇄적이고 ‘좋은 성원의 기준이 확실한 곳에서는 순응이 강조되며 일탈 행동에는 곧바로 제재가 가해진다성원들은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며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는 쉬쉬한다(이하 괄호 안은 김지은입니다에서 발췌, “이력서보다 선배들의 추천과 입김이 채용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치권의 평판 조회는 무서운 것이었다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봐야 했고 웃어야 했다.”, 81쪽). 둘째 요소는 위신으로조직이나 그 리더가 사회와 공동체에서 권위 있고 높은 지위를 차지할 때 그가 폭력의 가해자가 되거나 촉진할 잠재력은 쉽게 간과된다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리더 앞에서는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하거나 잘못을 지적하기 어렵다(“피고인은 본인이 가진 권세가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피고인 주변의 모두가 피고인의 말에 반문하지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피고인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진행해서 피고인 앞에 대령해 놓았습니다.”, 345쪽, 1심 결심공판 최후진술 중). 셋째는 우선순위로조직이 조직에 속한 개인의 안녕보다 성과나 목표다른 가치를 중요시할 때 폭력 상황에서 피해자가 보호받기 어려워진다(“불법과 부정이 횡행했지만 모두가 눈 감았다그곳에서 조직의 대의와 목적 이외 모든 것은 사사로웠다사람도 인권도 정의도 그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것에 불과했다.”, 109쪽).

침묵을 강요하는 조직

앞서 말한 특성들의 위험은 조직 내부의 폭력 혹은 부정에 대한 고발이 이루어질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침묵을 깨고 피해자가 입을 여는 순간조직의 배반은 수면 위로 떠오르며 여러 방법으로 피해자를 공격한다. ‘네가 이상한 거야라며 불합리한 관행과 문화를 정상인 것처럼 포장하는 분위기그동안 문제 제기가 묵살되었던 경험을 통한 학습진실 규명과 정당한 처벌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도 그 대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할 위험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 등 피해자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폭로와 동시에 피해자가 느낀 잠재적 위협들이 어김없이 실체가 있는 폭력으로 가시화되며그 침묵조차도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으로 다시 피해자를 공격하는 빌미가 된다고발의 진실성과 중요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고발 당사자에 대한 공격과 비방이 이어지며평소의 품행을 문제 삼기도 한다(“그럼에도 오직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조작된 진술들의 힘은 강력했다... 전략의 목적은 명확했다메시지를 반박하지 못하니 메신저를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이 여자가 어떠어떠한 사람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어떤 과거가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아닐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내가 낸 증거들과 상관없는 진술들로 나의 말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172쪽).

 조직의 배반은 신뢰를 위반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형태로혹은 신뢰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누락하는 형태로 나타난다그중 신뢰를 위반하는 행위는 보다 명백하다피해자와 내부 고발자 처벌은 피해자가 고발을 철회하는 직접적인 효과를 가져오며이후의 고발을 잠재우는 효과도 있다폭력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고의로 증거 없애기피해자 고립시키기불이익에 대한 협박과 실제 불이익 주기 등이 모두 해당한다필요한 조치의 누락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마찬가지로 해롭다내부 고발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기접수된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기 등 피해자 보호와 재발 방지를 위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조직 차원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것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이러한 누락은 내부 고발자그리고 잠재적 내부 고발자인 다른 성원들에게 암묵적으로 ‘도와주지 않겠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이후의 고발을 차단한다.

 이러한 양상은 정치권뿐만 아니라 심각한 수준의 조직 내 폭력이 빈번히 일어나는 집단들에서도 공통으로 발견된다폐쇄적이고 경직된 종교 집단에서의 성폭력과 조직적 은폐스포츠팀에서 일어나는 집단 괴롭힘군대에서 성폭력이 유독 가볍게 다루어지는 문제간호사들의 ‘태움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폭력이 어떤 환경에서 유독 무성하게 자라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은 ‘아무런 외침도 들을 수 없는 곳이 가장 위험하다라고 입을 모은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

내부에서 일어난 트라우마 사건에 대한 조직의 배반은 흔히 찾을 수 있는 현상이며 사건 처리의 투명성을 높이고 구성원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바로잡을 수 있다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우선이다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문제는 반복된다이름 없는 문제는 다시 반복되더라도 마치 처음 생긴 문제처럼 다루어질 수 있다조직의 문화나 다른 사건들과는 독립된 예외적 사건이자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치부되어 조직의 문화와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와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생존자의 고통 또한 심해질 수 있다일어난 사건이 단순히 개인으로부터 당한 폭력이 아니며신뢰하고 의지했거나 삶에서 어떤 의미로든 중요한 조직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일임을 아는 것은 생존자의 회복을 위해 중요할 수 있다개별 사건이 아닌 사건을 둘러싼 맥락을 살펴보는 일은 우리가 외로운 싸움을 해나가는 혼자가 아니며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 ‘우리임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안희정은 수감되었지만 김지은 씨의 싸움곧 우리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김지은 씨를 조직적으로 음해하고 심지어 법정에서 위증한 사람들은 승진하거나사회의 요직에 나아가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한다반면 김지은 씨를 도와준 사람들은 직접간접적인 불이익을 받고 있다수감 중 치러진 안희정의 모친상에 유력 정치인이 줄지어 빈소를 찾았고현직 대통령은 화환을 보냈다서울시는 박원순 시장의 장례를 5일간의 서울특별시장으로 치렀고여당 의원 등으로 구성된 장례위원회는 ‘피해자 기자회견 보도 자제를 기자들에게 당부했다이 모든 현상을 거대한 배반 트라우마의 징후들로 읽힌다그렇지만 그게 현실의 전부는 아니다두 눈을 똑바로 뜨고계속해서 드러내고 말하는 사람들과 말하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김지은입니다는 상처와 고통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용기와 희망사랑에 대한 기록이자 트라우마 이후 이어나가는 삶의 이야기이다진실과 존엄을 위해 오랜 시간 살아서 싸우고 증언한 김지은 씨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mind

   <참고문헌>

  • Freyd, J. J. (1998). Betrayal trauma: The logic of forgetting childhood abuse. Harvard University Press.
  • Smith, C. P., & Freyd, J. J. (2014). Institutional betrayal. American Psychologist, 69(6), 575.
  • 김지은. (2020). 김지은입니다봄알람.
이한별 사회적협동조합 사람마음 활동가 심리학 MA
임상심리전문가로 사회적협동조합 사람마음에서 트라우마 생존자를 위한 심리지원을 하고 있다. 느슨한 전두엽을 가지고 있지만 절차기억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좋은 습관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언니들이 멋있어 출근할 힘이 나는 언니 덕후. 사람마음의 기부 회원이 되어 주세요! https://www.traumahealingcenter.org:46084/page_oqyO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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